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92)

85화

시스템은 분명한 의도를 갖고 있다.

저 성녀가 박애주의자라서 나와 권지운, 그리고 그…… 지존의 죽음을 막아 준 게 아닐 테다.

그렇다면 그 속에 숨겨진 의도는 뭘까.

【그런 건 없어요. 당신은 그냥 두 번째 삶에서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면 된답니다.】

“거짓말.”

【그래요, 거짓말이에요.】

“…….”

속에서 울컥 열이 치솟았다.

화내지 말자. 나는 어른이다, 어른……. 이 성녀를 재미없는 농담을 반복하는 갑 거래처 직원이라고 생각하자.

쟤는 갑이고 나는 을이다. 권지운의 목숨을 성녀가 틀어쥐고 있으니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너무하는군요. 아무런 조건 없이 그의 목숨을 살려 주었는데 그런 매정한 말을.】

헉, 생각도 읽나?

【언젠가 당신은 문 앞에 도달할 것입니다. 당신의 고양이가 당신을 인도하겠지요.】

“……진짜?”

미음이의 일상을 보고 하는 말 맞아? 인세에 완벽 적응해서 즐기고 계신데요.

【아하하, 오랜만에 잠에서 깨어나서 신나서 그러는 거예요. 이해해 주세요. 일곱 번째 에이전트의 역할은 제대로 달성할 테니.】

“문이란 건 뭔데?”

【궁극의 문. 우주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통로. 위대한 주인이 잠든 정원.】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의 설명을 업데이트했다.

의미심장충…….

판타지 RPG 게임 초반에 등장해서 초보자 주인공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하지만, 알아듣게 설명해 주지는 않는 성녀 캐릭터.

희뿌연 빛이 강해지며 짙은 어둠이 출렁였다. 이 대화가 거의 마지막에 달한 듯했다.

“너는 누구야?”

【성녀라면서요. 이렇게 불려 본 건 처음이에요. 이 캐릭터 굉장히 마음에 드네요.】

“시스템이 너야?”

【그렇다기보다는 인과율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이 세계에 접촉하기 위한 도구가, 당신들이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뭐, 내가 만든 거긴 하지만요.】

그녀가 아득히 멀어졌다.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들린다.

【정식으로 소개를 드리죠. 나는…….】

【하나이면서 전체. 전체이면서 하나.】

【세 개의 시간을 모두 관측하는 자.】

【문을 지키는 관리자, 그리고…….】

발음할 수 없는 이름이 귓가를 스쳤다.

어둠 깊은 곳에서 끓어오른 혼돈에 빛이 삼켜졌다.

아직은 안 된다. 꼭 물어봐야 하는 것이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내가 회귀한 이후에 미래가 바뀌는 이유는 뭐야? 나 하나가 돌아온 걸로 이렇게 큰일이 일어난 거야?”

【미안해요, 그건 말할 수 없어요. 나에게도 인과율의 법칙은 엄격하게 적용되거든요. 다른 신의 행동에는 개입할 수 없어요. 하지만 오늘 일은 당신 때문이 아니니 스스로를 탓할 필요는 없어요.】

“…….”

【그리고 그런 일이 지금 무슨 상관이겠어요? 지금은 우선, 가족의 생환을 기뻐하도록 하세요.】

…….

…….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거센 에테르의 파도.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권지운이었다.

“부길드장님!”

“리을 씨!”

나를 부르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렸다.

천천히 손을 뻗어 눈앞의 권지운을 붙잡았다.

그 순간 주위를 어지러이 떠돌던 에테르의 파도가 무너지고, 반투명한 막이 깨어진다.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 들어오다 걸음을 멈췄다.

숨 막힐 듯한 정적 속, 굳게 닫힌 눈꺼풀이 천천히 들린다.

“……?”

지금 상황이 곧장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권지운은 나를 보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하, 냉하게 생긴 얼굴에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 주마등……?”

와락.

나는 멍한 권지운을 세게 끌어안았다.

“어, 리을아, 왜 여기…….”

“오빠, 무사해서 다행이야, 흑…….”

그래, 성녀가 한 말 중 그 말은 맞다.

일단은 권지운이 살아난 데 기뻐하자. 다른 일은 그에 비하면 사소한 일에 불과하니까.

권지운이 그렇게 혼자 남아서 울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걸로도, 그거면……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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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랭킹, 길드 추노 금지. 현피는 던전에서

[잡담] 헌챈러들 소원 빌고 가쟈 (213)

추천: 887 / 비추: 0

작성자: 분홍젤리할짝

(사진)

앗! 당신은 하늘을 나는 신성한 긴꼬리불사조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추천을 누르면 불사조의 가호로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힐러구함: 힐러 좀 구하게 해주세요ㅠ

체리만두: 인!!

└체리만두: 챈!!

└체리만두: 대!!!

└체리만두: 박!!!!

ㅇㅇ: 올해 랭킹 탑100 진입기원

dlt***: 건강제일

ㅁㅁ: 스킬 열렙하게 해주세요

헌챈지키미: 헌챈하는 시간 줄이게 해주세요

└ㅇㅇ: 그건 여기다 댓달지 말고 폰끄면 이뤄지는거 아닌지,,,?

라임사랑단: 지구의 지배자는 슬라임이다 진레슬라임 1일 3 주물 바랍니다

└dlt***: ㅈㄴ광기;;

F급카페주인: 우유 좀 구하게 해주세요,,

제주길드1짱: 근데 사진 잘나왔다ㅇㅅㅇ ㅈㄴ잘찍었네ㅋㅋㅋㅋ 그날 긴꼬리불사조 실제로 봤는데 ㅈㄴ성스럽더라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

└힘없찐: 님 제주도 사는게 아니셨음..?

 └제주길드1짱: ㅇㅇ맞는데 서울 올일이 있었음 누가 불러서

 └제주길드1짱: 소원은 내 아이템 스틸해간놈들 던전에서 스킬 미스나길 기원

 └ㅇㅇ: 님 전혀 정화된거 같지 않은데여,,;;

뿌에엥: 백은길드 합격하게 해주세요,,!!!!ㅠㅠㅠㅠㅠ

└사랑해요은랑: 오잉? 백은길드 사람 뽑음?

 └뿌에엥: ㅇㅇㅇㅇ어제 공고떴어요 모집게 가보면 있음

 └cdt***: 헐 뭔일이지 원래 권석민 없어진 이후로 헌터 안뽑았는데

 └사랑해요은랑: 탱커도뽑냐 나도 지원할까

  └ㅇㅇ: 님은 헌챈닉넴보고 징그럽다고 서류컷될듯

  └cdt***: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랑해요은랑: 넘하네 권지운을 향한 나의 진심인데ㅡㅡ

  └ㅇㅇ: 그게 징그러운거거든요,,

* * *

외계 게이트며 연달아 일어난 권지운네 길드의 사건으로 한동안 헌터계는 떠들썩했다.

며칠이 흐르고.

매일 저녁 하던 뉴스 특집 방송이나 전문가 초빙 사건 분석 방송의 열기도 한풀 꺾일 무렵.

나는 한 가지 고난을 직면한 상태였다.

“권리을 씨, 앞으로 나와 주세요.”

“아, 네…… 네!”

아. 왼팔과 왼 다리가 동시에 앞으로 나왔다.

찰칵, 찰칵, 찰칵!

삐걱거리는 걸음으로 단상 위에 올라가는 순간 박수 소리와 함께 카메라 플래시가 빠르게 터졌다.

온화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뭐라 뭐라 말을 했는데 긴장한 탓에 잘 들리지는 않았다. 대충 좋은 말이었겠지.

내 앞으로 내밀어진 네모난 상장을 받고 다시 사진 세례.

“그럼 이것으로 제19회 헌터의 밤 기념 표창장 수여식을 마칩니다.”

오랜만에 정장을 입었더니 움직일 때마다 영 불편했다. 나는 여전히 삐걱거리는 몸짓으로 인사를 한 뒤 단상을 내려왔다.

끝났다…….

앞줄에서 권지운이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내게 쏠린다.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후다닥 걸음을 서둘러 권지운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냐면.

그날 권지운이 결계 안에서 깨어난 뒤, 나는 아스를 살피기 위해 한 번은 가게에 돌아갔지만 곧 다시 <백은 길드>를 향했다.

그리고 권지운과 많은 이야기를 했다.

정말로 많은 이야기를 말이다.

권지운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오빠가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다고 하자 그는 깜짝 놀라서 부정했다.

“매번, 헌터 따위에게 관심 보이지 말고 평범하게 지내라고 했잖아.”

“그건……. 헌터는 안하무인하고 제멋대로인 데다가, 상위 헌터의 가족을 노린 사기 수법도 횡행해서.”

“그렇게 말해 줬으면 됐을 텐데.”

“하지만……. 그래, 너한테는 그렇게 느껴졌겠구나. 미안하다.”

조금 더 투덜거리고 싶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화가 다 풀려 버려서, 울지 않는 척하느라 힘들었다.

“그럼, 리을아. 각성했다는 건 들었지만…… 그때 일은 어떻게 된 거지?”

“그건, 그러니까……. 일단 내 클래스는 카페 주인이야.”

“아, 그래. 그렇지.”

뜻밖에 무난한 반응을 하나 싶던 것도 잠시.

“요즘은 장사가 잘된다며? 네가 만드는 커피는 맛있으니까 앞으로도 잘될 거다.”

분명 덕담이기는 한데 어째 핵심을 빗겨 가는 느낌이다. 영혼이 담긴 듯 아닌 듯한 애매한 반응.

이 느낌 어째 기시감이 드는데. 구체적으로는 기유현에게 헌터 클래스를 밝혔을 때 같다.

권지운은 내 말을 내 직업 소개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아니, 갑자기 직업 이야기를 왜 꺼내겠어.

헌터 클래스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렸으면 좋겠다. 세상에 누군가는 나 말고도 카페 주인이라는 클래스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카페주인이 없다면 하다못해 식당 주인이라도 있겠지. 아마.

“그게 아니라, 헌터 클래스가 카페 주인이라고. F급 카페 주인.”

“어? 아, 그래. ……뭐?”

나는 회귀했다는 사실만 제외하고 이제까지 있었던 일을 대강 말했다.

회귀 사실은 시스템의 제한 때문에 말할 수도 없었거니와, 이미 없던 일이 되었다고 하나 내가 한 번 죽었다는 사실로 괜히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성녀니 시스템의 개입이니 하는 부분도 생략했더니 상당히 얼기설기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뭐, 대충…… 그렇게 된 거야.”

권지운과 터놓고 이야기한 건 좋지만.

가족끼리 진지한 분위기를 오래 유지하는 건 힘든 일이다. 빰이 간지럽다고 할까. 머쓱하고 민망한 느낌. 그래서 다른 화제를 꺼내려 하는데 권지운이 불쑥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상을 받아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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