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용산역과 연결된 대형 쇼핑몰. 쇼핑을 즐기거나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 많아 활기차게 북적거리는 이곳.
이곳에 어쩌다 저런 가게가 있는 거지……?
전체적으로 어두침침한 와중 티셔츠에 그려진 강렬한 그림이 눈에 띈다. 뭔가를 소환할 것 같은 그림이다.
그뿐만이라면 독특한 패션을 취급하려는 가게려니 했을 것이다. 커다랗게 걸린 홍보 플래카드를 보고 나는 멈칫했다.
‘마왕 숭배교 황혼 공식 스폰서’
‘당신의 포교에 적합한 최고의 패션’
‘왼팔의 흑염룡도 좋아해요.’
잠깐, 저기 옷에서 이상한 기운 느껴지는 거 같은데…….
안 된다. 저 옷가게의 모든 것이 중2병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홀린 듯이 가까이 다가가는 아스를 붙잡고 반대편의 캐주얼한 아동복 가게로 이끌었다.
“아스, 이거랑 이거 입어 보면 돌아가서 커피 만들어 줄게.”
“……정말? 오늘치는 벌써 다 먹었는데?”
아스는 어리니까 카페인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좋지 않을 것 같아 하루 두 잔으로 정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한 잔 정도는 더 마셔도 괜찮겠지. 아스 줄 우유는 남겨 놓길 잘했네.
“그래. 얼른 입어 보자.”
이렇게 힘들게 아스에게 새 옷을 사 입힐 수 있었다.
“손님, 너무 잘 어울리세요!”
점원이 추천하는 신상품이라며 마구 물건을 가져왔다. 셔츠, 카디건, 코트 등등. 나는 점원이 건네는 옷들을 아스한테 한번 입혀 본 다음 그대로 결제했다.
왜냐면 전부 다 너무 귀여웠으니까.
몸에 잘 맞는 옷을 입은 아스는 인상부터 달라 보였다.
‘이게 돈 쓰는 맛이구나……!’
“이 옷도 잘 받네요. 완전 아동복 모델 같아요!”
점원의 주접 섞인 칭찬에 아스가 흠칫 놀랐다.
“……아동복?”
아차, 여기가 아동복 매장이라는 걸 들킬 뻔했다.
나는 얼른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급한 볼일은 다 끝났다. 하지만 나는 지하철역을 향하는 대신 위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어디로 가는 거지?”
“이왕 나왔으니까 같이 영화 보고 가자.”
“됐어, 그런 거.”
그렇게 말할 줄 알고 미리 준비해 왔지.
“팝콘 2인 쿠폰이 있는데, 혼자서 보면 팝콘 두 개를 다 먹을 수도 없고 곤란하네. 아스가 같이 있어 주면 좋을 텐데.”
“그럼 뭐…… 별수 없지.”
정말이지, 붙임성 없고 귀여운 녀석 같으니.
“무슨 영화인데?”
“아, 오컬트 판타지 영화인데. 주인공이 주위의 사건을 조사하다가 악마의 짓이란 걸 밝혀내는 스토리야. 약간 무섭지만 마지막엔 주인공이 악마를 물리친다고 해.”
“…….”
“아스? 왜 그래?”
“그렇게 슬픈 내용이라니…….”
방금 내 말 어디에 슬픈 내용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수에 잠긴 눈동자에 보일 듯 말듯 눈물이 맺힌다.
그래도 보지 않겠다고는 말하지 않아서, 그대로 영화를 보러 위층의 영화관을 향했다.
먼저 팝콘을 사야 하는데, 매점이 어디 있더라……
쾅!
“어?”
우리가 지나온 아래층 방향에서 갑자기 굉음이 울렸다.
뒤따르는 비명 소리.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어딘가로 달려간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설마…… 균열이라도 발생한 건가?
아니, 회귀 전의 기억에 용산에서 균열이 터진 적은 없었는데.
“아스, 잠깐 무슨 일인지 보고 올게. 여기서 기다려.”
“……! 잠깐!”
아스가 놀라 나를 붙잡으려 했다. 나는 괜찮다며 대량의 쇼핑백을 맡기고 소리가 난 방향을 향했다.
다행히 굉음의 정체는 균열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건 대체 뭐지?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인간? 아니, 몬스터?
저게…… 대체 뭐야?
* * *
처음에 이세인은 비서 이온의 제안에 따를 마음이 없었다.
도망친 화신체를 죽이기 위해 균열을 발생시키라니.
리스크가 크다. 혹여나 그녀가 한 일이라고 밝혀지면 처벌을 피할 수 없을 테다.
무엇보다 이세인을 가로막은 것은 양심이다.
이제껏 <씨앤엘 코퍼레이션>을 발전시키기 위해 몇 가지 불법을 저질렀고, 경쟁자는 거침없이 처리했다. 그러나 일반인에 대해서라면 이세인은 평균적인 도덕심을 지닌 사람이었다.
도심에 균열이 터지면 필연적으로 무관계한 사람이 휘말리게 된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시간이 있다. 막 봉인에서 깨어난 화신체가 도망쳐 봐야 얼마나 도망쳤겠는가. 산하 조직의 헌터를 불러 샅샅이 뒤지면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래, 그렇게 하자.
마음을 정리한 이세인은 황금빛 상자를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 처박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심한 악몽에 시달렸다. 악몽은 그녀가 일찍이 잊어버리려 한 과거이기도 했고, 정체불명의 괴물이 튀어나온 적도 있었다.
혼자 있을 때면 낯선 목소리가 뇌리를 파고 들었다.
【상자를 열어.】
“흐, 흐아아악!”
“대표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상자를 열어.】
끝없이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견디다 못해 황금빛 상자를 이온에게 돌려주려 했다.
“대표님, 부르셨어요?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그런데 이번에는 강렬한 공포와 거부감이 몸을 엄습했다.
이 상자를 손에서 떼어 냈다간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나리란 예감, 그에서 비롯된 공포, 그리고…… 힘을 손에 넣고 싶은 욕망!
그래, 힘!
언제나 힘을 원하지 않았던가.
이세인은 헌터로서의 능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여러 아이템의 효과를 빌려 겨우 달성한 등급이 C급. 그래서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뛰어난 헌터를 영입하는 방식으로 길드를 키웠다.
하지만 화신체의 마력만 있으면 나도…….
“……!”
이세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방금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결국 그녀는 상자를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서울에 있는 여러 길드의 장이 참석하는 길드장 회의.
조금 일찍 도착한 이세인이 회의장에 들어서는 순간 말소리가 뚝 끊겼다. 한참 잡담을 나누던 사람들이 어색한 웃음을 띠며 시선을 피한다.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계셨을까. 저도 궁금한데요.”
“하하, 저희 길드에 레어한 아이템이 하나 들어와서. 여러분께 보여 드리던 참이었습니다.”
테이블 위에 건틀릿 하나가 놓여 있었다. 레어 아이템이라는 것이 거짓말은 아닌 듯, 척 보기에도 눈에 띄었다.
“그래요? 이건가요?”
건틀릿을 향해 손을 뻗는데 맞은편의 남자가 제지했다.
“……?”
“크흠! 죄송하지만 이 아이템은 B급 이상부터 적용 가능해서, 이세인 대표님께는 좀…….”
정적. 이어 은은하게 번지는 웃음.
우월감이 섞인 시선이 공중에서 교차된다.
이 자리에 이세인만큼 지위가 높은 사람은 없었다. 눈앞에서 거들먹거리는 남자 역시 정치권에 다리를 놔 달라고 이세인에게 청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이딴 아이템 하나로 우월감을 느끼는 꼴이 우스웠다.
손을 거두며 이세인은 생긋 웃었다.
“잘 어울리시네요. 앞으로도 계속 필드 뛰시는 게 좋으시겠어요.”
“아, 그게, 대표님…….”
이세인의 말뜻을 파악한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런 희귀한 아이템도 직접 운용 가능하신 분이 현장에 계셔야, 한국이 더 안전하지 않겠어요?”
그대로 회의장을 나서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수면 부족으로 현기증이 나 몸이 비틀거렸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사람이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스르륵 떨어지는 은빛 머리카락이 익숙하다.
권지운이었다.
그녀와 달리 분명한 재능을 갖춘 사람.
각성한 그 순간부터 최초의 A급 힐러라는 이유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담담하게 인터뷰에 대답하던 은빛 머리카락의 소년을 기억한다.
……자신 역시 같은 날에 각성했는데, 처한 상황은 너무도 달랐다.
그리고 지금.
<씨앤엘>이 권지운의 길드를 압박하는 상황에서도 저 아무렇지 않아하는 낯이라니. 어차피 속으로는 아까의 놈들처럼 자신을 비웃을 거면서.
그래서 이세인은 권지운을 싫어했다. 그저 재능에 기댄 헌터들을 날려 버리고 싶었으니까.
탁!
이세인은 부축하는 손을 쳐 내고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요.”
이후로는 어떻게 방에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 목소리가 들렸고, 이성을 잃었던 것 같다.
정말 이걸로 만족하나?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을걸.
알고 있잖아. 지긋지긋한 열등감을 근본적으로 없애는 방법. 힘을 스스로 손에 넣으면 돼.
【상자를 열어.】
“……!”
퍼뜩, 정신을 차린 다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늦은 상태였다.
이세인은 떨리는 손을 움직여 바닥에 나동그라진 황금빛 상자를 집어 들었다.
“아…… 안 돼…….”
이미 늦었다.
안에 들어 있던 기묘하게 생긴 각뿔 모형은 부서진 다음이었다.
‘진정해. 균열을 발생시키는 아이템이라고 했어. 균열이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어.’
그녀는 한국 최대 규모 길드의 대표다. 소속 헌터를 움직이면 피해를 줄일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상자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균열 따위가 아니었다.
이세인은 황급히 창문을 향해 달려갔다.
저건, ……문?
하늘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어두운 안개에 감싸인 구멍에서 부정형의 검은 괴물이 쏟아져 내린다.
불쾌한 악취가 나는가 싶더니, 알림 창이 떴다.
[축하합니다!
얼굴 없는 자 □□□□□의 힘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대상: 화신체 아스모데우스를 섬멸할 때까지 유지됩니다.
해당 작업은 취소가 불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