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방금 어떤, 실재하지 않는 것을 보신 것 같아서요.”
이 남자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내가 방금 무언가 봤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듯한 투였다.
옅은 침묵 사이로 그의 눈이 한층 더 가까워지는 순간.
“쌔액, 쌔애액…….”
새의 가쁜 숨소리가 주위를 환기했다. 새는 반석 위에서 여전히 죽어 가고 있었다.
방금 본 환상 속 광경의 영향일까. 긴꼬리불사조의 감정이 손에 잡힐 듯 분명하게 느껴졌다.
고통, 슬픔, 원망,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자에 대한 살의, 그보다 더 큰 절망.
“뭔가 보기는 했는데……. 그것보다, 불사조는 어떤 상태예요?”
“좋지 않습니다. 오염을 지워 내더라도 일시적일 뿐. 안에 삼킨 파편 때문에 금방 돌아옵니다.”
“그 열매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열매?”
뜬금없이 권지운이 입을 열었다.
“긴꼬리불사조는 희귀한 열매를 먹고 몸을 정화한다고 하지.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열매라는 이름이야.”
“아, 그거.”
뭔지 알아, 나 가지고 있어-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였다.
“하지만 위드그라실의 열매가 헌터들의 손에 실제로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어. 이제 와서 그걸 구할 방법은…… 아마도 없겠지.”
……응?
커피 원두를 만드는 데 쓰고 있는데? 라임이 밥으로 한 움큼씩 주는 그 커피 열매?
그…… 되게 귀한 거였구나…….
오늘 아침만 해도 라임이 밥그릇에 한가득 담아 줬는데…….
나는 재빨리 인벤토리를 열었다.
커피 열매는 모두 인벤토리가 아닌 가게의 이공간에 보관 중이다. 가지러 다녀오는 시간을 죽음을 목전에 둔 이 새가 견딜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까 본 광경이 꿈이 아니라면, 분명 여기에…….
있다. 검붉은 색에 말랑한 질감의 열매.
‘아까 그 성녀가 준 열매야.’
박희영이 냉큼 권지운의 말을 받아, 방법이 없으니 빨리 이 불사조를 치우자는 인정 없는 소리를 또 했다.
나는 그녀를 제치고 긴꼬리불사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권리을? 뭐 하는…….”
그리고 벌어진 부리의 틈새로 작은 열매를 밀어 넣었다.
뱉어내지 않도록 부리를 꽉 누르자 꿀꺽, 하고 새의 목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완전히 열매를 삼킨 직후. 빛의 파도가 크게 요동쳤다.
착각이었을까. 창문이라곤 없는 방인데도 어디선가 맑은 바람이 분 것 같았다. 바람이 눅눅한 악취를 날려 버려 한결 숨쉬기 편해졌다.
파아앗-
미세한 빛의 입자가 날개에 묻은 어둠을 녹여 내었고, 긴꼬리불사조는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팔랑, 깃털 하나가 손바닥에 떨어지고.
공기 중으로 흩어진 빛의 입자가 서서히 형태를 이루더니, 새로운 긴꼬리불사조가 나타났다.
“예쁘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토해 냈다.
곧게 뻗은 하얀 날개에, 하늘하늘 떨어지는 긴 황금빛 꼬리. 절망을 지워 내고 주위를 둘러보는 고요한 눈동자까지.
왜 성수라고 불리는지 단박에 이해되는 모습이었다.
푸드덕! 날갯짓을 하며 새가 가까이 다가왔다.
띠링, 때맞춰 알림 음이 울렸다. 알림 창 내용을 알기라도 하는 듯 긴꼬리불사조가 덥석 내게 안겨 왔다.
[3. 제물과 융합된 파편
마지막 파편 처리하기 (완료)]
[4. 혼돈을 막아라
드디어 마지막 단계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한 새를 외계 게이트 가까이 날리세요.
인과율이 얼굴 없는 자 □□□□□가 불러온 혼돈을 저지할 것입니다.
제한 시간(02:27:46)이 지날 시 퀘스트가 실패합니다.
긴꼬리불사조를 목표 지점에 데려가기: (미완료)]
비고: 37°33'××.6"N 126°59'××.4"E]
마지막 퀘스트만 해결하면 된다. 이제 크기에 비해 신기할 정도로 가벼운 새를 안고 지상으로 나갈 차례였다.
“얘를 밖에 풀어 주러 가야 해. 오빠도 같이 가자.”
자기네 길드에서 발견된 새니까 권지운도 전말이 신경 쓰이겠지. 그런 마음으로 권했다.
“먼저 가렴.”
하지만 권지운은 탁, 가볍게 내 등을 앞으로 밀어냈다.
“나는 이쪽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았어.”
길드 지하에 설치된 결계는 개별 길드를 보호하지만, 동시에 도시 전체를 보호하는 결계의 일부이기도 하다.
복구가 시급한 데다, 봉인을 뚫고 파편을 삼킨 긴꼬리불사조가 버려져 있던 경위가 불명이니만큼 처리할 일이 많겠지.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당연히 같이 갈 줄 알았는데.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너에게 묻고 싶은 건 산더미같이 많아. 하지만…… 돌아온 뒤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알았어.”
계속 서로 피해 왔지만, 이제는 정말로 권지운과 대화를 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금방 돌아올게.”
“기유현 헌터도, 리을이를 잘 부탁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권지운은 박희영과 함께 먼저 문을 나섰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퀘스트도 이제 마지막 단계다. 금방 끝날 테니까 그때 권지운과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면 된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왜 권지운의 차게 굳은 그 낯빛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을까. 왜.
* * *
목표 지점, 남산 공원 인근에서 긴꼬리불사조를 풀어 주었다.
“와……!”
몇 번 날개를 퍼덕이더니 새는 곧 힘을 찾았다. 잠시 나를 돌아보더니 곧장 힘차게 날개를 움직였다.
죽음에서 부활한 새가, 허공을 갈랐다.
* * *
오랫동안 쫓아온 타깃의 근거지를 앞에 두고, 기자 김태운의 마음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떨림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약간의 흥분과 드디어 진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다는 기쁨뿐.
어째서 이런 환희를 이제껏 잊고 있었을까.
그날, 던전 게이트 앞의 카페에서 레몬에이드를 마신 순간 김태운은 정말로 새로 태어났다.
그리고 현재.
“야, 너 미쳤어? 거기 뒤에 큰손 있는 거 몰라서 그래?”
“부장님, 이거 진짜 된다니까요. 제 스킬 알잖습니까. 무조건 조회 수 폭발하게 해 드립니다.”
“폭발은 무슨, 잘못 물었다간 조회 수가 아니라 회사가 터지게 생겼는데. 들쑤시지 말고 조용히 있자.”
“부장님, 저 한번 믿어 주십쇼.”
“전에 무원 건드려서 회사 셔터 내릴 뻔했을 때도 똑같이 말했지.”
“그때는 거…… 미안했슴다. 그래도 이번에는 달라요.”
“잔말 말고, 이번 호 메인 기사는 탑 랭커 50인 MBTI 발표로 결정했다.”
“MBTI 그딴 걸 누가 봅니까?”
“왜, MBTI 좋잖아. 요즘 인기인 거 몰라? 우리 기사 읽는 사람들 다 그런 랭커 가십 읽으려는 건데. 왜 갑자기 신크라운 파를 판다고 난리야? 요즘 아주 정의파 기자 다 되셨어?”
“부장님, <헌터 스코프>에서 큰 거 한번 터뜨리겠다면서요.”
“다 젊을 때 한 헛소리야. 태운아, 나 내년에 애들 대학 들어간다…….”
“아, 형!”
쾅!
“저 꼴통 새끼…….”
마음만은 수사물 영화 속 주인공이 된 양 주거니 받거니, 그렇게 멋지게 사표까지 던지고 드디어 이곳을 찾아냈다.
불법 길드 신크라운 파의 비밀 아지트.
밀수 및 여러 위법행위 의혹, 대형 길드의 불법 자금 의혹 등등. 그 모든 걸 오늘 밝혀낼 생각이었다.
[파파라치(E) (사용 중)
(Lv.1) 일정 시간 동안 들키지 않고 대상을 미행할 수 있다. (0:38:13)]
스킬 사용 시간은 아직 넉넉하다.
김태운은 주의 깊게 주변을 살피며 평범한 상점으로 꾸며진 아지트로 들어갔다.
“……!”
숨을 죽이고 잠시 기다렸지만 안에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얼핏 보아서는 평범한 문구 상점이다. 한쪽 벽의 진열대에 커다랗게 슬라임이 그려진 문구용품이 즐비했다. 반대쪽에는 계산대와 할인 행사 포스터 따위가 있다.
하지만.
계산대 아래에 숨겨진 버튼을 조작하자 드르륵, 진열장이 움직이고 숨겨진 금고가 드러났다.
‘번호는…… 맞겠지.’
비밀 정보통에게 적잖은 술과 돈과 밥을 먹이고 얻은 정보다.
이게 얼마짜리 기회인데, 하고 초조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달칵, 소리와 함께 금고가 열렸다.
안에 든 것은 제법 두꺼운 노트 두 권이었다.
김태운은 당장 한 권을 집어 들었다.
펼쳐 보니 페이지마다 숫자가 빼곡했다. 설마 비자금 장부인가?
그러나 숫자를 자세히 훑어본 김태운은 내용이 예상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겨운 놈들…….’
이건 긴꼬리불사조에 대한 기록이다.
이 자들은 지속적으로 암흑 에테르를 주입하여 서서히 몸을 오염시켰다.
그러곤 ‘무언가’를 소환시키기 위한 제물로 사용했다.
희귀 몬스터 밀거래, 불법 실험…… 그 위법성을 굳이 고려하지 않더라도, 첨부된 사진의 참상은 생리적으로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다른 한 권은 암흑 에테르를 입수하기 위한 자금 흐름.
신크라운 파의 계좌에 막대한 돈이 입금되었다. 여러 번 중간 다리를 거쳐 출처가 분명하지만…… 이건 중요한 자료다.
‘일단은 전부 찍어 간다.’
찰칵, 찰칵!
원본을 이대로 들고 갔다간 침입 사실을 들킬 위험이 있었다. 김태운은 장부의 모든 페이지를 사진으로 촬영하는 데 열중했다.
그 바람에 바로 지척까지 다가온 기척을 눈치채는 데 늦었다.
쿠웅, 쿵, 쿠웅-
묵직한 발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김태운은 깜짝 놀랐다.
스킬 유효 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을 텐데, 설마 뒤를 밟힌 건가?
그가 황급히 진열대를 되돌리고 벽의 구석에 서서 커튼으로 몸을 가렸다. 미흡한 은신이지만, 지금은 들키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지트 안으로 들어온 것은 신크라운파의 졸개도, 경비원도 뭣도 아니었다.
‘저, 저, 저게 뭐…… 뭐지?’
처음에는 검은 점액질로 피부를 감싼 몬스터라고 생각했다.
아니, 아니다. 검은 점액질 안에 갇힌 것은…… 인간이었다.
이지가 없는 이 부정형의 검은 덩어리는 인간을 집어삼켜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더군다나 저 얼굴은 본 적이 있었다.
‘신크라운 파 행동 대장?’
오랫동안 미행하다가 겨우 실마리를 잡았다 싶을 때쯤 모습을 감췄던 자였다. 그때는 미행을 들켰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검은 점액질 덩어리와, 정확히는 그 안에 집어삼켜진 사람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우욱…….”
급격히 토기가 차올랐다. 김태운은 손으로 입을 막고 소리를 죽인 채 헛구역질을 했다.
미세한 바늘로 끊임없이 정신을 긁어내고 흠집을 내는 느낌이다. 커튼의 틈새로 검은 점액질 덩어리를 보는 순간 알았다.
저런 것을 보고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마치 심연의 밑바닥에서 기어오는 혼돈을 직시하는 감각.
김태운이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끼고 털썩, 주저앉으려는 바로 그때.
화악-
창밖으로 황금빛 긴 꼬리를 늘어뜨린 새가 하늘을 날았다.
새의 날개에서 흘러나온 빛의 입자가 그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헉, 하아, 하아…….”
빛의 입자에 감싸이는 순간 머리가 다시 맑아졌다.
토기도 공포도 어느새 가라앉았다. 그를 두렵게 하던 검은 점액질 덩어리가 빛의 입자에 의해 녹아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