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192)

92화

“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죠.”

“어떤 말이요?”

“각성했다고 아예 다른 존재가 되는 건 아니라는 말.”

아. 던전 식물 농원에서 정화목을 사서 돌아오던 길이었나. 주신우, 주신희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마음이 놓였어요. 저에게도 다른 사람이 된 게 아니라고 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그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인 걸요.”

정말로 그렇다. 그의 입을 통해 내가 한 말을 다시 들어도 너무도 별것 아닌 말이다. 길 가는 사람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같은 말을 할걸.

“그럴 수도 있겠죠.”

기유현은 선뜻 내 말에 긍정했다. 그리고 곧장 덧붙였다.

“하지만 실제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리을 씨뿐이에요. 그래서…….”

떨리는 숨에 목소리가 잦아든다. 나는 고개를 돌려 가만히 기유현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리을 씨한테 말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적어도 리을 씨한테는 솔직히.”

“…….”

흐릿하다? 존재감이 없다? 아까는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을까.

나를 보는 남자가 너무도 또렷하게 보인다. 어두운 곳에서도 빛을 머금은 눈, 온도가 느껴지는 듯한 시선, 잘 빚어진 턱, 부드럽게 다물린 입술까지도.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건 엄청나게 아름답게 빚어진 남자를 마주할 때의 반사적인 긴장과는 달랐다.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 낯설었다.

확실히 나는 눈치가 없다. 눈치가 없기는 한데…….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긴장이, 혼자서 마신의 게이트를 봉인했다고 하는 남자에 대한 부채감이나 염려라고 착각할 정도로 눈치 없는 건 아니라는 게 문제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돌아가요. 아스가 빨리 들어오라고 난리였는데.”

“하하, 그래요.”

기유현 역시 몸을 돌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의 시선이 내게서 멀어진 뒤에야 겨우 숨 쉬기가 편해졌다.

할머니가 남자가 안타깝게 느껴지면 답도 없으니 도망치랬는데.

할머니, 나 좀 망한 것 같아요…….

가게를 향해 차를 달리는 동안은 서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긴장되지만 거북하지는 않은 정적 속에서 겨우 차가 가게 앞에 멈추었다.

후다닥 차문을 열려고 하는데, 서두른 탓인가 오히려 잘 열리지 않았다. 애꿎은 잠금장치만 당기는데 기유현의 상반신이 훅 가까워졌다. 놀라 고개를 뒤로 젖혔다.

“리을 씨, 안전벨트.”

“……아.”

달칵. 기유현이 내 쪽으로 손을 뻗어 제대로 풀리지 않은 안전벨트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 웃으며 덧붙였다.

“리을 씨, 제 제안은 잘 생각해 보세요.”

* * *

“후, 아, 하아…….”

나를 내려 주고 떠난 차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무렵,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자 겨우 마음이 차분해졌다.

굳이 손을 대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뺨이 뜨겁게 달아오른 것이 느껴졌다.

<카페 리을>은 바로 앞이었지만, 이대로 들어갈 순 없었다. 지금 내 얼굴은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던 사람이었으니까.

우리 집 동물 식구들의 넘치는 호기심에 대답해 줄 말이 곤란했다. 잠시 뺨만 식히고 들어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가게 앞의 골목을 한 바퀴 돌려는 무렵이었다.

“……어?”

나는 묘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길의 저편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무척 아름다운 외모였다. 성별도 나이도 분명하지 않았으나, 시선을 끄는 강렬한 매력이 느껴졌다.

다만 아무런 표정 없이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는 저 눈은 섬찟하다. 으레 인간의 눈이 자연스레 담기 마련인 감정을 비워 낸 눈은 공허하게도 보였다.

뺨은 가게에 들어가서 식혀야겠다. 얼핏 봐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꺼림칙한 느낌에 얼른 카페 문을 열려고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꼭 누가 내 몸을 마비시키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이상한 사람이 순식간에 나와 거리를 좁혔다.

뺨에 손이 닿았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뺨에 소름끼치는 차가움이 느껴졌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수상한 사람의 긴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렸다가 다시 멀어졌다.

“……너구나.”

네?

“열쇠의 주인. 궁극의 문에 도달할 자.”

……네?

대체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은데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하릴없이 이 이상한 사람의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아, 나는 무슨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 하하하……. 왜 이제야 알아차렸을까! 이변은 이미 시작되었는데. 그러니 이번 회차는 무한 나선에서 벗어난 독립된 고리가 되었구나. 그래, 그 노인이 살아남았을 때부터, 아니 더 이전부터 이미 이변은 시작되었던 거야.”

내가 듣거나 말거나 멋대로 뜻도 모를 말을 떠들어 대길 한참.

유리 안구를 박아 넣은 듯 공허하던 눈에 이채가 돌았고, 이 이상한 사람의 감정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환희다.

그는 환희에 차 몸을 떨었다.

퍼뜩 머리를 스친 것은 조금 전 기유현이 한 말이었다. 미친 종교 집단이 나타날 거라는 말.

바로 알았다. 이 사람이다. 자기 생각에 도취한 눈동자가 맛이 가 있었다.

이상한 사람은 알 수 없는 말을 한참 더 중얼거리다가 환하게 웃었다.

히익. 이런 곳에서 포교 활동이라니 정말 미친 사이비 종교다웠다. 도망치고 싶은데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나를 경계하는 거니? 걱정하지 말렴. 드디어 나타난 열쇠의 주인에게 내가 해를 끼칠까.”

다시 손이 내 눈가를 스쳤고 압박감이 약간 줄어들었다. 나는 겨우 억눌린 숨과 함께 말을 토해 냈다.

“그게…… 뭔데요.”

그건가? 너는 메시아 어쩌고니까 종말에 대비해 돈을 내거나 조각상을 사라는 패턴?

“지금은 몰라도 된단다. 네가 문에 도달하는 이상, 자연히 다시 만나게 될 테니.”

“아니, 그런 거 모른다니까요!”

최대한 날카롭게 말하려 했지만 떨리는 말끝이 숨에 삼켜졌다. 어느새 흐른 땀이 눈으로 들어가 따끔거렸다.

눈을 꾹 감았다 뜨자 나를 붙잡은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 * *

우당탕!

“헉, 헉…….”

허겁지겁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스와 동물들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느냐, 왜옹!”

미음이의 태평한 목소리를 들으니 겨우 집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나는 손등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훔친 뒤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어, 추워서 뛰어오느라.”

“뭐? 그 인간 그렇게 안 봤는데 매너가 없구나. 데이트를 하고 집 앞까지 데려다주지도 않다니!”

“데이트?”

아스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미음이는 아스를 향해 앞발을 날리며 덧붙였다.

“그럼 둘이 뭐 하러 간 거라고 생각한 거냐, 왜오오옹!”

“……흥.”

데이트도 아니었거니와 기유현은 이 앞까지 데려다줬다.

아니, 그보다 아스는 언제부터 미음이 말을 알아들은 거지?

태클 걸 내용이 한 가득이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방금 있었던 일이 소름끼쳐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야, 개무서워…….’

기유현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내게 제안을 하나 했다.

그 제안이란, <카페 리을>을 특수효과가 있는 음료를 파는 카페라고 정식으로 밝히는 것이었다.

<던전관리청>에 요청하면 특수 업종으로 등록할 수 있다고 한다. 대신 불미스러운 일에 대비해 그의 길드에서 카페를 경호하겠다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어찌저찌 별 탈 없이 카페를 운영했지만, 어디서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예상 외로 너무 인기를 끌었다.

주5일제(휴식이 5일이란 뜻이다)의 꿈은 이미 지켜지지 못했고, 이제까지 무탈했다고 앞으로도 괜찮다는 보장은 없는 상황.

‘하지만…….’

내가 내키지 않아 하는 표정이자 기유현이 덧붙였다.

“손님이 너무 많은 게 싫으시면 예약제로 정해진 인원만 받을 수도 있고요.”

아. 그 생각은 못 했네.

내게 손해가 되는 제안은 아니다. 오히려 기유현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는 제안이지.

그렇게 묻자 기유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리을 씨의 커피를 매일 안정적으로 마실 수 있다면 그게 이득이죠.”

하지만 느긋하고 편안한 카페에서 한 걸음 더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일단 그의 제안을 보류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곧장 미친 사이비 종교맨이 나타난 것이다.

단순히 불쾌한 포교를 당했다고 넘기기에는, 그 환희에 찬 표정이 너무 꺼림칙했다.

나는 당장 핸드폰을 꺼내 기유현에게 카톡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손이 덜덜 떨리는 통에 제대로 입력이 되지 않았다.

후우, 진정하자. 늦은 시각이니까 일단 자고, 내일 아침에 연락해서 제안에 대해 자세하게 물어봐야겠다.

나는 오타투성이의 입력창을 그대로 끄고 일어섰다.

“나 자러 갈게.”

“뀨우우!”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나는 곧장 기유현에게 연락을 취하지는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엥……?”

* * *

권리을이 충격에 빠진 바로 그때.

이세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긴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머리가 맑았다.

지끈거리는 두통도, 기이한 목소리도 사라졌다. 그래서 이세인은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한 머리로 자신의 주위를 바라볼 수 있었다.

고요한 <씨앤엘 코퍼레이션>의 길드장실.

이제껏 그녀가 이룬 것들이 보였다.

번쩍번쩍한 고층 건물, 수많은 표창, 굳건한 지위, 명성, 자신의 말을 따르는 수많은 헌터들…….

그리고 가족이 없는 그녀에겐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최세드릭과 최로나.

최로나의 병실에 들른 지 얼마나 되었지? 최세드릭과 차분히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이미 충분히 성공을 거둬들였는데 왜 그렇게 초조했을까. 근원 모를 갈증에 쫓기느라 정작 소중한 것을 놓치지는 않았나.

“……그만두자.”

그렇게 결심한 이세인은 자리에 일어섰다.

그녀의 손에는 <던전관리청>에서 보낸 참고인 출석 요구서가 들려 있었다. <신크라운 파>와의 관계를 소명하라는 내용이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아직 수습할 수 있다. 계획을 그만두고, 인정할 부분은 인정한 뒤 길드 운영에나 집중하자.

달칵.

그때 문이 열렸다. 문 앞에는 그동안 행방이 묘연하던 이세인의 비서가 서 있었다.

“……이온.”

하늘의 게이트가 닫히고 얼굴 없는 자 □□□□□의 힘이 비활성화되고도 며칠이 흘렀다.

이세인은 비서가 사라졌음을 알아차리고도 굳이 찾지 않았다. 늘 믿음직한 비서였는데 언젠가부터 꺼림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온, 그동안 어디 있었어?”

때문에 이세인의 말은 다소 뻣뻣하게 흘러나왔다.

“이세인 대표님.”

이온이 스르륵 소리도 없는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눈앞의 비서는 더할 나위 없이 환하게 웃고 있다. 누구라도 시선을 빼앗길 아름다운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가 다시 드러났다.

흠칫.

이세인은 등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가만, 이온이 원래 이런 얼굴이었나? 어떻게 생겼었지? 어째서일까. 눈앞의 사람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아니, 애초에 인간이기는 했나?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실패하셨군요. 이번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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