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 * *
“뀨우웃?”
라임이가 몸을 튕기며 울었다.
이 우리 집 빨강 슬라임의 일상을 한번 되짚어 보자.
미음이와 자주 같이 놀긴 하지만, 그보다 혼자서 놀 때가 많다.
미음이가 볼록한 배를 두드리며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조그만 몸을 통통 튕겨 대며 혼자서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가게 안부터 위그드라실의 주위며 이공간의 구석까지.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이따금 꼭 내게 말을 거는 것처럼 뀨우 소리를 내곤 한다.
“뀨우, 뀨우우!”
궁금하다.
저 뀨우웃 소리는 대체 무슨 뜻일까.
그래서 슬라임과 말이 통하는 방법을 찾다가, 우연히 어떤 영상을 보게 되었다.
한동안 유튜브 메인 화면 붙박이였던 유명한 영상이다.
화면 속에는 초록색 슬라임이 매끈하고 말랑한 몸체를 튕기고 있다.
-뀨웃, 피! 뀨우웃!
발랄한 울음소리가 들리고.
영상 촬영자는 흑백 액정이 달린 자그마한 기계를 그린 슬라임에게 들이대었다.
뀨우, 뀨웃, 피!
기계가 소리를 인식하면서 불이 깜빡깜빡 들어온다. 잠시 뒤, 액정에 문자열이 나타났다.
‘기분 좋아. 좋아해.’
-뀨우우우!
이번에도 기계는 놓치지 않고 슬라임의 울음소리를 인식했다.
‘나는 슬라임이야. 깨끗한 물을 좋아해.’
화제의 슬라임 언어 번역기 소개 영상이다.
슬라임어도 통역할 수 있는 고성능 통역 아티팩트는 너무 비싸서 이 가게를 통째로 팔아도 사지 못할 가격이었다. 하지만 이 언어 번역기라면 살 수 있을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검색했지만 나는 곧 한계에 부딪쳤다.
[GIFT] 인공지능 휴대용 슬라임 언어 번역기 슬라임TALK★
일시 품절 상태입니다.
입고 시 알림을 보내드립니다. [알림 신청하기]
어디에도 이 슬라임 언어 번역기를 팔지 않았던 것이다.
알고 봤더니, 소량만 생산해서 한정 판매했는데 일반 판매를 시작하기 전에 회사가 망해 버렸다고 한다. 최근 슬라임이 인기를 끌면서 찾는 사람은 많은데 매물은 없는 상황이다.
별수 없이 최근 헌터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는 당근 마켓에 키워드 알림을 걸어 두고 기다렸다.
몇백 개밖에 생산되지 않아서 구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시간이 흘러 지금, 드디어 당근 알림이 울렸다. 당장 만나서 거래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럼, 나 슬라임 언어 번역기 사러 갔다 올게.”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 왜오옹.”
뜻밖에 미음이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에도 라임이의 말을 모르는 게 낫다고 했었지. 대체 라임이의 저 뀨웃 소리에 무슨 비밀이 있어서?
“왜?”
“때로는 모르는 게 좋은 일도 있는 법이다, 왜옹!”
“그럼 미음이 네가 통역해 주면 되잖아.”
미음이라고 라임이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대신 슬라임 울음소리의 파장을 읽어 들여 어렴풋한 의미는 파악 가능하다나 어쩐다나. 그러면 뜻을 알려 주면 될 텐데, 미음이는 꿋꿋이 통역을 해 주지 않았다.
“가지 마라. 너를 위한 거다, 키야오옭!”
“벌써 당근 약속 잡았어. 갔다 올게!”
그리고 약속 장소.
상대는 당근 약속이 여러 개인 모양인지,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슬라임 언어 번역기 슬라임TALK★ 맞으세요?”
“네, 맞아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가 가방을 뒤적거렸다. 가방 안에는 대형 슬라임 쿠션, 슬라임 피규어, 슬라임 안경 닦기, 슬라임 가습기 등 온통 슬라임 굿즈밖에 없었다.
슬라임을 참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여기 있어요. 덤으로 슬라임 쿠션이랑 슬라임 캔뱃지, 슬라임 랜덤 피규어 박스도 드릴게요.”
“네?”
내가 산 건 손바닥만 한 기계인데, 덤이 더 부피가 컸다.
“아니에요. 이렇게 많이 안 주셔도 되는데…….”
“괜찮아요. 똑같은 거 아직 스무 개는 더 있으니까 마음 편히 가져가세요.”
깊은 한숨과 함께 어깨가 축 늘어진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주변 사람이 똑같은 굿즈를 수십 개씩 사 대는 통에 자리가 없다고 했다. 창고는 진작 가득 차서 방까지 물건이 침투. 딱 누울 자리만 남겨 둬서 대형 슬라임 피규어와 눈을 마주친 채 잠이 든다고.
그런 상황이면 어쩔 수 없지…….
아무튼 덤으로 받은 대형 슬라임 쿠션과 언어 번역기를 들고 가게로 돌아왔다.
“이게 뭐냐, 왜오옭!”
“뀨우!”
푹신한 감촉을 마음에 들어 하는 미음이에게 쿠션을 던져 주고, 당장 언어 번역기를 켰다.
“라임아, 한번 말해 봐.”
“뀨우, 뀨우우우!”
슬라임 언어 번역기에 불이 깜빡거리더니 곧 액정이 켜졌다.
두근두근……. 대체 뭐라고 말한 걸까?
-□□□□의 화신체가 곧 깨어날 것이다. 암흑 에테르가 임계점에 달했다.
어? 귀여운 외모에 깜찍한 울음소리로는 짐작할 수 없는 딱딱한 텍스트였다. 앞으로 큰일이 일어난다는 경고 같기도 했다.
“라임아, 방금 무슨 뜻이야? 다시 한 번만 말해 줘. 응?”
“뀻…… 뀨웃, 뀨우웃, 뀨우!”
다시 기계에 불이 들어온다. 곧장 액정을 확인했지만…….
-3.14159265358979…….
어? 오류인가? 왜 원주율이 뜨지?
나는 기계를 위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그러자 액정의 글자가 다시 사라졌다. 음, 역시 잠깐 오류가 났나 보다. 그래, 라임이 울음소리인데 왜 원주율이 뜨겠어.
“뀨우우웃! 뀨우우, 뀨!”
-Ac, Th, Pa, U, Np, Pu, Am, Cm, Bk, Cf, Es…….
엄마, 얘 이상한 소리해…….
라임이 너 이과 슬라임이었구나.
“내가 겪은 고통을 이제 알겠느냐, 인간! 왜우우웅!”
몇 번 더 시도해 봤지만 맥락 없는 이과 지식들이 나열될 뿐, 궁금한 내용은 알려 주지 않았다.
나는 포기하고 슬라임 언어 번역기를 고이 서랍에 넣어 두기로 했다. 역시 이 슬라임과의 소통은 내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 * *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 던전 게이트 인근 폐가.
지존은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속으로 한탄을 흘렸지만, 이미 늦었다.
지존의 주위에는 담배를 피우면서 대기 중인 무리가 있었다.
커다란 목소리에 껄렁한 태도, 몸에 걸친 장비까지 척 보기에도 좋지 않은 일에 종사하는 놈들이었다. 시시한 자랑을 늘어놓으며 낄낄거리지만, 자세히 보면 얼굴에서 감출 수 없는 긴장이 느껴진다. 애써 태연한 척 허세를 부리는 것뿐.
그 중 한 명이 지존에게 다가와 담뱃갑을 내밀었다.
“형씨도 한 대 피우쇼.”
“담배 끊었슴다.”
“헐, 독종이시네.”
훅. 얼굴을 향해 담배 연기를 뱉어 냈다. 지존이 얼굴을 찌푸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쇼. 이런 일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남자는 지존을 격려한다기보다는 자신을 추스르려 하는 것 같았다. 말이 이어졌다.
“우리 뒤에 누가 있는지 다 들었지. 바로 <씨앤엘>이야, <씨앤엘>! <씨앤엘>의 그 높으신 분이 우리를 직접 챙긴단 말씀이야. 형씨는 벌써 우리 <신크라운> 사람이니 안심하쇼.”
다 탄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리며 남자는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나무로 된 커다란 상자가 눈에 들어온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이 기묘한 긴장의 원인은 바로 저 커다란 상자다.
특수한 환경에서만 발견된다는 희귀 몬스터 긴꼬리불사조가 봉인된 상자.
지존 주위의 무리는 신크라운 파 길드원들이다. 그들의 목적은 오늘 이 희귀몬스터를 비싼 값을 받고 거래 상대에게 넘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자는 기이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냥 상자일 뿐인데도, 형언할 수 없는 불길하고 불쾌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 안에 든 것이 진짜 긴꼬리불사조가 맞을까? 훨씬 더 무서운 것이 들어 있을 것만 같다.
상자의 봉인은 완벽하다. 몬스터는 깊은 잠에 빠진 상태일 텐데.
그런데도 두려웠다.
젠장, 역시 이런 일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한다.
지존은 속으로 한탄을 쏟아 내었다.
그때 이세인의 제안을 거절했어야 한다. 아니, 살인 누명을 쓰고 체포되더라도 그때 신고를 했어야 한다.
“이 일만 처리하면 뒷일은 제가 책임지겠어요.”
그 비서의 말을 믿고 지존은 오늘 이 자리에 왔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일 테다. 이번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떻게든 자신을 엮어 넣을 거다.
보이지 않는 올가미가 목을 옥죄는 느낌이었다.
“큿…….”
이미 늦었다.
“늦었습니다.”
어둠에 잠긴 던전 게이트의 맞은편, 거래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는 외국인이었다. 밤인데도 선글라스를 써 눈을 가렸고, 통역 한 명, 경호원으로 보이는 헌터 한 명을 대동했다.
국적도 신상도 불명하지만 거액을 제시했다. 상대의 정체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신크라운 파 일당은 그저 이 불길한 상자를 빨리 넘기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거래 상대가 뭐라 중얼거렸고, 옆에 선 통역이 전달했다.
“물건을 확인하고 싶다고 합니다. 상자를 열어 주세요.”
“…….”
“…….”
방황하는 시선이 엇갈렸다. 아무도 저 상자를 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왜 그러시죠? 물건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어떻게 구한 물건인데 그런 말을 하쇼!”
“신뢰만으로 거래하지 않는 것 알지 않습니까. 물건 확인하기 전까지는 거래할 수 없습니다.”
“칫, 알겠슴다.”
여전히 내키지 않는 반응이었다. 신크라운 파의 리더는 한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야, 네가 가서 열어.”
“제…… 제가요?”
“그럼 네가 열지 형님이 직접 해야겠냐!”
결국 제일 짬이 달리는 한 명이 상자로 가까이 다가갔다. 잠금장치에 열쇠를 끼워 넣고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쿵!
“으, 으아악!”
“왜 호들갑이야?”
그렇게 질타하는 목소리마저도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형님,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남다!”
쿵, 쿵, 쿵!
둔탁한 진동은 점차 거세졌다.
“악명 높은 신크라운 파라더니 여러분들 모두 겁이 많으시군요.”
픽, 비웃음을 흘린 통역 담당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잠금장치가 풀린 상자를 그대로 열어젖히려 했다.
“야, 그만두는 게…….”
“왜 그러시죠? 봉인 마법이 걸려 있을 텐…….”
퍽!
통역은 말을 채 다 끝마치지도 못했다.
상자가 세로로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검은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