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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68/192)

68화

긴꼬리불사조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인간이라고도 생각할 수 없는, 검고 커다란 손이었다.

손은 그대로 통역의 몸을 움켜쥐더니 힘을 주었다.

콰직! 소름끼치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통역이 절명했다.

“윽…….”

억눌린 비명이 흘러나왔다.

긴꼬리불사조는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라, 빛 속성 에테르를 다루는 성수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괴상하게 자라난 손톱, 커다란 손, 짙게 새어 나오는 암흑 에테르까지.

그 순간 모두가 알아차렸다. 저렇게 불길한 것이 성수 긴꼬리불사조일 리가 없다.

그러면…… 저 괴물은 대체 뭐지?

“으아아악!”

휙!

상자를 완전히 부수고 괴물이 뛰어나왔다.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함으로 괴물은 도망치는 인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긴 손톱과 이빨이 인간을 무참히 짓이긴다.

“으, 으윽…….”

도망치려던 지존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미 괴물의 손톱에 긁힌 상처에서 피가 철철 쏟아졌다. 조금 전 지존에게 담배를 권했던 남자를 찢어발긴 괴물이 지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기까진가.

머리가 멍하다. 지존은 몸에서 피가 쏟아지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어차피 이렇게 죽을 거였나.

엑스트라에게 어울리는 죽음이다. 여기서 이렇게 죽을 줄 알았다면, 어머니와 동생에게 연락이라도 할 걸 그랬다.

질끈 눈을 감고 죽음을 각오하는 그때.

누군가가 검을 들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경호원으로 변장 중이던 최세드릭이었다. 최세드릭이 긴 검을 가볍게 휘둘러 괴물의 공격을 막아 냈다.

캉!

힘 싸움에서 진 괴물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괜찮아?”

“어, 네, 네…….”

“이게 대체 무슨 일……. 조금만 기다려.”

최세드릭이 왜 여기에 있지.

검을 들고 괴물과 대치한 최세드릭의 모습은 절망적일 정도로 멋있었다.

나쁜 선택만 반복하다 여기까지 흘러 왔고, 불법적인 일을 돕다 개죽음을 앞둔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강하다.

지존은 결국 발도 붙이지 못한 <씨앤엘 코퍼레이션>의 간판 헌터, 현 랭킹 2위, S급.

이런 놈은 걱정이랄 것도 없을 테고, 나 같은 놈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구해 줘서 고마운 마음보다는 꾹 눌러 삼킨 열등감이 고개를 들었다.

“……!”

그때 다시 최세드릭을 공격하려던 괴물이 이기기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도망쳤다.

“거기 서!”

최세드릭은 괴물의 뒤를 쫓으려 하다가 지존의 상처가 심한 것을 보고 멈추었다.

그가 이세인 대표에게 전달받은 명령은 경호원으로 변장했다가 오늘 거래되는 상자를 가로채라는 것이었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추후 이 일을 <백은 길드>의 소행이라고 조작할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럼 돈을 낸 거래자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 뭐라고 해요?”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쓸 것 없단다.”

위화감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뭐지, 꼭 저 괴물에게 죽을 걸 알았던 것처럼…….

이세인의 말대로라면 부상자 따윈 내버려 두고 괴물을 쫓아가야겠지만…….

척 보기에도 상처가 심하다. 이대로라면 금방 죽음에 이를 테다.

망설임은 짧았다. 최세드릭은 추적을 포기하고 지존에게 다가갔다.

“잠깐만 기다려. 포션이라도 써 줄 테니까.”

인벤토리를 뒤져 닥치는 대로 고급 포션을 꺼냈다.

“그런 비싼 걸…….”

“지금 가격이 중요해?”

상처에 포션을 들이붓는데, 문득 부상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저 고집스러운 눈매에 부루퉁한 표정, 어째 눈에 익은데.

“어,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

“……사람 잘못 봤어.”

지존은 비스듬히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최세드릭의 시선은 집요했다.

“아니, 분명 봤는데! 이 사람, 누가 범죄자 아니랄까 봐 거짓말을 하네. 분명 전에, 그러니까…… 아.”

최세드릭은 한숨을 삼켰다. 지존을 어디서 봤는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씨앤엘> 길드 본부, 길드원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서였다. 같은 길드 소속이다. 그런데 <씨앤엘> 소속 헌터가 왜 여기 있단 말인가.

분명 같은 길드원을 위험에 처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나.

‘누나, 대체…… 나 몰래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최세드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불완전 소환으로 인해 마력이 부족합니다.]

[마력을 충전해 주세요. 마력 고갈 시, 육체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상자 속에서 튀어나온 검은 것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거리를 달렸다.

그러나 걸음은 점점 느려지기만 했다.

불을 삼킨 듯 속이 뜨겁고 파괴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모든 마력을 쏟아 내어 주위를 집어삼키고 싶었다.

몸을 감싼 검은 기운이 점점 약해졌다. 마력이 바닥난 몸은 이제 걸음을 옮기기도 버거웠다.

[※ 주의: 마력이 극도로 부족한 상황입니다.]

원래 그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약속된 날을 기다리는 잠은 편안하고 달콤했다.

그런데 인간들이 억지로 그를 깨웠다. 주기적으로 주입된 암흑 에테르가 그의 잠을 방해하고 꿈을 흐트러트렸다.

잠을 깨운 증오스러운 인간들을 다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큿…….”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 긴급: 육체 구성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1, 5, 10, 20……. 마력 부족으로 인해 육체 구성 작업을 완료할 수 없습니다. 작업을 중지합니다.]

[마력 절약 모드 실시]

[임시 육체를 구성합니다.]

몸을 감싼 검은 안개가 걷히고 난 뒤 드러난 것은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다.

의식을 잃은 소년이 바닥에 쓰러졌다.

<카페 리을>의 앞이었다.

그리고 그 시각, 커피 원두를 볶고 있던 리을은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얘, 괜찮니?”

소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얼빠진 얼굴의 여자가 앞에 있었다. 여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년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너, 이 앞에서 쓰러져 있었어. 어디 아픈 거야?”

소년은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몸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여자를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시선이 낮고, 팔다리가 작고 가늘었다.

마력 고갈 때문에 이런 작고 빈약한 육체를 생성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칫.”

소년은 눈만 움직여 주위를 살폈다. 앞에는 위기감 없는 표정의 여자가 있었고, 카페처럼 보이는 공간이다.

“으음, 열은 없는데…….”

여자가 손을 뻗어 소년의 이마를 짚었다.

“……!”

불쾌하다.

탁.

소년은 곧장 그 손을 쳐 내고 마력으로 여자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힘이 고갈된 탓에 여의치 않았다.

[마력 절약 모드를 사용 중입니다.]

[대상의 섬멸이 불가능합니다.]

[당분간 주위에 적응하기를 추천합니다.]

[인간계 지식(기초)를 다운로드 합니다. 1, 5, 10, 20, 50…… 완료.]

지금은 평범한 아이인 척하는 게 낫겠군. 그렇게 판단한 소년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픈 건 아니고, 그냥 잠깐 어지러워서…….”

동정심을 유발하는 가냘픈 목소리와 처연한 눈빛이었다. 여자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경찰에 신고해야겠어.”

“……경찰은 안 돼!”

귀찮게 더 많은 인간과 얽히는 일은 사양이었다.

“왜? 경찰 아저씨가 집까지 데려다주실 거야.”

“집에는…… 가고 싶지 않아.”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앉아서 잠깐만 기다려.”

잠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나 싶더니, 눈앞에 하얀 도자기 잔이 들이밀어졌다.

“……?”

다운로드한 인간계 지식을 통해 이것이 ‘커피’, 그중에서도 ‘카페모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잔 안에 든 액체는 까맣다. 이런 걸 왜 마시는 거지. 슬그머니 잔을 밀어냈지만, 여자는 꿋꿋이 소년에게 잔을 쥐여 주었다.

“몸이 따뜻해질 거야. 얼른 마셔 봐.”

“……알았어.”

여기서는 말에 따르는 게 좋겠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소년은 잔을 기울였다.

달콤한 맛이 제일 먼저 입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어 단맛을 받쳐 주는 에스프레소의 묵직한 맛, 우유의 고소함까지.

엄청나게 맛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

마력이 회복되었다.

약간이지만 몸속에서 마력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소년은 다시 카페모카를 한 모금 마셨다. 원래 그가 지닌 강력한 마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분명 힘이 차올랐다.

소년은 허겁지겁 남은 카페모카를 비웠다.

“우후후…….”

소년이 잔을 전부 비우자, 여자는 슬쩍 소년의 머리 위쪽을 바라보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녀에게 특별한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얼빠진 여자가 준 커피의 힘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마력만 회복하면 이런 여자 따위 금방 죽여 버릴 수 있다. 원래 몸만 되찾으면 내 잠을 깨운 인간 놈들을 다 쓸어버릴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이 커피를 더 마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

소년이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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