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로나는 여전히 깊이 잠든 상태. 혹여나 사랑스러운 동생의 꿈결에라도 방해가 될까, 어두운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길드 소속 헌터들은 최세드릭을 불편하게 여겼다.
그나마 식물 오타쿠, 아니, 식물학자 이초록과는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길드 내의 내밀한 사정까지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여자…… 권리을은.
최세드릭은 농원에서 던전에 휘말렸을 때를 떠올렸다.
던전 안에서 그녀가 만든 커피의 맛, 부드러운 목소리까지도.
서글서글한 눈매는 꽤 귀여웠고, 감정이 풍부하고 연약해 보이던 첫인상과 달리 몬스터 앞에 나설 때는 거침이 없어서 멋있게도 느껴졌다.
그녀에게는 어쩐지 평소에 남에게 하지 않던 이야기까지도 하게 되었다.
그녀가 운영하는 카페에 방문하겠다는 약속도 했지만 아직 지키지 못한 상태.
막연히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미리 연락처는 알아 두었다. 그러나 최세드릭은 몇 번이나 핸드폰에 권리을의 번호를 눌렀지만 결국 전화를 걸지는 못했다.
“하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막연한 불안감, 의심, 고립감이 한데 뒤엉켜 엉망진창이었다.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 앞에서는 랭킹 2위에 걸맞은 최대한 당당하고 멋진 모습만 보여 주려고 했는데.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우울한 이야기만 하면 놀라지 않을까. 그의 원래 성격이 소심하고 어둡다는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백은 길드> 권지운의 친척이라고 했다.
<씨앤엘>은 지속적으로 <백은 길드>를 압박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 오빠한테 해를 끼치는 일을 할지도 모른다고 어떻게 말해…….’
도저히 그런 말은 못 하지…….
로미오와 줄리엣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최세드릭이 다소, 아니 상당히 터무니없는 비유를 떠올리며 고민에 빠진 바로 그 무렵, 서울시 중구 던전게이트3가 16로 <카페 리을>.
권리을은 한 가지 난관에 부딪힌 상태였다.
* * *
엥?
나는 눈을 비빈 뒤 시스템 창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신선한 우유: 품절
※ 현재 입고 준비 중입니다. 입고 시 알림을 보내 드립니다.]
엥?
그동안 <카페 리을>의 영업은 순조로웠다.
스킬 레벨 업으로 회복도 더 용이해졌고, 손님은 꾸준히 카페를 찾았다.
다소 특이한 손님은 있었지만 흔히 말하는 진상 손님 하나 없는 자영업 슈퍼 이지 모드.
매일 원두를 볶고 설탕을 만들고 손님들에게 음료를 판매하는, 꿈에 그리던 현실 카페 타이쿤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만능 아르바이트생 아스의 존재.
덕분에 가게 매상도 척척 올라갔고, 업적 달성으로 새 레시피도 여럿 얻은 데다 레벨도 올랐다.
순풍에 돛 단 듯한 가게 운영.
너무 순조롭다 보니 불안해질 때도 있었다.
‘이상하다. 슬슬 방해를 할 때가 됐는데……. 왜 시스템이 조용하지?’
그냥 근거 없는 감에 불과하지만, 이 편안하고 시련 없는 상태를 시스템이 두고 보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설마 이런 문제가 발생할 줄은 몰랐다.
갑자기 차원의 상점에서 우유와 생크림이 품절되었다.
‘요즘 장사가 잘되어서 너무 많이 샀나?’
루비를 지불하고 상품 목록을 새로 고침 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품절, 품절, 품절…….
루비만 먹고 정작 필요한 우유는 주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우유만 똑 떨어지는 것은 시스템의 의지가 느껴졌다.
“왜옭, 왜오옭(위대하신 시스템을 너무 나쁘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
미음이는 이렇게 말하며 은근슬쩍 시스템의 편을 들었지만. 이 원 패턴의 방해 이벤트 발생 방식.
이런 점까지 예전에 한 카페 경영 게임이 생각났다.
불굴의 노동과 개인 정보 팔이로 겨우 랭킹 1위를 찍었는데 귀찮은 방해 퀘스트만 띄워 댔지. 그러니까 망겜 소리를 듣지.
무슨 이상한 이름의 길드, 뭐였더라…… 아, ‘너하나접는다고섭종함’ 사람들도 자꾸 귀찮게 굴었고.
“왜 그러지?”
“아, 잠깐 우유가 떨어졌네.”
어쨌건 없는 물건을 찾아도 어쩔 수 없다. 아쉬운 대로 평범한 시판 우유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스, 어때?”
“…….”
착잡한 표정으로 아스가 말을 삼켰다. 머리 위의 만족도 막대가 조금씩 차오르다가…… 어중간한 곳에서 멈췄다. 그가 하지 않은 말보다도 확실한 대답이다.
나 역시 마시던 카페라테 잔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오해를 풀기 위해서 확실히 밝히자면, 평범한 우유를 쓴 커피도 절대 맛이 없는 것은 아니다. 쌉싸름한 에스프레소와 고소한 우유가 빚어내는 하모니는 분명 내가 아는 카페라테 맛이 맞았다.
문제는 그동안 입맛이 차원의 상점에서 산 우유로 만든 커피에 길들여져 버렸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평범한 우유를 쓰자 나오는 등급은 1성. 회복 효율도 나빴다.
이건 안 되겠다. 전에 만들었던 커피를 마셔 본 사람이면 맛의 차이를 느낄 것이 틀림없다. 인기를 끌더니 맛이 변했다느니 하는 소문이 도는 건 싫었다.
결국 우유를 다시 구할 수 있을 때까지 우유를 사용하는 음료는 메뉴에서 빼기로 했다.
문제는 카페 메뉴에서 원두 다음으로 우유와 생크림이 많이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우유와 생크림을 빼고 남는 메뉴는 아메리카노, 아이스 아메리카노, 레몬에이드가 전부 다였다.
당연히 불만이 불거졌다.
“카페라테 하나 주세요. 헉, 지금 안 된다고요?”
“제발…… 이제 이 카페의 카푸치노를 마시지 않으면 힘이 나지 않아요!”
“바닐라라테가 마시고 싶다는…….”
“두 배로 돈을 낼 테니 제발 팔아 주십쇼!”
“나는 세 배, 아니, 다섯 배로 내겠다는…….”
아쉬워하는 손님들을 돌려보내며 애처롭게 차원의 상점을 들여다 보았지만 여전히 품절 상태 그대로였다.
어디서 우유를 구할 방법이 없을까.
아이템 창의 설명에 따르면 지금까지 써 오던 우유는 A급 황금삼각뿔소의 우유라고 했는데……
A급 황금삼각뿔소는 어디에 있는 걸까.
띠링.
[에테르-위키에 ‘황금삼각뿔소’ 항목이 추가되었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시스템 알림이 울렸지만 에테르-위키에도 특별히 도움 되는 내용은 없었다. 그저 황금삼각뿔소의 생태를 간단하게 설명한 것이 전부였다.
[‘A급 황금삼각뿔소의 생태’ 영상을 재생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오]
위키에 동영상 기능도 있는 줄은 처음 알았네…….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A급 청정지에서만 사는 황금삼각뿔소의 생태를 만나 보자. 도시 생활에 지친 현대인의 마음을 치유하는 영상, 3일간 무료 공개]
무슨 광고 문구가 길게 붙어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한 뒤 ‘아니오’를 선택하고 몸을 일으켰다.
우유를 구할 방법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밀린 일을 하나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
그동안 매상이 꽤 쌓였다. 돈을 벌었으니 써야 하는 법이지.
“아스, 잠깐 와 봐.”
“……왜 그러지?”
“갈 데가 있어.”
* * *
한 시간 뒤.
“…….”
시선이 따갑다. 무언의 항의를 무시하고, 나는 아스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릴게.”
결국 저항을 포기한 아스가 한숨을 쉬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여기는 용산의 쇼핑몰 의류 매장.
목적은 물론 아스의 옷을 사러 왔다.
처음 가게 앞에서 쓰러진 모습을 발견했을 때, 아스는 무척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 아니, 옷이라기보다는…… 거적때기? 형태도 알아보기 힘든 데다 평범한 현대 복식조차 아니었다.
창고에 온갖 잡동사니가 있었지만 아스 정도의 남자애가 입을 만한 옷은 없었다.
급한 대로 아르바이트 유니폼이라는 명목으로 내 옷을 입혔는데 너무 컸다. 셔츠의 소매와 바지를 접어 올렸지만 아무리 봐도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모습이다.
옷을 좀 사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좀처럼 틈을 내지 못하던 차였는데 마침 잘됐다.
“우유가 떨어져서 오늘은 일찍 닫을게요.”
카페를 일찍 정리한 뒤 아스의 옷을 사러 왔다.
아, 물론 내가 사 줄 예정이다.
참고로 아스에게는 제대로 아르바이트비를 지급하고 있다. 하지만 아스는 아무리 봐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가출 청소년이 아닌가. 아르바이트비는 잘 저금했다가 다른 데 쓰면 좋겠다.
나야 영영 아스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주면 좋겠지만……. 나중엔 학교 같은 델 갈 수도 있잖아.
그리고 그동안 가게 매상도 많이 올랐다. 이 정도면 머지않아 집, 아니 빌딩도 살 수 있겠다.
……크흠, 건물주의 미래를 꿈꾸는 건 이따가 하기로 하고.
돈을 벌면 뭘 해야 할까?
바로 써야 한다.
매상은 착착 쌓여 가는데 그동안 바빠서 쓸 겨를이 없었다.
현대 소비 사회의 일원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 바로 지금이 노동 디톡스가 필요한 순간!
아스도 그동안 가게에서만 지냈으니 오랜만에 던전 게이트 앞을 벗어나 쇼핑도 하고 외식도 하려 했다.
그렇게 비교적 가깝고 옷가게도 많은 용산으로 아스를 데리고 왔는데…….
“아! 저기 괜찮아 보인다. 저기 가 보자.”
“……윽.”
아스는 쇼핑몰에 가득한 인파를 보자마자 질린 표정이었다.
“이런 건 어때? 이거 한번 입어 봐.”
“됐어. 안 입어 봐도.”
“이거도 예쁘다.”
“별로…….”
이 비협조적인 태도.
이건 꼭…… 가족이랑 옷 사러 가기 귀찮아하는 어린애 같다.
“아스, 너 역시 열일곱 살이라는 거 거짓말이지?”
“큭, 들켰군. 나는 사실 이천 살을 넘겼…….”
그 설정 아직 살아 있었구나…….
“이천 살이건 열네 살이건 최소 세 벌 고를 때까지는 안 놔줄 테니 포기해.”
“……쳇.”
“마음에 드는 건 없어? 아스 네 마음에 드는 걸로 사도 되니까, 응?”
“호오, 저건 괜찮군.”
‘인간이 쓰레기 같구나.’ 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따라오던 아스가 한 옷가게를 가리켰다.
“그래? 그럼 저기로 갈까……. 응?”
나는 눈을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