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하지만 내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곧장 2번을 골랐다.
성수라고 불리는 새다. 아니, 그 전에 누구라도 저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 테다. 그러니 어떻게든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살리고 싶었다.
[2번 루트는 난이도가 매우 높아 추천하지 않습니다. 정말 이대로 진행하시겠습니까?]
이어진 알림 창을 무시하고 물었다.
“어떻게, 방법이 있을까요……?”
“제가 한번 볼까요.”
불쑥 기유현이 나섰다.
새 따위에 신경 쓸 시간이 있냐고 구시렁거리는 박희영을 무시하고 난 그에게 물었다.
“할 수 있어요?”
“아마도요.”
기유현이 긴꼬리불사조를 향해 스킬을 시전했다. 손끝에서 생겨난 백광의 입지가 점점 커지더니 빛의 장막이 되었다.
빛에 감싸인 깃털이 서서히 원래의 빛깔을 되찾는다. 하얀 바탕에 은은한 무지갯빛이 아롱진 깃털이 흩날리고, 이윽고 날개를 퍼덕인다.
“와……!”
안도의 탄성을 터뜨린 것도 잠시.
백광의 입자가 깃털을 정화하는 것과 같은 속도로 다시 어둠이 긴꼬리불사조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몸을 일으키려고 몇 번 낑낑대던 새가 균형을 잃고 쓰러졌고, 다시금 어둠에 삼켜진다.
“……다시 해 보죠.”
검은 눈 안에서 빛이 튀었다.
주위를 가득 메운 불쾌한 냄새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빛의 그물이 촘촘하게 새를 감싸고 오염을 지워 낸다.
길게 뻗은 황금빛 꼬리가 본래의 영롱한 빛을 발했지만, 그저 한 순간.
“쌔액, 쌔애액…….”
파편이 불러온 독이 속수무책으로 새의 몸을 뒤덮었다.
이래서는 끝이 없다.
파편을 삼킨 탓에 긴꼬리불사조는 원래의 힘을 잃어버렸다. 아무리 정화를 해도 파편을 부수지 않는 한 결과는 같다.
‘완전히 융합한 파편을 부수기 위해서는…….’
[1. 제물: 긴꼬리불사조를 태우기 (난이도: Easy) ☜ 추천]
알림 창이 다시 깜빡인다. 당장이라도 이걸 선택하라는 듯이.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듯 긴꼬리불사조가 고개를 늘어뜨렸다.
꿀꺽…….
손짓 한 번으로 이 가여운 새의 고통을 끝낼 수 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눈물에 젖은 새의 눈에는 분명한 이지가 있었으니까.
아니, 포기하기는 이르다.
이 시스템이 여기까지 나를 이끈 이상 어딘가에는 방법이 있을 거다. 이제껏 시스템이 뭐든 순순히 알려 주는 법이 없었으니까, 샅샅이 뒤지면 어딘가에는 힌트가 있겠지.
있을 거다. 있다고 믿고 싶었다.
처참한 긴장 속에서 나는 눈앞의 반투명한 창을 바라보았다.
‘에테르-위키’
[자격을 확인 중입니다. ……완료.]
[적격자: 권리을 확인…….]
‘건너뛰기’
길게 뜨는 문자열을 스킵하고 항목을 하나씩 확인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서였다. 열린 항목은 많지 않지만, 어딘가에 힌트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다 구석에서 깜빡이던 미확인 알림이 멋대로 열렸다.
[’A급 황금삼각뿔소의 생태’ 영상을 재생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오]
‘아니오.’
지금 소 다큐멘터리 따위를 볼 시간은 없었다.
그러나…….
[’A급 황금삼각뿔소의 생태’ 영상을 재생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오]
시스템 창이 내게 ‘네’를 선택할 것을 종용했다.
이 시스템 창은 사용자의 시선, 음성, 사고 등을 인식하여 조작 가능하다.
그리고 나는 시선, 음성, 사고를 모두 사용하여 전력으로 ‘아니오’를 골랐으나, 전혀 통하지 않았다.
멋대로 선택할 거면 애초에 왜 물어본 걸까……?
[영상이 재생됩니다.]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어느 잔디밭에 있었다.
……네? 잔디밭?
방금까지 건물 안에 있었는데요?
* * *
푸른 하늘에 반짝거리는 햇빛,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멀리서 풀을 뜯는 소의 모습까지…….
너무나도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고즈넉한 목장이 떠오르는 평화로움에 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영상’이라는 게 VR 기능까지 딸려 있는 거였어?
들이마신 숨에서 여름철 풀잎 냄새가 났다.
흠칫한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짓이겨진 풀잎이 신발 밑창을 초록빛으로 물들였다. 손을 뻗으니 팔랑거리는 풀잎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진다.
……여긴 어디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이렇게까지 실감나는 영상이 있을 리가. 영상이 아니라 어딘가 낯선 곳으로 갑자기 소환된 듯했다.
꺼진 시스템도 다시 보자, 진짜…….
천천히 주위를 살펴보려는 와중이었다.
“……!”
멀리 보이는 아름드리나무. 그 나무 그늘 아래에 낯선 여자가 나타났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에 반짝거리는 금발, 긴 드레스는 꼭 판타지풍 RPG 게임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 같았다.
【드디어 만났구나.】
“네? 저를 아세요?”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다. 외국에 한 번도 나가 보지 못했는데, 이런 판타지 RPG의 성녀 캐릭터 같은 여자를 만난 기억은 없다.
그런데 목소리가 익숙했다. 머릿속으로 직접 울리는 이 목소리를, 분명 어디서…….
가만히 기억을 더듬는데 문득 시야가 흐려졌다. 빛깔을 잃은 풍경은 마치 테두리가 뭉개진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일이지?
【인과율의 방해 때문이에요.】
【긴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좋지 않은 상황이군요.】
【단 하나. 그대가 궁금한 것을 물어봐도 좋아요.】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흐릿한 기억을 더듬는 일은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 일단 이 판타지 RPG 성녀에게 묻고 싶은 것은 하나였다.
“그 새, 긴꼬리불사조를 살리는 방법을 알고 싶어요.”
【그대는 답을 알 것입니다.】
“네?”
모르니까 물어본 거잖아요?
그렇게 따지려는 때, 푸른 하늘 저편에서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새는 공중을 한 바퀴 돈 뒤 판타지 RPG 성녀의 어깨에 앉았다.
새는 아픈 것처럼 보였다. 원래의 영롱한 빛을 잃은 날개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낑낑대는 지저귐에도 기운이 없었다.
성녀는 뒤쪽의 나무에서 열매 하나를 따서 새에게 내밀었다. 엄지손톱보다 조금 큰 짙붉은 열매다.
새가 부리를 벌리고 열매를 삼킨다.
곧 부리 끝에서부터 빛으로 화해 새는 사라졌다.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 깃털만이 새의 존재를 증명할 뿐이었다.
“……!”
놀라움도 잠시.
곧 그 자리에 새로운 긴꼬리불사조가 나타났다.
푸드덕! 새하얀 깃털이 햇빛에 반짝거리고, 새는 다시 하늘 저편으로 날아간다.
긴꼬리불사조가 지나간 자리에 반짝거리는 빛의 입자가 쏟아진다.
“아…….”
이곳에서는 신기할 정도로 감각이 예민해졌고, 원래라면 알 수 없을 내용도 자연스럽게 머리에서 떠올랐다. 내 것이 아닌 지식을 머리에 직접 전달받는 느낌이다.
몸에 쌓인 오염을 정화한 긴꼬리불사조는 빛의 에테르로 돌아갔고, 그 에테르에서 새로운 새의 몸체가 빚어진 것이다.
‘불사조’라는 이름의 뜻은 이것.
던전 안에 존재하는 ‘빛의 에테르’가 새 그 자체다.
에테르계가 끝없이 순환하는 한 이 새에게 죽음은 부재한다. 그렇기에 불사조라 불린다.
신비한 광경에 시선을 빼앗긴 나를 성녀가 불렀다. 그리고 열매 하나를 더 따서 내게 건넸다.
차갑고 부드러운 그 열매를 손바닥 위에 올리는 순간, 공간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시야가 암전한다.
다만 바스러지기 직전 그녀의 목소리만이 남아 귓가를 간질였다.
【어떤가요. 두 번째 삶은?】
“……!”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그때까지 그대가 바라던 삶을 손에 넣을 수 있길.】
완전 의미심장한 말투다. 이런 거 게임 같은 데서 많이 봤는데.
평화롭게 잡화점 심부름이나 슬라임 사냥을 하는 RPG 게임 초보 마을의 캐릭터에게 나타나 아련한 표정으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는 캐릭터.
‘다시 만나길 기다렸다.’느니 ‘너의 힘이 필요하다.’느니 의미심장한 말만 잔뜩 하고 실제로 도움은 하나도 주지 않는 캐릭터.
그런 캐릭터가 나타나면 꼭 귀찮은 일이 일어나던데. 난 그런 거 싫다.
카페 하게 해 준다며. 휴식! 휴식 뜻 몰라? 카페 손님이 생각보다 많은 것 정도는 감안하겠지만 나도 모르는 큰일에 휘말리는 것은 사양한다.
그 성녀, 나를 키워서 어디다 쓰려는 거지?
“……아.”
속으로 불평을 쏟아 내다가 퍼뜩, 생경한 기억이 머리를 스친다.
기억났다.
그 성녀를 어디서 만났는지.
분명 그때…….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빛의 폭풍이 시야를 뒤덮었다.
* * *
“헉, 허억…….”
흘러내린 땀 때문에 눈이 따끔거렸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리을 씨?!”
“권리을, 왜 그래?”
주위는 검게 칠해진 방. 아까 있던 결계실이 맞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옆에서 걱정스럽게 나를 들여다보는 권지운과 기유현의 시선이 느껴졌다. 딱딱한 박희영 헌터의 모습도.
방금 뭐였지.
지나치게 생생하던 광경이 한순간에 확 꺼져 들어 아직 현실감이 없었다.
“괜찮아?”
“어, 어……. 잠깐 놀랐…… 놀라서 그래.”
A급 황금삼각뿔소의 영상이라더니 소도 안 나왔고 애초에 영상조차 아니었잖아. 시스템용 소보원이 있다면 진정을 넣고 싶다.
[이용에 감사드립니다.]
곧장 메시지가 뜬다.
무슨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기유현이 손을 뻗더니 손수건으로 내 이마를 훔쳐 주었다. 나와 기유현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권지운의 표정이 굳는 것이 그의 어깨 너머로 보였다.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기유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뭘 보신 건가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