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192)

73화

아스는 리을이 한 말을 떠올렸다.

“맛있어? 하나 더 줄까?”

“와아, 아스는 정말 손이 빠르구나.”

“그래……. 힘들었겠네……. 아스만 괜찮으면 여기 얼마든지 있어도 돼.”

그녀는 눈앞의 일거리에 허둥지둥하는 와중에도 아스를 보면 자주 부드럽게 웃었다. 머리를 쓰다듬거나, 어린애 취급을 할 때도 많았다.

중2병이 어쩌고라고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는데, 대체 중2병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특히 그녀가 애틋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머리를 쓰다듬을 때면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를 약한 어린애 취급을 하다니!

마음속에 원치 않는 따뜻하고 뭉클한 것이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따뜻한 것은 가랑비처럼 내려 자신을 약하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마력을 써서 그녀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고 싶은가 하면, 한편으로 그대로 있고 싶기도 했다.

‘그 새까만 눈의 남자는 불쾌했지만…….’

오늘은 제법 감각이 뛰어난 인간 어린애들도 만났다. 강자를 제대로 알아볼 줄 아는 눈을 갖추었으니, 인간치고는 나름 괜찮았다.

처음으로 해 본 달고나 만들기도 나름 재미있었다. 달고나가 부풀어 오르는 순간, 자신보다 옆의 여자가 좋아하는 것이 우스웠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르바이트라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몰려드는 손님의 주문을 받고 전달한다.

마구 쌓인 일거리를 정리해 나갈 때마다 여자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

“아스는 천재가 분명해!”

“……이런 것쯤 별거 아니야.”

그렇게 말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잔과 소서를 깨끗이 씻어 제자리에 둔다. 모든 일을 마친 뒤 깔끔하게 정리된 카운터를 보면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아스는 본디 심연에 잠든 마신의 마력으로 빚은 화신체.

그에게 개별적인 개체의 기억과 경험은 아무 의미가 없다. 언젠가 소멸하여 본체로 돌아가면 모두 사라질 기억일 테니.

바쁘게 돌아가는 아르바이트도, 제법 말이 통하는 어린애들도,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웃는 여자도.

모두 이번 몸이 죽으면 없어질 기억인데, 어쩐지…… 싫은 기분이 들어서.

그래서다.

아스는 이부자리 위에 몸을 뉘었다. 베개 옆에는 커다랗고 새빨간 슬라임 모양 쿠션이 놓여 있었다. 혼자 자면 쓸쓸하다는 이유로 얼빠진 얼굴의 여자가 멋대로 놓고 간 것이다.

“자, 이게 있으면 안 쓸쓸하지?”

무심결에 다시 이마를 만졌다. 이미 온기는 식은 지 한참인데도, 사라진 온기의 자리를 더듬는 손길은 부드럽다. 여자의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칫.”

조금만 더 두고 보자.

아직 마력을 전부 다 회복하지 못했다. 마력을 더 회복하면 그때 죽이자.

그래, 마력 회복 때문이다.

그냥 그것뿐이다. 정말로.

* * *

“화신체를 놓쳤다고요?”

<씨앤엘 코퍼레이션>의 최상층. 대표실.

이세인의 말을 들은 비서 이온이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의 표정 변화다. 그러나 늘 차분하게 정제된 웃음을 띠던 그로서는 드문 표정이었다.

“그래, 상자 안은 텅 비어 있었어. 일대를 수색했지만 아직 발견되진 않았고.”

이세인은 부하의 보고서를 다시 훑어보며 말했다.

보고서에는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화신체의 소실. 그리고 시체가 하나 부족하다는 점.

경호원으로 변장하고 현장에 있었던 최세드릭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최세드릭이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세어 보아도 시체 한 구가 모자랐다.

‘처음부터 계획보다 인원이 한 명 모자랐나.’

이세인은 시체 숫자에 대해서는 우선 잊어버리기로 했다. 워낙 제멋대로인 놈들이니 인원 변경을 보고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생존자를 처리하는 일은 나중에라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화신체의 행방이다.

“반드시 찾아야 해요. 그게 어떤 존재인지 알고 계시잖아요. 우리의 계획을 위해서는 마신 아자토스의 화신체가 꼭 필요해요.”

“알아. 하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단서도 보이지 않아.”

오랫동안 공을 들인 계획이었다.

먼저, 성수(聖獸) 긴꼬리불사조를 사로잡아 화신체를 소환할 그릇으로 삼았다. 그리고 성수가 완전히 타락할 때까지 암흑 에테르를 조금씩 흘려 넣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암흑 에테르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우회 루트를 써야 했다. 산하의 신크라운 파를 이용해 암흑 에테르를 모으기를 여러 달.

완전히 흑화한 성수를 제물로 바쳐 화신체 소환에 성공했다. 이 일에 관련된 사람 전부를 처리해 입막음하고 입수 루트도 세탁.

화신체가 아직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이세인의 목적은 화신체를 강제로 붙잡아 그 무한한 마력을 추출해 이용하는 것뿐이었으니까.

‘그 마력만 있으면…… 최세드릭을 랭킹 1위로 만들 수 있어.’

그뿐만 아니라 지긋지긋한 경쟁자를 떨쳐 내고 <씨앤엘 코퍼레이션>을 명실상부한 톱의 자리에 올릴 수 있다.

모두 눈앞의 유능한 비서가 제시한 계획이었다.

이온은 정말 완벽한 비서였다. 그가 제안하는 비책들은 모두 참신했고 완벽한 성과를 얻었다. 이온의 조언 덕분에 <씨앤엘 코퍼레이션>은 힘없는 소규모 길드에서 지금의 위치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계획은 완벽했고 실행은 순조로웠다.

그런데 정작 화신체의 행방이 모호한 상황.

‘그걸 찾지 못하면…….’

이세인은 초조하게 책상을 두드렸다. 혹시 화신체가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그동안의 노력이 허사가 됨은 물론이고 길드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림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비서 이온은 이번에도 답을 내려 주었다. 모조 보석을 닮은 눈이 묘한 빛을 띠었다.

“물론 방법이 있답니다.”

“정말이야?”

이제껏 이온의 말을 들어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없었다. 이세인은 신뢰와 기대를 담고 이온을 바라보았다.

“이것이랍니다.”

이온은 품에서 작은 황금빛 상자를 꺼내 이세인에게 건넸다.

달칵.

열어 보니 각뿔을 두 개 이어 붙인 듯 기묘하게 생긴 작은 물체가 들어 있었다.

“이건 대체……?”

“위대한 아티팩트를 본떠 만든 물건이에요. 모조품이지만 효력은 확실하죠.”

불길하다.

정체는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물체에서는 무척 기묘한 힘이 느껴졌다. 물체의 가운데를 바라보자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균열을 발생시키는 아이템이에요.”

“……! 뭐라고?”

“그렇게 놀라실 필요 없어요, 대표님.”

방금 한 말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느긋한 미소였다.

화신체란 마력을 담아 빚은 마신의 분신. 도망쳤다면 새롭게 육신을 빚어 소환하면 될 따름이다.

그러나 동시에 소환 가능한 화신체는 하나뿐.

새 화신체를 소환하기 위해서는 과거 화신체를 처리, 즉 죽여야 한다.

이 아이템은 외우주의 괴물을 소환하는 균열 발생 장치다.

소환된 괴물들이 알아서 마력의 냄새를 쫓아 도망친 화신체를 처리해 줄 거다.

“후후, 간단하죠? 대표님이 손을 더럽히실 필요도 없어요. 새로운 화신체 소환은 제가 준비할게요. 대표님은 이것을 부수기만 하면 돼요.”

이온이 이세인의 손을 잡아 끌어 각뿔 위로 올렸다. 살짝만 꾹 누르면 이 작은 물체는 금방 부서질 것만 같았다.

“……!”

흠칫 놀란 이세인이 상자를 밀어 내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어. 피해가…… 피해가 클 거야.”

“그럼 이 상자를 대표님께 맡길 테니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생긋 웃으며 이온이 덧붙였다.

“곧 제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으실 테지만요. 잊지 마세요. 그걸 부수기만 하면 된다는 걸요. 화신체의 마력이 필요하시잖아요?”

“…….”

달칵.

이온이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이세인은 당장 상자를 보이지 않는 데로 치워 버리려다가 흠칫했다.

아니, 아니다.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

그래도……. 그래도 어쩌면…….

* * *

“……대표님?”

최세드릭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의 이세인이 복도를 걷고 있었다.

이세인은 바로 앞에 선 최세드릭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상하다. 최세드릭은 가까이 다가가 더 크게 그녀를 불렀다.

“대표님, 어디 가세요?”

“……! 아, 세드릭.”

막 꿈에서 깬 것처럼 놀라는 이세인. 아무것도 아니라며 미소를 지으려 하지만 입가는 굳은 채다.

“이건 뭐예요?”

최세드릭은 이세인의 재킷 주머니에서 비뚜름하게 튀어나온 상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

탁!

최세드릭의 손이 닿기도 전에 이세인이 손을 쳐 냈다. 텅 빈 복도에 손이 부딪치는 소리만 크게 울렸다.

“아, 전 그냥 못 보던 물건이라…….”

황급히 상자를 품 안에 갈무리하며 이세인이 사과했다.

“중요한 물건이라 내가 좀 과민했어. 미안해.”

“괜찮아요.”

그리고 침묵.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망설임 끝에 최세드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대표님, 여쭤볼 게 있는데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미안. 이제 곧 길드장 회의가 있어서……. 다음에 이야기하자.”

최세드릭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쁜 걸음으로 이세인이 복도 저편으로 떠났다.

혼자 남은 최세드릭은 복도의 끝에 놓인 소파에 걸터앉았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여다본다. 어떤 번호를 눌렀다가 결국 발신 버튼을 누르지 않고 도로 내려놓았다.

“하아…….”

가슴이 꽉 막혔다.

요즘 이세인 대표가 이상했다. 벌써 며칠 째인데, 무슨 일인지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 상자 안에서 도망친 검은 괴물에 대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시체 숫자가 맞느냐고 몇 번이나 다그쳐 물었을 뿐.

떨떠름한 느낌에 최세드릭은 생존자의 존재를 숨겼다. 그냥 감이었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 생존자, 지존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헌터는 이제 헌터 일에서 손을 뗀다고 했으니 상관도 없을 테고…….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건데요…….’

아니, 이번뿐만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이세인이 자신에게 감추는 일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길드 운영은 이세인의 몫이니 당연하다고 여겼다. 복잡한 이야기는 잘 알지도 못하고, 자신의 역할인 던전 공략에 충실하면 된다고도 생각했다.

최세드릭의 각성 시 최초 등급은 A급. 현 S급.

현재의 자리에 오르는 데 길드의 전폭적인 지원이 큰 도움을 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길드에 필요한 헌터가 되기 위해서 이세인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그런데 조금씩 점점 더 길드 내부에 자신이 모르는 일이 늘어났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때로는 자신이 앞에서 시선을 끄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생각마저 들곤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돌이켜 보면…… 그 비서가 나타난 다음부터다.

최세드릭은 이 위화감을 어딘가에 토해 내고 싶었다.

그러나 대체 누구에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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