66화
예상하지 못한 급발진 전개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야오옹(미각이 상당히 약해진 것 같군).”
“쿨럭, 쿨럭!”
“리을 씨?”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기 물 좀 드세요.”
기유현이 건네준 물 컵을 받아 벌컥 들이킨 뒤에야 겨우 기침이 멎었다.
지금 되게 아무렇지도 않게 큰 폭탄을 터뜨린 거 아냐? 내게 아랑곳하지 않고 미음이의 말은 이어졌다.
“이야오옹(상당히 진행되어 있군……. 이 정도면 정신면에도 영향이 있을 거다).”
‘그게 뭔데……. 아, 설마.’
퍼뜩 전에 미음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위대한 자 어쩌고와 너무 동조하면 본래의 자신을 잃는 경우가 있다고 했던가.
‘유현 씨가 그 위대한 자와 계약을 맺었단 뜻이야?’
“왜옭 왜오옹(그래. 그것도 상당한…… 아니? 이럴 수가……. 이건 놀라운데)…….”
‘미음아?’
“냐아아아(이상하군. □□의 안배와 다르다. 어째서 이 시점에 이렇게…… 설마 □□ □□□가)……!”
[Warning: 비정상적인 접근입니다.]
[System Error: —. —.—]
미음아, 너 때문에 에러 창 뜨잖니…….
나는 마구 왜옹거리며 혼잣말을 하는 미음이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기유현의 머리 위를 다시 보았다. 만족도 게이지는 여전히 98% 정도로 가득 찬 상태다.
‘미각을 못 느끼는 것 치곤 커피는 맛있어 하는데?’
“키야오옹(그야 당연하지! 네 스킬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커피 만드는 스킬?’
“캬갸갸옭(그 스킬로 만든 커피는 동화의 영향을 줄인다. 즉)…….
‘즉?’
“왜옭(그 커피는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때 뺨이 따가운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기유현이 갑자기 울어 대는 미음이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자칫하다간 고양이랑 이야기하는 이상한 사람이 될 뻔했다.
“크흠, 흠. 죄송해요.”
“아닙니다. 그냥, 리을 씨의 커피를 마실 때마다 어딘가 따뜻한 느낌이 든다는 말을 하려던 것뿐인걸요.”
“…….”
상상해 보자.
원인이 뭐건 아무튼 미각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막 배달 받은 치킨, 피자, 유명한 호텔 뷔페 등등 세상의 맛있다는 음식을 아무리 먹어도 물컹한 음식물 덩어리로만 느껴졌겠지. 영양 섭취를 위해 식사를 할 뿐 식사의 기쁨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황.
나라면 인성이 파탄이 날 만한 비극적인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커피를 마시면 맛이 난단 거지. 무채색 세계의 한 곳에만 물감을 칠한 것처럼, 이 커피에서만 쌉싸름함, 고소함, 달콤함 따위의 감각이 느껴진다.
너무 안됐다…….
매일 내가 만든 커피를 마시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하다. 요즘 자주 얼굴을 비추는 것도 그래서였겠지. 그래, 역시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커피가 맛있어서였군.
안타까움에 나는 기유현에게 언제든지 커피를 마시러 와도 좋다고 말해 주었다.
그때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알림을 확인한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리을 씨, 왜 그러세요?”
“기다리던 연락이 와서요.”
마침 잘됐다. 어차피 내일은 원두가 없어서 영업이 불가능했으니까. 이참에 이 볼일을 처리하고 오면 되겠다.
나는 문 앞에 ‘재료 소진으로 오늘은 쉽니다.’라고 써 붙였다.
* * *
커다란 회의실은 텅 빈 상태였다.
불이 꺼져 어둑한 그곳, 눈에 띄지 않게 앉아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르고 안경을 쓴 얌전한 분위기의 여자였다.
이름은 주노을.
그녀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긴 한숨을 쉬었다.
“하아아…….”
띠링.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주노을은 황급히 카톡을 확인했다.
[<청라 길드> - 한이성 헌터]
주노을 헌터님. 연락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 헌터 협회 회의는 아쉽지만 불참하게 될 것 같습니다.
헌터님 뵙고 같이 식사 한번 해야 하는데 아쉽습니다 ㅠㅠ
다음에 제가 꼭 식사 한번 대접하겠습니다.
인사치레를 길게 썼지만 결국 회의를 빠진다는 말이다.
그나마 연락이라도 하는 한이성은 양반이다. <씨앤엘>의 그 재수 없는 대표는 아예 안읽씹이었으니까.
노을은 카톡 창을 닫은 뒤 중얼거렸다.
“이 사람들이 진짜 너무하다는…….”
<대한 헌터 협회>.
대한민국 내 각 사설 길드의 권익을 보호하고, 교류를 통해 헌터계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율적인 단체.
……라고 홈페이지에 적혀 있다.
그러나 이 헌터 협회의 존재를 아는 헌터는 많지 않다.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라는…….’
대부분의 헌터 관련 업무를 <던전관리청>에서 전담하기 때문에 <헌터 협회>의 역할은 대폭 축소되었다. 자기밖에 모르는 헌터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도 한몫했다. 회비 내라고 고지서 날리면 이게 뭐냐고 따지는 놈들이 대다수.
그러나 이름뿐인 협회라도 운영은 해야 했다.
운도 없지. 주노을은 제비뽑기에서 걸리는 바람에 이번 분기 협회장을 맡았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대한 헌터 협회> 정기 회의다. 그러나 역시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내참, 인성들 하고는.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는…….’
시간이나 때우다 가자.
주노을은 의자에 비딱하게 기대앉은 채 핸드폰으로 헌터 채널에 접속했다. 그리고 새로 올라온 글을 훑어보면서 슬라임 관련 글에 열심히 댓글을 달았다.
주노을, 29세. S급 소환술사. 빅3 길드의 한 축, <로열 길드>의 길드장을 맡고 있다.
헌터 채널 닉네임은 라임사랑단.
헌터 채널에 새로 올라온 글을 확인하는 일도 금방 끝나 버렸다. 당연하다. 주노을은 하루의 대부분을 헌터 채널을 하면서 보내는 커뮤 중독 헌챈 붙박이였기 때문이다.
‘그때 그 카페나 갈까 한다는…….’
주노을은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그날도 주노을은 길드에서 헌터 채널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글씨가 회색이었다.
재밌는 일이 없나 깔짝거리다 헌터 채널 고닉이 쓴 바이럴 글에 낚여서, 재미 삼아 가 봤다.
대던전 어비스의 던전 게이트 인근에 있는 독특한 카페.
커피도 맛있고 신기한 효과도 느껴졌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눈을 끈 것은 빨간색 슬라임이었다.
탁하거나 다른 색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레드. 미세한 색 차이로 등급이 나뉘는 슬라임계에서 드문 리레(Real Red). 딱 한번만이라도 만져 보고 싶었다.
기나긴 슬라임 오덕 인생에서 그런 리레는 처음이었으니까.
여전히 회의실은 텅 빈 상태.
“좋아, 나도 가겠다는…….”
그러나 주노을은 30분 뒤 절망했다.
-재료 소진으로 오늘은 쉽니다.-
“너무하다는…….”
눈을 씻고 다시 봤지만 문에 붙여진 종이의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며칠 사이에 급격히 인기가 생긴 카페는 이미 닫힌 상태였다.
“리레 슬라임 보고 싶다는…….”
낙담한 나머지 털썩 무릎을 꿇는 그때,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로열 길드>의 길드원에게서였다.
“무슨 일이냐는…….”
- 길드장님, 길드장실에 있는 물건 전부 당근에 올렸으니 그렇게 아세요.
“뭐! 그게 무슨 물건인 줄 아냐는…….”
- 무슨 물건이라니, 다 잡동사니잖아요. 슬라임 쿠션은 왜 똑같은 색깔로 여러 개 사신 거예요? 하나만 남기고 다 치워요.
“똑같은 색깔이 아니라, 잘 보면 (255, 0, 0)이랑 (192, 0, 0)으로 차이가 있다는…….
- 그거나 그거나 뭐가 달라요…….
“아, 안 된다는! 길드장실 내가 정리할 테니 한 번만 봐 달라는…….”
- 저번 주에도 똑같이 말하셨잖아요. 안 돼요.
“가족끼리 이럴 수가 있냐는…….”
- 전 길드장님 같은 가족 없거든요!
세상에 가족 길드로 널리 알려진 <로열 길드>.
그러나 길드원들은 성씨도 다를 뿐더러 비슷한 연령대의 젊은 헌터들이 주축이다.
때문에 그 ‘가족’이란 것이 혈연이 아니라 조직 폭력배나 마피아를 의미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터무니없는 헛소문이라는…….’
그 실체는 보다 단순하고…… 별것 아니었다.
7년 전 강원도 강릉시의 어느 펜션. 섭종 직전의 망겜 동호회 ‘너하나접는다고섭종함’의 정모가 열렸다. 주노을은 그 정모의 주최자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펜션 근처 계곡에서 균열이 터졌다. 균열에 휘말린 정모 참가자가 우르르 단체로 각성해서 균열을 막은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이 강릉의 영웅들을 취재하러 온 방송 인터뷰였다.
-저, 여러분들은 어떤 관계의 분들이신가요?
사는 곳도 나이도 학교와 직업도 제각각. 호기심 어린 기자의 눈빛이 그들을 향했다. 숨덕 기질이 있었던 주노을은 거기다 대고 ‘너하나접는다고섭종함이라는 게임 오덕 모임입니다.’라고 대답하기는 너무나도…… 쪽팔렸다.
그래, 온라인 가족도 가족이다.
사이버 혈연의 소중함은 가족에 비견될 만하다!
그렇게 급발진한 주노을은 당당하게 선언했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너하나접는다고섭종함’이라고 지으면 죽어도 가입 안 하겠다는 반발에 이름은 <로열 길드>로 바꾸었지만.
그대로 소중한 사이버 혈연들과 길드를 설립, 빅3 길드로 손꼽힐 만큼 열심히 활동했다.
그러나 7년의 세월은 잔인했다. 7년이면 사람이 탈덕을 할 만큼 충분히 긴 시간.
“길드장님, 전 이제 그 망겜 접었어요.”
“너무하다는…….”
“난 이제 낡고 지쳐서 덕질할 힘이 없으셈.”
“흑흑, 플래티넘 로열 고저스 찻잔 세트를 모아서 서버 1위 유저 ‘ㄹ’에게서 1위를 탈환하기로 한 그날의 맹세는 어디 갔냐는…….”
“길드장님, 그런 망겜 접고 갓겜하세요. 지금 사전 등록하면 아이템 준대요.”
“……변절자!”
아늑한 오덕 길드를 만들었는데, 정신을 차리니 나만 오덕이고 전부 탈덕했다.
더군다나 그때 들려온 섭종 소식.
본진을 잃은 슬픔에 멘탈 부랑자가 되어 떠돌기를 여러 달. 주노을은 다시 덕통 사고를 당하게 된다.
바로 슬라임 덕질에!
드디어 메이저 덕질. 이제 그녀의 덕생은 꽃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소중한 굿즈를 당근에 처분하겠다니 세파가 가혹했다.
물론 길드 건물을 온통 덕질 굿즈로 채워 놓은 건 내가 너무했지만.
실사용, 보관용, 홍보용으로 같은 굿즈를 세 개씩 산 다음, 길드 공용 창고에 넣어 뒀지만.
길드 입구에 무지개색 거대 슬라임 동상을 세우자고 했다가 까였지만…….
찔리는 일이 많았던 주노을은 애처롭게 중얼거렸다.
“한번 가족은 영원한 가족. 온라인 가족도 가족이라는…….”
- 아, 벌써 당근 연락 왔네요. 끊을게요.
“안 된다는……!”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고, 주노을은 다시 절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