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이동하고, 파편을 찾고, 태우고의 반복.
중간에 검은 점액질 몬스터와 마주쳤지만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순조롭게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좌표.
탁.
눈을 뜨자 보인 것은 어느 건물의 복도였다.
창문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지하 같았다. 벽과 바닥은 깨끗하게 청소되었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가 어딜까요.”
“글쎄요…….”
의아한 것은 주위 풍경이 왜인지 익숙하다는 점이다.
이런 빌딩에 들어와 본 기억은 없는데, 구조나 벽의 모양이 낯설지가 않았다.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기억을 더듬는데 옆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리을 씨,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우리 서로 질문 안 하기로 하지 않았어요?”
“그 질문 말고요.”
그 질문은 뭐고 이 질문은 뭘까…….
“좋아요, 그럼 물어보세요.”
시선은 나를 향하지 않았다. 백열등의 환한 빛이 그의 옆모습을 비춘다.
복도의 구조를 살피며 기유현이 입을 뗐다.
“리을 씨가 이 사건에 직접 나서는 이유는 뭔가요? 그 몬스터에 삼켜진 헌터의 가족과 지인이기 때문인가요?”
“그거야 퀘스트가…….”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다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게 정답이 아니란 것을, 스스로에게 하는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 몬스터에 삼켜진 사람 때문에 신경 쓰이는 것은 맞다. 지나의 가족이 아니었다면 안타까운 마음은 들지언정 직접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았을 테다.
‘그러라고 시스템이 알려 준 거겠지만…….’
시스템에 등을 떠밀려 움직이는 것도 맞다.
하늘의 거대한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나타나면서 도시는 혼란에 빠졌다.
이미 알던 회귀 전의 미래와는 달라졌고, 비전투계 F급 카페 주인인 내가 혼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시스템이 준 정보와 구체적인 퀘스트가 아니었다면, 얌전히 아스와 함께 피신하는 것이 정답일 테다. 한국에 강한 헌터가 얼마나 많은데, 정식 헌터도 아닌 내가 나서겠는가.
하지만…….
슬며시 내 손을 잡고 눈을 내리깔던 아스의 표정이 떠올랐다.
속에 든 말을 하지 못하고 부루퉁한 표정으로 진심을 숨기고 있지만, 잡은 손 너머로 전해지는 미처 감추지 못한 미약한 떨림도.
나는 대단한 도덕성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위험한 일은 질색이다. 하지만 그런 아스를 보고 모르는 척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런 거다.
퀘스트에 등을 떠밀린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퀘스트가 알려 준 셈이지.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커피를 만들고 카페를 여는 것도, 그때 최세드릭을 돕고 싶었던 것도 내 마음이었으니까.
투덜거리면서 시스템의 퀘스트를 따른 것도 결국 하고 싶어서였고.
문득 우리 집 고양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왜옹, 왜오오옹(매번 일하기 싫다면서 일거리를 늘리는 건 인간 너 아니냐)!”
휴, 그러게. 내가 문제인가 보다…….
“그거야, 그냥 하고 싶으니까요.”
“네?”
“이유 같은 건 없어요. 그냥…… 이대로 모른 체할 수 없을 뿐이에요.”
두서없는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기유현은 살짝 웃었다. 그리고 걸음을 옮긴다.
“이곳이군요.”
그가 가리킨 복도 끝의 문을 앞에 둔 뒤에야,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철문에 새겨진 선명한 길드 마크.
그리고…….
“……리을아?! 네가 왜 여기 있어?”
하나뿐인 사촌오빠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왜 권지운이 여기서 나와?
설마. 가장 가까운 사람이 실은 최종 흑막?
……그런 식상한 전개는 당연히 아니었다.
“권리을, 네가 어떻게 여기……?”
“……오빠.”
나야말로 묻고 싶다. 권지운이 왜 여기 있는 건지.
한국이 좁다지만, 시스템의 좌푯값을 따라 적을 처치하러 이동했는데 어색한 사이의 사촌오빠가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까는 바로 떠올리지 못했지만, 이제 확실히 알겠다.
이곳은 <백은 길드>의 지하다. 과거에는 여기에 길드 공용 창고가 있었다.
큰아버지가 계실 적엔 길드 건물에 오면 늘 그 창고를 구경했어서 내게 익숙했던 거다. 다양한 물건이 보관된 지하 창고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이었으니까.
뭐, 그도 십 년 이상 된 이야기지만.
“사정이 있었어. 여긴 이동 스크롤로 왔고.”
“이동 스크롤을 썼다고?”
“……! 외부인이 멋대로 길드에 들어오다니. 무슨 짓입니까?”
권지운의 옆에 서 있던 박희영 헌터가 버럭 화를 냈다. 권지운이 제지했지만 굳은 표정은 펴지지 않는다.
‘부길드장님만 아니었어도, 진짜.’
딱 그런 눈빛이었다.
여전하네…….
<백은 길드>의 B급 탱커 박희영 헌터.
나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다. 내가 <백은 길드>를 찾아올 때마다 못마땅해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예민한 반응도 이해되었다.
서울의 모든 헌터 길드에는 균열과 몬스터로부터 건물을 보호하기 위한 결계가 설치되어 있다.
결계를 유지하기 위한 결계석은 당연히 아주 귀중하며, 가장 보안이 엄중한 곳에 보관된다.
내 기억이 분명하다면…… 바로 이 철문 너머가 <백은 길드>의 결계석을 보관하는 결계실.
외부인의 출입이 엄금될 뿐만 아니라,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문을 열지 않는다.
아까 기유현은 이 문 너머에 마지막 파편이 있다고 했다.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눈을 마주친 기유현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대체 왜 <백은 길드>의 심층부에 그 파편이?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래도 불법의 냄새가 풀풀 난다.
이제까지 착실하게 ‘초보자의 마을 여관 주인이었는데 몬스터와 맞서게 되었습니다.’ 루트를 따라가고 있지만.
퀘스트를 따라갔더니 흑막은 사실 가까운 사람이었다는 전개만큼은 사양한다. 그런 반전은 식상해진 지 한참이라고.
더군다나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는 결계실을 열어 달라고 하면 권지운은 뭐라고 반응할까.
“…….”
곧장 입을 떼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권지운이 기유현에게 말을 걸었다.
“전에 본 적 있죠. 기유현 헌터라고 했던가?”
“……오랜만입니다.”
“리을이하고 같이 있는 건 무슨 일이지?”
“하하, 리을 씨하고는 친분이 있어서요. 동행입니다.”
“…….”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권지운이 고개를 돌려 다시 나를 살핀다.
쇼핑몰에서 뛰고 구르느라 내 꼴은 엉망진창이었다. 나를 보고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짐작한 듯, 가까이 다가와 빠르게 말을 쏟아 낸다.
“권리을, 지금 바깥은 위험해.”
“어? 어…….”
“너도 각성자가 되었다고 했으니, 어떻게 여기 나타났는지는 묻지 않으마. 전대미문의 외계 게이트 발생으로 지금은 비상사태야. 박희영 헌터를 붙여 줄 테니 곧장 집으로 돌아가.”
“잠깐, 잠깐만, 권지운!”
“왜 그러니?”
“돌아가기 전에…… 부탁이 있어.”
“말하렴.”
“여기, 이 문을 열어야 해.”
“……!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죠? 호기심에 열 만한 곳이 아니에요.”
득달같이 달려드는 박희영.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이유가 있는 모양이구나.”
“……응, 설명하려면 길지만…… 안에 이상이 있을지도 몰라.”
“알았어.”
뜻밖에 권지운은 더 묻지 않고 내 말을 들어주었다.
“부길드장님! 저는 반대입니다.”
“박희영 헌터, 물러나.”
권지운이 결계실의 봉인을 풀고 육중한 철문을 옆으로 미는 순간.
이변은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결계실은 바닥과 벽이 하얀색 돌로 이루어진 작은 방으로, 특정한 아이템이 아니라 이 방 전체가 <백은 길드>의 결계를 유지하는 장치였다.
바닥의 네모난 반석에 은빛 글씨로 결계가 촘촘하게 새겨졌다. 벽은 결계를 발동하는 매개체 역할이었다.
그 방이 지금 온통 검었다. 마치 페인트를 부은 듯 사방이 새까맣고, 원래 은빛이었을 글씨는 녹슨 듯한 색이었다.
“욱……!”
그리고 코를 틀어쥐어도 느껴질 정도의 짙은 악취. 단순한 악취가 아니다.
이건…… 시취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후다닥, 권지운이 가장 먼저 결계실 안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바닥의 반석을 확인하고 탄식했다.
반석 위에 커다란 새 한 마리가 있었다.
원래는 아름다운 빛깔이었을 깃털은 새까맣게 변색되었다. 날개가 부러졌는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푸드덕거릴 때마다 고통에 찬 소리가 들렸고, 새의 눈은 눈물로 축축했다.
주위에 뿌려진 검붉은 자국은…… 새의 피다.
바로 알았다. 죽음이 가깝다는 걸.
시취는 이 새에게서 나고 있었다.
목전에 다가온 끝을 예감한 듯, 새가 몸을 축 늘어뜨렸다. 팔랑이며 검게 변색된 깃털이 바닥에 떨어졌다.
왜 봉인된 상태였던 결계실에 이 새가 있는 거지?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권지운이 낮게 뇌까렸다.
마지막으로 결계실을 확인한 때가 사흘 전. 그때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아무나 쉽사리 드나들 수 없는 곳일 뿐더러, 문이 열린 흔적도 없다.
권지운도, 권지운의 옆에 선 박희영 헌터도 어찌된 일인지 모르는 기색이다.
당황 속에 급히 다가가 살펴보려 하는데, 기유현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리을 씨, 저 새입니다.”
“……네?”
늘 차분하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파편…… 저 새, 긴꼬리불사조의 안에 있습니다.”
띠링.
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퀘스트 알림이 떴다.
[2. 모조품 빛나는 트라페조헤드론의 파편을 찾아라
파편 파괴하기 4/5: (달성 불가)
달성 불가하다는 알림, 그리고 바로 나타나는 다음 퀘스트.
[3. 제물과 융합된 파편
흑화한 제물: 긴꼬리불사조와 마지막 파편이 완전히 융합하여, 분리가 불가능합니다.
한 가지 방법을 선택하여 마지막 파편을 파괴하세요.
제한 시간(03:05:11)이 지날 시 퀘스트가 실패합니다.
마지막 파편 처리하기 0/1: (미완료)]
긴꼬리불사조라는 이름은 들은 적이 있었다.
분명…… 가게에 왔던 기레기, 아니 기자 아저씨가 말한 것이 기억난다.
“긴꼬리불사조는 보통 몬스터가 아닐세!”
“빛의 에테르를 발하고, 던전 중에서도 특수한 구역에서만 살아.”
“몬스터라기보다는 그거지, 성수.”
오염된 몸을 스스로 정화하는 힘이 있다고 했지만…….
지금은 힘을 잃은 듯했다.
“그르륵…….”
검은 새가 거품과 함께 고통스러운 소리를 뱉어 냈다.
손을 가까이 가져가자 후끈한 열감이 느껴졌다. 어둠에 삼켜져 죽어 가는 새의 고통이 지나칠 정도로 생생했다.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 새와 융합된 상태라면 파편을 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다시 알림 창이 뜬다.
[1. 제물: 긴꼬리불사조를 태우기 (난이도: Easy) ☜ 추천
2. 제물: 긴꼬리불사조를 정화하기 (난이도: Special Hard)]
“……!”
또다.
시스템은 다시 내게 선택을 강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