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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84/192)

84화

오래전 권지운이 각성한 이후 우린 계속 데면데면한 사이였지만, 그 이상의 악감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비록 표현 방식이 나빴을지언정 권지운 역시 나름 나를 염려했을지도 모른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이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큰아버지는 사라졌다. 남은 가족이라고는 권지운 한 명뿐인데.

회귀를 한 나 때문에 위험에 처했다면 어떡해야 하지.

회귀하지 말고, 살아나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럴 거였다면 차라리 그때 그대로 죽었어야 하는데.

아니……. 이런 생각을 하기는 이르다.

나는 다시 한번 깜빡이는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앞의 반투명한 막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정신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고 시야가 어둠에 감싸인다. 곧 모든 것이 멀어져 여기가 어딘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우읍, 읍, 으허억……!”

나는 역겨움을 견디지 못하고 구토했다.

* * *

온통 검은 공간.

잠시 뒤 희끄무레한 빛이 비치더니 눈앞은 다른 공간으로 변했다.

여기는…… 우리 가게?

아니, 인테리어가 조금 다르다. 시끄러운 고양이와 슬라임도 보이지 않고, 겉에는 특이한 간판도 달려 있지 않다.

무엇보다 지척에서 들려온 목소리.

“리을아, 하나 더 주련?”

“으으응. 다 먹었어.”

아. 할머니가 살아 계실 적, <카페 리을>이 아직 할머니의 카페였을 무렵이다.

카운터 안에서 할머니는 뜨개질 중이었고, 교복을 입은 내가 비뚜름하게 앉아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텅 빈 가게. 그밖에 다른 손님은 없다.

핸드폰 화면 속의 캐릭터 레벨로 봐서는 16살쯤인가.

이때는 학교 마치고 자주 할머니를 만나러 왔었다. 최이찬, 신미라와는 만나기 전이었고, 집에 돌아가 봐야 어차피 아무도 없었으니까.

“리을아, 그거 재밌나 보구나.”

“으으응. 그냥 그래.”

나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대답하고 화면 속의 뽑기 버튼을 띡띡 누른다. 좋지 않은 결과에 얼굴을 찌푸렸다.

“지운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몰라. 권지운 이야기 나한테 꺼내지도 마. 알아서 하겠지, 뭐.”

“지운이하고 사이가 안 좋아?”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입술만 삐죽거렸다.

속상한데 솔직하게 말하기가 어려웠다. 이어진 말은 숫제 고자질하는 투였다.

“그렇다기보다는……. 권지운이 각성했다고, 나한테 먼저…….”

채 말을 다 끝내기도 전, 탕!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으악! 깜짝이야. 갑자기 무슨 일…… 어?”

아직 학생 티가 나는 권지운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권리을, 너 여기 있었어?”

“왜? 할머니 댁에 오건 말건 내 마음인데? 오빠가 무슨 상관이야?”

“하아…….”

어린 권지운은 아직 표정을 숨기는 데 서툴렀던 만큼 감정이 그대로 뺨 위로 드러났다.

거친 염려와, 나를 확인한 순간 찾아든 안도.

그때는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몇 가지 장면이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내 앞에서 흘러갔다.

협박을 목적으로 나를 납치하려고 한 괴한.

일부러 나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권지운.

그런 주제에 내게 몇 번이나 전화하려다 결국 걸지 못하고 핸드폰을 내려놓는 모습.

다시 어둠이 몸을 뒤덮고 이윽고 정적.

이번에는 눈앞에 권지운이 있었다.

현재보다는 미래 시점인 듯한데, 정확히 언제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주위 풍경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지운은 무표정이었다. 놀랍도록 건조한 눈이 비스듬히 내리깔리더니 바닥을 향했다.

바닥에 뭐가 있나? 시야가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라 바닥을 볼 수가 없었다.

“치유의 빛을…….”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손끝에서 하얀 빛이 생겨났다. 원래라면 시전 대상에게 흡수되어야 하는 빛이 흡수되지 않고 공중을 떠돌았다.

다시 한번 더.

다시, 또 다시…….

그러나 ‘치유의 빛’은 여전히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한참이나 스킬을 반복하던 권지운의 손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권지운의 무표정에 실금이 갔다. 그 틈새로 쏟아지는 짙은 감정은……. 아. 절망이다.

“왜, 이게 안 되지……?”

“이상해. 수백, 수천 번을 사용한 스킬인데 안 먹힐 리가 없잖아. 제발……. 다시, 다시 해 봐야겠어.”

결과는 같다.

“제발, 일어나……. 내가 늦게 와서, 기다리게 해서 화내는 거지? 이제 그만 화내고 눈 떠, 응?”

“권지운 헌터님, 진정…… 진정하세요.”

“일어나. 일어나라고, 제발!”

“균열 너무 가까이 계셔서, 손 쓸 틈이 없었어요. 구출했을 때는 이미…… 죄송합니다.”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은 금방 울음이 되어 터져 나왔다.

듣는 사람까지 서러워지는 거센 울음.

잠깐, 설마 이건…….

말도 안 된다. 나는 3년 전 과거로 돌아왔으니, 이건 일어나지 않을 일이어야 했다.

시야가 조금 아래로 움직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축 늘어진 팔다리, 그리고 걸친 옷은 이상할 정도로 익숙했다.

권지운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울음을 터뜨리며 읊조린다.

“내가, 오빠가 왔으니까, 제발 눈을 떠. 일어나. 권리을……!”

다시 어둠.

어딘가로 정신이 다시 끌려가는 감각이 느껴지고.

“우읍……!”

나는 헛구역질을 했다.

사방은 온통 무한한 어둠. 내 몸조차 인지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역겨움만은 신기할 정도로 분명하게 느껴졌다.

괴롭다.

회귀했으니까 당연히 이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일 텐데.

사실일 리가 없다. 내가 죽고, 권지운이 혼자 남는 미래 같은 게 존재할 리가 없어.

나를 걱정해서 그렇게 일부러 거리를 뒀고, 제대로 이야기한 적도 손에 꼽을 정도인데.

내가 ‘이쪽’으로 와서 희희낙락하는 동안 혼자 남다니.

그건 너무하잖아.

“거짓말…….”

【맞아요, 거짓말이에요.】

“……!”

무한한 어둠 속에서 갑자기 빛이 쏟아졌다. 금발의 성녀가 그곳에 서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녀가 왜 여기 있는지보다 더 절실한 물음이 있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외쳤다.

“정말이야? 전부 거짓말이라고?”

【그래요. 이 세계는 다중 우주론을 채택하고 있지 않답니다.】

“…….”

【시간을 돌린 시점에서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며, 성립하지 않는 가능성이에요. 내가 만들어 낸 거짓에 불과해요.】

“정말로?”

【안심하세요. 정말이에요.】

처음에는 안도했고.

다음으로는 화가 났다.

새빨간 거짓이라면 왜 이런 걸 보여 줘서 놀래킨단 말인가.

【회귀한 일을 후회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시간을 돌림으로써 당신은 이미 당신의 혈육을 구했답니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성녀…….”

【성녀라뇨?】

판타지 RPG 게임 초반에 등장해서 초보자 주인공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성녀 캐릭터라고 전부 말하면 길잖아.

【여전히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요.】

“어떻게 된 거야? 권지운은 무사한 거지?”

【걱정 마세요. 당신이 눈을 뜨면 그 역시 돌아갈 거예요. 여기서 그가 죽으면 곤란해서 급하게 손을 쓰다 보니 다소 거친 수단을 써야 했거든요.】

일단은 안심했지만…….

그녀의 말이 어딘가 마음에 걸렸다.

이제껏 내가 성녀를 만난 것은 총 세 번이다.

한 번은 오늘 검게 변한 긴꼬리불사조를 살리려 했을 때.

다음은 바로 지금.

마지막 한 번은……

바로 회귀 전, 지난 번 삶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때였다.

* * *

몬스터에게 당해 죽음을 맞이한 다음. 시야가 온통 어둠에 감싸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금발의 성녀가 나타나 내게 말을 걸었다.

【큰일이에요. 여기서 당신이 죽으면 곤란한데.】

‘어, 어엉?’

【이래서는 이야기하기 불편하겠군요. 자, 이리 와요.】

뿌연 빛이 쏟아지더니 주위가 일변했다. 부드러운 바람에 푸른 하늘, 잔디밭은 현실감이 없었다.

막 몬스터에게 한방 맞고 뻗은 나는 어리둥절해하며 중얼거렸었지.

‘설마, 여기는 천국인가?’

매일 일만 하다 사망했다고 이렇게 아름다운 사후 세계에?

탈노동 뷰티풀 사후 라이프 시작?

【유감스럽게도 그건 아니랍니다.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답니다.】

‘뭐…… 진짜?’

분명 아픔과 함께 주마등이 보이고 이젠 끝이라는 확신이 들었는데.

【정확히는 죽음의 순간 인과를 끊어 내고 독립된 고리에 이 시간축을 감았답니다.】

‘어, 어어…… 그렇구나!’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나요?】

‘음, 아니, 전혀.’

반짝거리는 금발을 늘어뜨린 성녀가 경쾌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다시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살려 주려고 해요.】

‘왜?’

나는 의심에 찬 눈길로 성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야 죽었는데 갑자기 반짝거리는 금발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튀어나오면 누구라도 알아차릴 테다.

그러나 균열에 잘못 휘말려 불운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왜 이 성녀는 하필이면 나를 살려 주려고 하는 걸까.

도시의 1인 가정을 위한 철칙. 너무 좋은 이야기는 일단 의심하고 본다.

【그래야 하기 때문이에요.】

생긋, 성녀가 웃었다. 명백히 대답을 피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인과율의 제한 때문에 나는 각성자에게만 개입이 가능해요. 그러니 당신이 각성을 하는 조건으로 살려 주겠어요.】

‘…….’

그야 당연히 죽는 것보단 사는 게 좋다.

하지만 내가 죽었다는 사실도 아직 믿기지 않는데 각성이라니 현실감이 너무 없는 이야기였다.

【당신이 바라는 힘을 부여해 주도록 하지요. 원하는 각성 능력은 없나요?】

나는 참 일관된 성격이다. 이날 기억은 지워졌지만, 그때도 내 행동은 일관되었다.

‘능력? 딱히 없는데…….’

더군다나 긴 야근으로 살짝 멘탈이 나간 상태이기도 했다.

‘그냥 잠이나 많이 자고 싶어.’

【그건 능력이 아니잖아요.】

그때 문득 오래전 열심히 했던 게임 내용이 떠올랐다. 그래, 그 게임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그러면…… 카페? 카페 차리고 싶어.’

【카페라니. 모처럼의 적격자인데…… 흔한 기회가 아니랍니다. 원한다면 위대한 영웅이 될 수도 있어요.】

‘아니, 그런 건 관심 없어.’

【검사, 마법사, 아니, 어떤 클래스라도 세계의 정점을 노릴 만한 능력을 드릴 수 있는걸요.】

‘내가 원하는 위치는 RPG 게임 초보자 마을에서 주인공을 배웅하는 여관 주인 정도인걸.’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군요. ……그래요, 당신의 바람이 그렇다면.】

* * *

…….

…….

다시 어둠이 나를 감싸고 눈을 뜨니 3년 전, 내 방 침대 위.

나는 이 기억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토록 깔끔하게 기억이 지워져 있었을까.

그대로 텔레비전 속 심리 테스트를 통해서 각성하고 약속대로 카페를 차리게 되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너무 많이 일어났지.’

나는 어둠 속에서 혼자 반짝반짝 빛을 뿜어내는 성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날처럼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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