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92)

88화

결계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나 <백은 길드>의 상황은 여전히 복잡했다.

적지 않은 수의 헌터가 길드를 그만둔 만큼 이대로는 길드 단독으로는 던전 공략이 불가능한 상태.

단독 던전 공략 여부는 소위 길드의 ‘급’을 나누는 중요한 기준이다.

더군다나 늘 권지운 옆에 붙어 있던 박희영 헌터가 그렇게 뒤통수를 쳤으니…….

권지운의 마음이 복잡한 것은 당연하겠지.

아, 박희영의 머리털이라도 다 쥐어뜯어 놓을 걸 그랬다. 그날도 마구 쥐어뜯었기는 했는데 그래도 분이 다 풀리지 않는다.

그녀는 <던전관리청>에 신병이 구금된 채 조사 중이다. 여러 혐의가 걸려 있는 모양이니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이제 새로 헌터를 모집해야겠지.”

권지운이 덧붙였다.

큰아버지가 세우고 키운 <백은 길드>를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서, 권지운은 그동안 새 헌터를 거의 모집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 상태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권지운은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문득 최세드릭을 떠올렸다.

<백은 길드> 소속이었던 헌터들이 옮긴 곳은 <씨앤엘 코퍼레이션>의 산하 길드다.

<백은 길드>의 사건 배후로 <씨앤엘>을 의심하는 것은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지.

다만 교묘한 행동 탓에 명확한 증거가 없을 뿐.

최세드릭도 이 일에 관여되어 있을까. 직접 만났을 때는 그렇게 음험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음, 당장은 알 수 없는 일이니 각설하고.

이렇게 좋지 않은 상황에서 나더러 <백은 길드>에 들어오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예전에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가까이 두려는 것뿐. 카페 주인인 내가 지금 <백은 길드>에서 해야 할 일이 있는 건 아니니까.

내가 거절한 이유도 바로 그래서다. 권지운과 가족의 정을 확인한 건 기쁘지만, 그가 책임질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하자 권지운은 씁쓸해하면서도 금방 수긍했다.

“하지만 네가 짐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단다.”

이렇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왜우웅(인간, 이게 뭐냐)!”

미음이의 외침에 나는 퍼져 나가는 상념을 끊어 냈다.

가방이 옆으로 쓰러지면서 안에 넣어 두었던 표창장이 빠져나왔다. 신나게 케이크를 먹어 치운 미음이와 라임이가 막 표창장 케이스를 건드리려던 찰나였다.

“잠깐! 권미음, 권라임, 멈춰! 스톱!”

“캬갸갸옭?!”

“뀨우웃!”

화들짝 놀란 미음이가 꼬리를 펑 부풀렸다. 그 틈에 나는 물티슈를 들고 후다닥 둘에게 다가갔다.

“뭐 묻히고 종이 만지지 말라고 했지!”

휴, 다행이다. 거의 크림 덩어리 상태인 미음이와 라임이가 종이에 유지방 발자국을 찍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다.

나는 꼼꼼하게 몸통과 발바닥, 입가까지 싹 닦은 뒤에야 동물들을 해방했다.

“뀨웃! 뀨우웃!”

“냐아아아(이게 그 표창장이라는 물건이냐)!”

표창장의 글자를 들여다보는 것도 잠시. 곧 둘은 표창장 케이스를 통통 튕기며 놀기 시작했다. 정말 예상 밖의 물건을 좋아하는 녀석들이다.

“너희 좀 조용히…… 에이, 뭐 됐다.”

나는 표창장 케이스를 튕겨 서로의 이마를 맞추기 놀이를 하는 동물들을 말리다가 내버려 두었다.

저러다 말겠지…….

대신 덩그러니 놓인 표창장을 들여다보았다.

퍽 민망했던 데다가, 과분한 상을 받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기분 좋긴 하네.

* * *

깊은 밤.

아스는 목이 마른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엷은 잠은 이미 저만치 물러난 채였다. 껴안고 있던 붉은색 슬라임 쿠션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잠깐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실 생각이었는데, 뜻밖의 풍경이 아스의 발을 잡아챘다.

“으음…….”

노란 전등이 은은한 빛을 발하는 1층 홀. 테이블에 얼빠진 얼굴의 여자가 엎드려 있었다.

이 시각까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아스의 의문은 그녀에게 다가서기도 전에 풀렸다. 쌔근쌔근,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테이블 위에는 ‘던전생태백과’라고 적힌 책이 놓여 있다. 책을 읽으려 하다가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다.

‘내버려 두면 알아서 일어나겠지. ‘

아스는 그녀를 무시하고 냉장고 앞을 향하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스…….”

“왜?”

잠시 기다렸지만 말은 이어지지 않는다. 그냥 잠꼬대였던 것 같다.

아스는 나른한 숨소리에 삼켜진 잠꼬대의 뒷말이 궁금해졌고, 또 그런 것이 궁금한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여자는 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에서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날씨는 벌써 초겨울. 난방이 꺼진 1층은 제법 쌀쌀해, 이대로 계속 잤다간 감기에 들 것이 틀림없었다.

“하아…….”

정말 얼빠졌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여자였다. 감기에 걸려 훌쩍거리는 모습을 봐도 기분이 나쁠 테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안아 2층 방으로 데려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멈칫거렸다.

거대한 나무가 드리운 이공간 안에서 그녀가 자신을 껴안았을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눈은 퉁퉁 부었지, 엉망진창인 꼴을 하고, 그런데도 자신을 걱정했다면서 등을 토닥였다. 어떻게 그렇게 무신경한지 모르겠다.

아스는 자신의 귓불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날 이후로 몸이 이상하다.

이 여자가 거리낌 없이 가까이 다가오거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때마다 호흡이 가빠지고 뺨이 달아올랐다.

그래서 아스는 최대한 권리을과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오늘만 해도 그리 성과는 없었지만.

“……읏.”

아니, 아니다. 자신은 아무 데서나 사람을 덥석 안아 대는 이 여자와는 다르게 그저 방으로 옮겨 주려는 것뿐이다.

정말 그것뿐인데…….

그런데도 잠든 그녀에게 손을 대는 것이 어쩐지 비겁한 일처럼 느껴졌다.

결국 아스는 권리을을 안아 들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났다. 대신 마력을 사용해 그녀의 몸을 공중에 띄웠다.

[접속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재접속을 위해서는 존재의 재구성이 필요합니다.]

눈앞에 경고 창이 깜빡거렸다. 아스는 눈을 살짝 찌푸린 다음 경고 창을 삭제했다.

외계 게이트가 닫히면서 그 여파로 아스는 ‘분리된 고리’가 되었다. 즉, 본체와 연결이 완전히 끊기면서 독립된 개체가 된 것이다.

자신에게 개별 화신체의 자아란 무의미하다. 원래라면 불안정함을 견디지 못하고 소멸을 택하겠지만…….

아스는 권리을의 몸을 둥둥 띄운 채 2층으로 향했다. 침대 위에 흔들림도 없이 내려놓을 때까지 그녀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아스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약한 인간의 몸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지.

‘내가 지켜 줘야겠다.’

8장. 홀스타인, 저지 그리고…… 황금삼각뿔소

표창장 일로 기유현과 통화를 했을 때 일이다.

전화를 끊기 전, 그가 불쑥 말을 꺼냈다.

-리을 씨,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언제 시간 되실까요?

“그럼 유현 씨 편하실 때 카페로 오세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밖에서 따로 뵙고 싶습니다.

아. 그가 나를 여러 번 도와줬는데 매번 카페로 오라고 하는 것도 그렇지.

그렇잖아도 한번 제대로 감사 표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침 잘됐네.

그렇게 약속을 정한 것이 오늘. 카페를 막 정리하자마자 딱 맞춰 기유현이 도착했다. 날씨가 제법 쌀쌀했던 만큼 나는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럼 아스, 나 갔다 올게.”

그런데 아스가 앞으로 달려 나오더니 기유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라?

부루퉁한 표정은 얼핏 보기에도 불만이 서려 있었다.

“아스, 왜 그래?”

“…….”

샤샤샥, 샤샥.

기유현이 왼쪽으로 발을 내딛으면 아스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갔다.

왼, 오, 왼, 왼, 오, 왼, 다시 오른쪽. 완벽한 타이밍으로 시야를 막아섰다.

올 퍼펙트 콤보!

우리 아스가 리듬 게임에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네. 이 민첩하고 날렵한 움직임이라면 어떤 오락실에 가더라도 위축되지 않고 현란한 솜씨를 발휘할 수 있겠다.

아니, 아니, 이게 아니라.

“유현 씨는 왜 또 애랑 장단 맞추고 있어요?”

홱 돌아보자 기유현이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미있어서 그만…….”

나는, 실은 키가 한참 작은 까닭에 조금도 기유현을 가리지 못한 채인 아스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스, 무슨 일 있니?”

“오늘 언제 와?”

“글쎄……. 좀 늦어질 것 같긴 해.”

지금은 이른 저녁 시간이다. 식사를 하고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 등을 고려하면 늦은 밤이 되지 않을까.

아스의 얼굴 위로 고뇌가 스쳤다. 이 말을 해야 하는데, 하자니 자존심이 상한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눈을 맞추고, 아스 내면의 갈등이 결론 나기를 기다렸다.

치열한 접점 끝에 이긴 것은 말하는 쪽이었나 보다. 눈을 한번 질끈 감더니 입술을 뗀다.

“누나……!”

“어, 어어?”

아스가 나를 누나라고 부른 건 처음이다. 전에는 아무리 부탁해도 안 들어주더니.

그동안 잘 먹고 푹 쉬어서 보기 좋아진 얼굴로 하는 누나 소리는 너무 귀여웠다. 아스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왜우웅(잘한다, 잘한다)!”

“뀨우우!”

놀리는 건지 응원하는 건지 모를 관객을 뒤로 한 채 아스가 말을 이었다.

“누나, 오늘 일찍 오면 안 돼?”

“으…… 응?”

얘가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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