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92)

91화

* * *

그래서 다시 지금.

기유현은 정체를 밝힐 요량으로 리을과 만날 약속을 잡았다. 우습게도 긴장되는 와중에도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느슨한 관계와는 다른, 오직 그녀를 만나기 위한 목적의 만남이기 때문일까.

그녀가 좋아할 법한 음식을 파는 식당을 예약했다. 분위기가 차분하니 식사를 마치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 좋을 것이다.

그러나 리을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맞이하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버렸다.

기유현이 입을 여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속였다고 화를 낼까. 그렇다면 아직 괜찮다. 그녀의 화가 풀릴 때까지 얼마든지 사과할 테니까.

하지만…….

만약 자신을 경계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편안한 미소를 다시 보지 못하면, 그녀가 자신을 낯선 존재를 보듯 하면. 상상만으로도 까마득한 긴장이 가슴속을 옥죄는 것 같다.

겨우 결심을 굳히고 입을 열려는 순간.

디저트를 서빙한다며 직원이 문을 두드렸다.

벽 너머 멀지 않은 곳에 한이성의 기척이 느껴졌다. 기유현의 감각을 속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 굳이 미행을 계속하는 것은 제 뜻을 알아 달라는 시위인가.

한이성은 리을에게 정체를 밝히는 데 격하게 반대했다. 그가 반대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애써 쌓아 온 느슨한 관계가 어그러지는 것을 염려하는 걸 테지.

기유현은 한이성의 방해가 차라리 반갑게 느껴지는 자신을 인정했다.

여기는 방해가 끼어들어 이야기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군.

그런 핑계로 차를 몰아 어둠에 잠긴 전망대를 향했다. 이번에야말로 말할 자신이 있었다. 리을의 하얀 뺨에 불꽃이 빚어낸 빛이 비치는 것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밤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천천히 흩날린다. 커다란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이며 자신을 보았다. 추위에 곱은 손가락으로 캔 음료를 문지르며 하얀 숨결을 뱉는다. 그 모든 모습이 또렷하게 눈에 아로새겨졌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재촉하기를 몇 분.

기유현은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이렇게 우유부단해 본 적이 없었는데,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 다음에. 다음번에 만날 때 이야기하자.

괜한 말로 이 부드러운 분위기를 어그러뜨리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들었다. 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바라보는 눈이 경계심으로 가득 차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대로 평범한 외출을 즐긴 거다.

하려던 말을 삼키고 추울 테니 이만 돌아가자고 말하려는 때, 리을이 불쑥 말했다.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하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유현 씨가 랭킹 1위 무원이라는 거라든가?”

기유현은 멍하니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얼이 빠져 내뱉은 말은 한 마디가 고작이었다.

“……네?”

* * *

자랑스럽게 말할 일은 아니지만, 나는 눈치가 정말 없는 편이다.

그런 만큼 처음부터 기유현의 정체를 짐작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정말로 비실비실한 말단 헌터인 줄 알았으니까. 또 김덕이 할머니의 공방에서 화재가 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냥 생각보다 강하고 시간이 많은 헌터려니 여겼다.

하지만 곧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하얀 빛을 이용해 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유현의 스킬은 강한 데다가 활용도가 높았다.

이 정도 능력이면 유명할 법도 한데, 기유현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청라 길드>의 쌍둥이 헌터가 기유현을 잘 따른다. 한이성 역시 기유현에게 어딘가 깍듯한 기색이었지. 결코 길드의 말단 헌터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애초에, 여느 소규모 길드도 아닌 <청라 길드> 소속 말단 헌터가 저렇게 자유자재로 시간을 쓸 수 있나? 헌터도 일종의 고용 계약 아닌가?

결정적으로 의심을 굳힌 건 <백은 길드>에서 권지운이 위기에 처했을 때, 던전관리청장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무슨 던전 개발 문제로 제주 지사에 머물던 청장을 움직이게 할 만한 헌터라…….

생각을 해 보자. <청라 길드> 소속의 강자인데 신상이 알려지지 않은 헌터라고는 딱 한 명뿐이다.

힘숨찐 유행의 선두주자, 랭킹 1위 무원.

더군다나 절대 그냥 지나가는 말단 헌터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의미심장한 말들. 또 티 나게 말을 돌리던 모습 하며…….

그렇게 한 번 가설을 세우고 나니 모든 증거들이 명명백백했다.

줄곧 탑의 자리를 지킨 최초이자 최고의 S급. 완전히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 같은 무원.

자주 카페에 얼굴을 들이미는 이 사근사근한 남자 기유현.

다만 이 둘의 이미지가 너무 달라서 연결 짓는 데 오래 걸렸을 뿐이다.

기유현은 신상을 감추는 데 소질이 없거나, 애초부터 별로 감출 생각이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리 티를 내고 다니겠는가.

이런 내 생각을 읊어 주니 기유현은 엷은 한숨과 함께 힘이 들어간 미간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내내 떠돌던 엷은 긴장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었다. 허탈한 듯도 긴장이 풀려 안도한 듯도 한 복잡한 표정이었다.

“리을 씨.”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기유현이 뒷말을 이었다.

“알고 있었으면…… 왜 말하지 않은 겁니까.”

“그거야, 개인의 프라이버시니까요?”

“…….”

어이없어하는 시선이 뺨에 닿았다.

왜, 머리 모양을 바꾸거나 안경을 쓰는 것만으로 동일인물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세계관 있잖아.

저렇게 티가 나는데 아무도 기유현이 무원이라고 눈치 못 채는 걸 보니, 그런 말 하지 않는 약속인 줄 알았지.

“……속였다고 싫어하실 줄 알았습니다.”

“에이, 그럴 리가요.”

나 역시 그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은 있으니까.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게 자신의 비밀을 줄줄 밝히는 쪽이 이상하고.

게다가 막상 알고 나니 별로 충격적이지 않았다.

강하고 나를 잘 도와주고, 갑자기 나타났다 또 갑자기 사라지는 사람이란 건 변함없으니까. 그의 정체가 무엇이건 바뀌는 건 별로 없잖아.

뭐, 언젠가 상황이 되면 밝히려니 생각했고, 그때까지는…….

“세상의 주목을 피하고 싶어 하는 심약한 랭킹 1위를 위한 사회적 배려 같은 거죠.”

“사람을 무슨 개복치처럼…….”

기유현이 착잡하게 뇌까렸다.

“그런데 왜 갑자기 밝히려고 마음먹었어요?”

밤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보리차 캔의 온기는 식은 지 오래였다.

주차해 둔 차를 향해 걸으면서 기유현은 자신의 장갑을 건넸다. 사양하지 않고 받아 꼈는데 커서 공간이 남았다. 나는 장갑의 남는 부분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덧붙였다.

“이유가 있어서 감추려던 거 아니었어요?”

“저는 사실, 시간을 거슬러 왔습니다.”

“읍, 컥! 쿨럭, 쿨럭!”

“……괜찮으세요?”

이번에는 진짜 놀랐다.

너무 놀라 사레가 들린 내게 기유현이 제 몫의 보리차 캔과 손수건을 건넸다. 사양하지 않고 목을 축였다. 죽는 줄 알았다.

기유현도 회귀자라고?

얼이 빠진 내게 기유현이 차문을 열어 주었다. 얼결에 올라타기는 했는데 머릿속은 핑핑 돌았다.

“그러니까…… 유현 씨가 회귀자라는 뜻이죠?”

“믿어 주시는군요.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실 줄 알았는데.”

“그야…….”

회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다.

기유현이 갑자기 판타지 소설에 심취해 회귀자 콘셉트를 잡았을 가능성보다는, 그 역시 나처럼 회귀 전 과거를 기억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겠지.

“원래는 이 사실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내가 그의 정체를 뜻밖에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자 회귀자라는 사실까지 말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이어진 이야기는 히터를 틀었는데도 오싹 소름이 돋을 만한 이야기였다.

3년 뒤, 대던전 《어비스》에서 마신이 부활한다.

기유현은 마신을 막으려 하다가 마지막 층, 《궁극의 문》에 도달한 순간 과거로 되돌아왔다.

“그건…… 언제였어요? 날짜가, 언제쯤이었어요?”

기유현이 말한 날짜를 듣고 나는 놀랐다.

‘나하고 같아.’

회귀 전, 내가 죽은 날과 같은 날이었다.

내가 회귀했기 때문에 기유현도 회귀한 걸까? 아니면, 기유현에게도 성녀가 손을 쓴 걸까?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된 거 나 역시 회귀자라는 사실을 밝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바로 알았다. 시스템이 나를 제지하는 거다. 꺼림칙하면서 동시에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왜 나만!

설마 인과율이라는 거 등급 차별하나? F급이라서 그래?

“인과율의 제지 때문에 미래의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기유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마신이 부활한 배후에는 <별의 지혜 교단>이라는 미친 종교 집단이 있었다. 지금도 그 놈들은 마신의 부활을 획책하고 있다.

갑자기 세계관 너무 확장되는 거 아닌가?

“리을 씨는 이미 많은 사건에 휘말렸죠. 나는 배후에 교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심하라고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그렇군요…….”

3년 뒤에 그렇게 큰일이 일어난다라. 그리고 기유현은 그 마신의 부활을 막으려 한다고도 말했다.

아직은 멀게 느껴지면서도 꺼림칙함이 남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하나.”

“네?”

“아까, 미각을 느끼지 못하냐고 물었죠.”

“그게, 죄송해요. 괜한 이야기를 드려서.”

우리 집 고양이가 그런 소리를 하는 바람에. 머쓱한 마음에 황급히 손을 내젓는데 기유현이 덧붙였다.

“확실히 제 미각은 멀쩡합니다만……. 마신의 게이트, 《궁극의 문》에 도달했을 때 제 일부가 문 너머로 흘러 들어갔다고 느낍니다.”

“…….”

“마신의 게이트를 봉인할 때 기억이 불완전하기도 하고요. 각성 전과는 다른 자신이 되었고, 아무리 해도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단 생각이 들어요. 일종의 상실감이라고 할까요.”

왜일까. 퍽 진지한 기유현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문득 커피를 마셨을 때 그의 만족도 막대가 떠올랐다.

어떤 메뉴를 먹어도 100%에 달하지 않고 98%에서 멈추던 그 막대.

터무니없는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채워지지 않던 2%가 그가 말하는 사라진 부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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