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92)

89화

귀엽긴 엄청나게 귀여운데 당황스럽다.

“혼자 자려니까 무서워서…… 누나가 일찍 오면 좋겠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피하는 아스.

하긴 검은 점액질 덩어리의 습격을 받고 며칠밖에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아스가 비록 인간이 아닌 무언가, 황혼 어쩌고 마왕(자칭)이라고 해도 이렇게 어린애인데, 무섭겠지.

나는 결국 일찍 들어오겠다고 약속한 뒤 길을 나섰다.

“냐아아(너무 무리수 아니냐)…….”

“뀨우, 뀨우우…….”

“왜오옭(작은 녀석, 연기는 형편없구나).”

등 뒤로 갤러리의 엄격한 비평이 들려왔다. 냉정하군.

* * *

카페를 나와 둘만 남자 기유현은 긴장한 기색이었다.

늘 그렇듯 생글생글 웃고는 있지만 어쩐지 뻣뻣한 태도로, 가게 앞에 세워진 크고 비싸 보이는 차로 나를 안내했다. 차는 기유현이 직접 운전했다.

“리을 씨, 왜 그러세요?”

“아. 운전을 잘하시는구나 싶어서요.”

늘 멋대로 훌쩍 나타났다가 훌쩍 사라지니까, 이렇게 운전대를 잡은 모습은 낯설게 느껴졌다.

“오늘은 조용히 움직이고 싶어서, 신경을 좀 썼습니다.”

으음.

왜 주차권을 입에 물고 후진 어쩌고가 오랫동안 회자되는지 알겠다.

핸들을 잡고 매끄럽게 차를 운전하는 기유현의 옆모습은 얼핏 보기에도 멋졌다.

살짝 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겨 반듯한 이마를 드러냈고, 옷 역시 그의 큰 키에 잘 어울렸다.

하려는 말이 대체 뭐기에 이렇게 신경을 쓴 걸까. 그가 나를 따로 불러내서까지 할 이야기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무슨 이야기를 했었더라. 그게 분명…….

……아.

나는 한숨을 삼켰다. 커다란 손이 내 손을 덮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귓가에 닿은 목소리.

“그냥, 이런 사람 때문에 리을 씨가 아파할 필요는 없어요.”

손에 닿은 온기가 몸 전체로 퍼지는 느낌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 그 안에 담긴 염려가 마음을 크게 건드렸다.

이런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듣는 건 너무 파괴력이 크다. 아직 미남 면역이 생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흐르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 했는데!

심장이 크게 쿵쾅거렸다. 이대로라면 기유현의 얼굴을 마주 보기도 힘들 것 같다.

나는 삐걱거리면서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생각, 다른 생각…… 음, 그러니까…….

그러고 보니 나는 장롱 면허다.

면허를 따긴 했는데 어차피 회사는 대중교통으로 다니다 보니까 연습할 시간이 없었다.

가만, 내가 면허를 언제 땄더라. 분명 그게…….

“……아.”

“리을 씨,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좀.”

“네.”

맞다, 나 회귀했지.

운전면허를 딴 건 회귀 이후 시점이다. 그러니까 즉, 면허 다시 따야 한다.

“……운전면허 따야 한다는 생각 중이었어요.”

약간 서글퍼졌다.

내가 운전면허를 다시 따야 한다는 사실에 시무룩한 사이, 차는 도로를 부드럽게 달려 나갔다.

헌터의 밤 기간이라 이른 저녁부터 거리는 혼잡한 상태였다.

헌터의 밤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1년에 한 번 있는 헌터들의 축제 비슷한 행사였다.

느닷없이 균열이 터져 대는 상황에서도 빠지지 않고 매해 치러졌는데, 이는 한국은 안전하다고 알리는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제일 인기 있는 행사는 <헌터 마켓>의 바겐세일이다. 세일 상품을 사기 위해 전날 밤부터 줄을 선다나 어쩐다나.

그밖에 각 길드에서 자체적으로 하는 행사 등으로 차창 밖으로 긴 줄이 보였다.

검은 점액질 덩어리로 혼란에 빠졌을 때와는 무척 다른 거리 풍경이다.

혼잡을 피해 기유현이 차를 향한 곳은 외곽에 위치한 한 레스토랑이었다. 미리 예약을 했는지 직원이 곧장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레스토랑은 절대 특별한 일이 아니면 오지 않을 것처럼 번쩍번쩍한 분위기여서, 괜스레 어깨가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 좋은 완전히 분리된 방.

안내받은 자리에 앉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음식이 나왔다. 모두 맛있어 보였고, 특히 신선한 해산물 요리가 마음에 들었다.

음, 이야기는 밥을 먹고 하는 게 낫겠지. 카페 영업을 마치자마자 곧장 왔더니 슬슬 배도 고프고.

음식은 모두 맛있었다. 코스 순서대로 나오는 요리를 하나씩 맛보는데, 기유현이 불쑥 말했다.

“한이성 헌터가 리을 씨에게 고맙다고 전해 달라더군요.”

“네? 왜요?”

나는 사람 좋게 생긴 한이성 헌터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 딱히 감사받을 일을 한 기억은 없었다.

“한이성 헌터는 권지운 헌터하고 사이가 좋습니다.”

하긴 전에 봤을 때 꽤 친해 보였지.

“그렇군요……. 그럼 둘이 친구인가요?”

“친구……라기 보다는.”

잠시 단어를 고르던 기유현이 말을 이었다.

“헌터로서 길드에서 오래 일을 하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됩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는 사실을요. 한이성 헌터한테는 권지운 헌터가 그 얼마 없는 상대인 셈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감사받을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생각지도 못한 말에 머쓱해 하는데, 물로 목을 축인 기유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리을 씨, 그날 결계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 그건요…….”

그 의미심장충…… 아니, 성녀를 만났다고 말해도 될까?

기유현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성녀가 한 말들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만큼 그대로 말하기가 저어되었다.

잠시 고민에 빠지는데 기유현이 얼른 말을 거뒀다.

“아니, 미안합니다.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요?”

“리을 씨에게 이걸 먼저 묻는 건 좀…… 비겁하게 느껴지는군요. 제가 드릴 말씀을 한 뒤에 다시 이야기하죠.”

“네, 그러세요.”

“…….”

“…….”

잠시 정적이 내려앉고.

드디어 본론을 꺼내려는 듯, 빛을 머금은 새까만 눈이 똑바로 나를 향했다.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표정에 덩달아 나까지 긴장되었다.

기유현이 입술을 달싹거리다 뭐라 말하려는 찰나였다.

똑똑, 달칵.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와 디저트를 서빙하고 다시 나갔다.

마치 노린 듯한 완벽한 타이밍!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에 일부러 들어오기도 힘들 것 같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끊겼다. 기유현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대신 앞에 놓인 접시를 밀었다.

“이거 드셔 보세요. 고소하고 맛있습니다.”

나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나 뭐 하나 까먹고 있는 것 같은데.

“유현 씨, 이건 어때요? 이건 무슨 맛이에요?”

기유현이 별 의심 없이 접시 위 디저트의 맛을 보았다.

“새콤하네요. 소스에는 유자가 들어가 있는 것 같고요.”

“…….”

“……왜 그러세요?”

“유현 씨,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저…… 맛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미각에 문제가 있었던 적이 있나요?”

그러나 대답을 듣지 않아도 눈앞의 기유현은 맛을 느끼는 데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아니요. 그런 적은 없는데……. 왜 그러세요?”

그때, 머릿속에 어느 고양이의 말이 떠올랐다.

“이 인간, 맛을 거의 느끼지 못할 거다.”

“미각이 상당히 약해진 것 같군.”

그래, 이 이야기를 한 건 미음이다.

달리 말하면,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고 미음이가 멋대로 떠들어댄 것뿐.

“…….”

“리을 씨?”

나는 여기 없는 어느 축생을 향해 속으로 원망을 쏟아 냈다.

권미음, 두고 보자. 집에 가면 죽었어!

* * *

“저는 반대입니다. 재고를 부탁드립니다.”

기유현의 말에 고개를 저은 이는 한이성이었다.

“아니. 한이성 헌터의 걱정은 알겠지만 내 생각은 변함없어. 오늘 리을 씨에게 말하려고 해.”

“길드장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기유현은 이 대화를 떠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알기는 개뿔. 더 확실히 말했어야 했다.

방해하지 말라고.

* * *

“사람이 없는 곳이 이야기하기 편하겠지요.”

식사를 마친 뒤, 그렇게 말한 기유현이 다시 차를 몰았다.

응? 방금 레스토랑도 사람 없고 조용하지 않았던가?

내 시선에 담긴 의문을 알아차린 기유현이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쥐가 있는 듯해서.”

말을 끝내자마자 차가 크게 유턴한다.

어? 방금 우리 장르가 바뀐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요?

차는 빠르게 도로를 달려 시내로 들어섰다. 그리고 절묘한 운전 솜씨로 길을 빙빙 돌더니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오르막길을 탔다.

점차 건물이 줄어들고 이윽고 완연히 산길이 되었다. 차는 잠시 길을 더 달리다 전망대 앞에서 멈췄다. 산 위에서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엷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전망대. 제법 많은 사람이 전망대 주위에 있었다.

“맞다. 오늘 불꽃놀이 한다고 했죠.”

헌터의 밤 기념 불꽃놀이가 오늘이었다.

불꽃이라고 해서 진짜 화약을 터뜨리는 건 아니고, 마법사 계열 헌터들이 마법으로 만들어 낸다.

이 역시 우리나라에 고등급 헌터가 많다고 과시하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벌써 몇 년째 계속된 나름 전통 있는 행사다.

에테르가 빚어낸 화려한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는 장면은 꽤 장관이기 때문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 것도 이해는 된다. 특히 오늘은 더.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번 불꽃놀이를 담당한 사람은 미남으로 유명한 랭킹 17위 헌터 오서호.

랭커가 직접 이런 여흥 거리를 맡는 일은 드물다 보니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나 오서호의 사진이 박힌 물건을 든 사람이 많이 보였다.

조용히 이야기하기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어차피 다들 신나서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이쪽이 이야기하기 편할지도 모르겠다.

도무지 저 얼굴은 면역이 생기지 않았으니까. 조용한 곳에서 기유현과 마주하는 건 퍽 긴장되는 일이다.

게다가 회귀 전에는 이 불꽃놀이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아. 딱 한 번 봤기는 한데. 심야의 회사, 창밖의 빌딩 틈새로 조그맣게 보인 것이 전부였다.

‘서글픈 기억이네…….’

그런 만큼 나는 약간 들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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