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그는 18살에 각성했다.
A급 힐러라는 희귀 클래스, 어린 나이, <백은> 길드장의 아들이라는 점, 화려한 외모로 인해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
“우와, 오빠 대단하다!”
두 살 터울로 자주 투닥거리던 사촌 동생이 감탄하는 모습은 아직 어린 권지운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각성 이후 훈련이다 취재다 시간은 바쁘게 흘러갔다. 특히 전용 훈련 시설에 들어간 다음에는 바깥과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다소 조급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신을 훈련시켰고, 그 진도를 따라잡기도 버거웠으니까.
그의 동생은 그때 16살이었다.
그리고 권지운이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되는 그 사건이 일어난다.
수상쩍은 놈들이 아버지 권석민과 권지운이 없는 틈을 타 당시 살던 집을 습격했다.
쉽게 구할 수 없는 불법 무기로 무장했고 철저하게 신분을 감췄다. 추후의 조사에서도 배후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스토커나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었다. 계획적으로 권리을을 납치하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목적은 물론, 권지운 자신이다.
그날, 권리을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가족들을 기다리기 심심했는지 할머니 댁에 간 상태였다.
만약 리을이 할머니 댁에 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면? 혹은 귀가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발밑이 푹 꺼지는 것 같았다.
전날, 깊은 생각 없이 사촌 동생과 친하다고 떠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직접적인 관련은 없을지도 모르겠으나 당시 권지운은 자신의 말 때문에 권리을이 위험에 처할 뻔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아버지가 실종되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길드 운영을 도맡으면서 권지운은 권리을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경호를 위해 부하를 붙이기는 했으나, 여느 데면데면한 친척이 그렇듯 직접 연락을 하는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네가 리을이를 잘 보살펴 주렴.”
……하지만 거리를 둬야 한다는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권지운은 결국 핸드폰을 손에서 내려놓고, 대신 컵에 담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쓰네.”
오래 방치해 둔 탓에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가 입에 겉돌았다.
그때 동생이 준 커피는 맛있었는데.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온 부하가 서류를 내밀었다.
“부길드장님, 다음 주 길드장 회의 관련 서류입니다.”
“그래. ……<씨앤엘>의 그 길드장도 오겠군.”
재미없는 일만 계속된다. 권지운은 한숨을 삼켰다.
* * *
뚜르르르, 뚜르르르, 뚜르르…….
“전화를 안 받네…….”
신호가 끝없이 이어졌다. 조금 더 기다려 보았지만 연결이 되지 않아,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야?”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아스의 말에 고개를 젓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방금 내가 전화를 건 상대는 권지운이다. 지난번 농원에서 던전이 터졌을 때,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대로랄까. 큰마음 먹고 건 전화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으음, 바쁜가 보다.
‘매번 이랬긴 하지…….’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 실망할 일도 없다고 할까.
아무튼, 아스가 <카페 리을>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도 며칠이 흘렀다.
여전히 손님은 많았지만 상황은 많이 안정되었다. 적어도 매일 밤 잠들기 전, 삶과 노동의 의미를 고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는 말이다.
처음에 만났을 때 가게 앞에 쓰러져 있는 상태였어서 몸이 연약하다고 생각했지만, 아스는 정말 일을 잘했다.
가끔…….
“세계에 황혼을 불러오는 마왕, 나 아스모데우스가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한단 말인가.”
“쿠쿡, 힘만 되찾으면 인간 녀석 따위 전부 쓸어버릴 테다.”
“지옥의 초코 소스? 어쩐지 맛이 좋더라니, 우아하고 멋진 작명이군.”
이렇게 중2병스러운 말을 해서 당혹하게 하지만.
뭐, 그럴 나이니까 세계관을 존중해 주도록 하자.
나는 무릎을 굽혀 아스와 눈을 맞추고 생긋 웃었다. 자신의 왼손에 잠든 메테오의 힘으로 인간들을 쓸어버리겠다는 아스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렇구나. 아스는 대단하네.”
“……칫!”
좋게 말했는데도 아스는 화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우우웅(이번엔 네가 잘못했다).”
내가 왜?!
“뀨웃, 뀨우웃!”
나는 서랍에 처박아 두었던 슬라임 언어 번역기로 라임이의 말을 해석해 보았다.
‘ㅁㅈㅁㅈ’
아니, 내가 왜?!
너희 어제까지 서로 공격을 주고받으면서 투닥거리더니 왜 이럴 때는 편들어 주는 건데? 갑자기 외로운 느낌…….
크흠, 본론으로 돌아가자.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여기, 다음 주문.”
“정리 끝났어.”
멈추지 않고 손이 움직인다. 비록 웃음기는 없고 말은 짧지만 정확한 손놀림, 빠른 행동으로 일을 해치웠다.
윽, 눈부셔서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어쩌면 아스는 카페 아르바이트계의 빛과 소금, 1인 자영업자의 구원자가 아닐까.
“아스, 너 정말 천사 같아!”
“……! 그게 무슨……! 어떻게 나 아스데모우스에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그런 설정이구나…….
“아, 그래, 그래.”
“건성으로 대답하지 마.”
“죄송합니다, 아스 님.”
“……흠!”
부루퉁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입가가 슬쩍 올라가는 걸 다 봤다.
붙임성 없고 귀여운 녀석 같으니.
* * *
준비한 오늘 치 재료를 거의 다 소진하고 어느덧 영업을 마무리할 시각이었다.
“아스, 카페모카 만들어 줄게. 좀 쉬자.”
끄덕.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인 아스가 재빨리 테이블 앞에 앉았다. 턱을 괴고 흠, 흠, 흐음, 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나를 보고 얼굴을 붉힌다.
“뭐, 뭐, 뭘 듣고 있는 거야!”
“으응? 아무것도?”
“그럼 뭐…… 됐어.”
“흠, 흠, 흐음 다음은 흐흐흠이지?”
“……! 역시 들었잖아! 저리 가!”
“그럼 카페모카는 필요 없어?”
“뭐…… 벌써 재료를 꺼냈는데 버릴 수는 없지.”
“아하하, 그래, 그래.”
아스가 우아하고 멋진 이름이라고 한 지옥의 초코 소스를 듬뿍 넣어 카페모카를 한 잔 타서 건넸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빛의 막대가 차오른다.
정말 카페모카를 좋아하는구나.
매번 애써 맛없는 표정으로 마시려 하지만 다 티가 났다.
아스가 잔을 거의 다 비울 때쯤 카페 문이 열렸다. 기다리던 손님이 온 것이다.
“아, 어서 와.”
“언니,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누…….”
“누나라고 부르지 마, 이 멍청아!”
“왜 너만 불러, 멍청아!”
“난 언니한테 허락 받았거든!”
주신우, 주신희 쌍둥이와 기유현이었다.
듣기로 쌍둥이는 최근 어느 난이도가 높은 던전을 다녀왔다고 한다. 던전을 다녀오면 할 일이 뭐겠는가.
“왜옹(뭔데)?”
‘던전 디톡스지.’
“캬갸갸옭(아니, 그건 아니지. 던전이 독도 아닌데)!”
“뀨!”
독이야 독. 몸에 안 좋다고.
얼마 전에 또 본의 아니게 던전에 휘말렸다가 던전 트라우마와 던전 알레르기, 거기다 던전 공포증까지 재발한 내가 하는 말이니까 확실하다.
“왜우웅…….”
“뀨우…….”
뒤통수에서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는군.
그렇게 던전 디톡스를 위해 평소보다 조금 일찍 카페 영업을 정리하고 쌍둥이를 초대했다.
기유현은…… 뭐 그냥 보호자 역할로 같이 왔나 보다. 안 불러도 워낙 자주 나타나는 사람이기는 하니까.
“……!”
“……!”
성큼 안으로 들어와 앉으려던 쌍둥이는 아스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신중한 표정으로 아스를 살피더니 거리를 벌렸다.
아스 역시 특유의 시니컬한 눈빛으로 쌍둥이를 쳐다보았다.
비슷한 나이라 그런가? 낯을 가리나 보다.
“이쪽은 저번 주부터 여기서 아르바이트하게 된 아스라고 해. 아스, 얘네는 주신우, 주신희 헌터. 서로 친하게…….”
“…….”
“…….”
아니, 이건 낯을 가리는 게 아니라 꼭 야생 물이 상대를 경계하고 서로를 가늠하는 모습 같았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시작되고 ↗→+[공격]이 날아갈 듯한 순간.
주신희가 달려오더니 와락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언니는 나랑 제일 친하거든!”
“맞아, 맞아.”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이는 주신우.
“나랑 애니도 같이 봤어. 언니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다?”
“……칫.”
부루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아스가 자그맣게 덧붙였다. 은근하게, 하지만 완전히 감춰지지 않은 뻐기는 표정도 함께였다.
“나는 같이 사는데.”
“……!”
“진짜예요?!”
사실이다. 아스는 아무리 봐도 달리 잘 데가 없어 보였으니까. 아르바이트로 고용하면서 1층 안쪽의 방을 하나 내줬다.
맞는다고 하니 다시 아스와 쌍둥이가 나를 둘러싸고 신경전을 벌였다. 바닥에 배를 깔고 드러누운 미음이가 관전평을 보탠다.
“왜우우웅(너 어린애들에게 인기가 많구나)!”
“하, 하하…….”
나를 중심으로 애들이 빙빙 도는 사이에 있으니 꼭 착각계 하하버스 세계에 들어온 것 같다.
‘우리 가게에 있는 애들이 다 나를 좋아해’, 같은……?
“아르바이트를 구하셨군요.”
슬쩍 기유현이 말을 더했다.
“저도 이곳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싶었습니다만. 제게는 기회가 없어서 아쉬운걸요.”
아니, 당신은 왜 끼어드는 거야. 그리고 길드 소속 헌터를 어떻게 아르바이트로 쓰냐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어른이 못나게 어린애한테 질투하는 거 아니에요.”
“……네.”
한참 뒤에야 겨우 쌍둥이와 아스를 떼어 놓고, 테이블 앞에 손님들을 앉힐 수 있었다.
나는 테이블에 커피 대신 잔뜩 만들어 두었던 마법 설탕과 냄비, 베이킹 소다 등을 내려놓았다. 가스버너와 알코올램프도 함께다.
주신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걸로 뭘 만드는 거예요?”
“그건 곧 알게 될 거야.”
모처럼 쌍둥이가 카페에 놀러 왔으니, 기존 메뉴보다는 새로운 메뉴에 도전해 보면 좋을 것 같았다. 던전 디톡스를 위해서는 특별한 경험이 필요한 법이니까.
갑자기 카페에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레시피가 꽤 많이 생겼다. 매일 영업을 마치면 지쳐서 곧장 뻗는 바람에 아직 다 만들어 보지는 못했지만.
왜, 게임에서도 갑자기 진행이 빠른 구간이 있지 않은가. 단번에 레벨이 오르거나 아이템이 왕창 들어오는 구간. 딱 그 구간에 들어온 느낌이라고 할까.
‘내 손안의 카페.’
나는 레시피 리스트를 눈으로 훑었다. 여러 새 레시피 중 마침 다 같이 만들기 좋은 것이 있었다.
바로 달고나 커피다.
회귀 전의 삶에서 같은 이름의 레시피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인스턴트커피에 설탕과 물을 넣고 엄청나게 오래 젓는 레시피였다.
‘정말 손이 아팠지…….’
오늘 만들 음료는 그것과는 달리, 커피에 진짜 달고나를 부숴서 넣는 레시피다. 이 커피에 들어가는 달고나를 다 같이 하나씩 만들 생각이었다. 달고나 만들기는 재밌으니까.
나는 쌍둥이의 앞에 하나씩 국자와 알코올램프를 놓아 주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기유현은 쌍둥이를 도와주기로 했다.
예전에 이곳이 할머니의 가게일 적, 달고나를 만들겠다고 하다가 국자를 왕창 태워 먹어서 혼났었지. 내 등짝을 마구 후려갈긴 뒤,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알려 주셨다. 그때 생각이 나네.
“아스도 하나 줄까?”
“……됐어.”
그런 데 관심 없다는 양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국자가 하나 남는데 만들 사람이 없는데……. 아스가 좀 도와줄래?”
“그러면……. 별수 없지.”
홱 국자를 받아 드는 아스.
정말, 붙임성 없고 귀여운 녀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