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그 계획은…… 이제 됐어. 이온, 그냥 전부 관두자. 지금이라면 아직 수습할 수 있어. 수습할 수 있으니까, 그냥…….”
“어리석은 인간 같으니. 이런 일 하나 똑바로 처리하지 못하는군.”
“뭐? ……욱.”
갑자기 변한 말투에 의문을 표할 틈은 없었다. 이세인은 헛구역질이 나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눈앞에서 이온이라는 인간의 형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니, 저런 것이 인간일 리가 없다. 저런 끔찍한 것이. 대체 무슨 일이…….
사고가 이어지지 않는다. 허물어지는 형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의 섬세한 결을 사포로 문지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수 초의 시간이 흐른 뒤, 이온은 반쯤 녹아내린 부정형의 검은 덩어리로 화했다.
“……!”
그 모습은 며칠 전 도시를 습격한 검은 점액질과 꼭 닮아 있었다.
이세인은 문득 어떤 이름을 떠올렸다.
……얼굴 없는 자.
실로, 눈앞의 물체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으, 으아악! 저리 가!”
철퍽, 소리와 함께 검은 덩어리가 허물어지더니 그대로 이세인을 덮쳤다.
‘호신용 아이템을, 써야…….’
이세인의 클래스는 보조계 마법사. 부족한 물리력을 보완하기 위해 늘 간단하게 발동하는 호신용 아이템을 지니고 다녔다.
그러나 그녀가 손을 쓰기도 전에, 반쯤 녹아내린 이온에게 닿은 아이템이 녹아 없어졌다.
“윽……!”
저항은 역부족. 바닥에 쓰러진 이세인은 마구 손을 뻗다가 잡힌 화병을 그대로 집어던졌다.
쨍그랑!
커다란 파열음이 났다. 집어던진 화병이 정면으로 이온에게 맞았다.
“헉, 허억……. 헉……. 됐나?”
흠칫. 이온이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안도한 것도 잠시, 녹아내려 반만 남은 얼굴이 웃음을 터뜨렸다.
“키히히히, 히힛, 히히히…….”
“읏……!”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이온이 가까이 다가왔다.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미지의 공포를 목도하자 조각칼로 정신을 깎아 내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완전히 녹아내려 검은 덩어리가 된 이온이 이세인을 붙잡았다. 그리고 주저 없이 검은 점액질을 이세인의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숨이 막힌다.
“읍, 으읍! 으으읍!”
‘최세드릭에게 알려야…….’
까무룩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버둥거림이 완전히 멎었을 때 다시 문이 열렸다. <씨앤엘 코퍼레이션> 소속의 헌터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이세인 대표님, 큰 소리가 나던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이세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고, 구겨진 정장을 정돈한 다음 뒤로 돌아 헌터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내가 손이 미끄러져서 화병을 떨어뜨렸어. 치울 사람을 불러 주겠어?”
“네, 금방 부르겠습니다.”
문을 닫고 나가려던 헌터가 살짝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 그런데 대표님.”
“왜 그러지?”
“혼자 계셨습니까? 아까 이온 씨가 이쪽으로 오는 걸 봤습니다만.”
“글쎄, 난 계속 혼자 있었는데. 다른 데로 간 건 아닐까?”
그렇게 말하는 이세인의 눈이 모조 보석처럼 둔탁하게 빛났다.
* * *
그날은 평소와 같은 아침이었다.
나는 핸드폰 알람을 세 번 정도 끈 뒤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음이와 라임이 밥을 주고, 아스와 함께 1층에서 아침을 먹었다. 원래 달걀말이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뒤집기에 실패하는 바람에 스크램블 에그가 되었다. 뭐, 익었으니 됐다.
아스는 어젯밤부터 왜인지 부루퉁한 기색이었는데, 그래도 아침은 거르지 않았다. 다행이야, 잘 먹어야 일을 하지.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재고 확인.
원두는 아직 충분하다.
그동안 퀘스트나 업적 보상으로 쌓인 황금 뽑기 티켓으로 10연차를 돌려서 그 아이템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이템: 업소용 완전 자동 대형 로스터 (★★★☆☆)
무엇이든지 구워 버립니다.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완전 자동 시스템.
이공간에 설치하여 공간 절약 가능.
크투가의 반지로 편리하게 사용 가능합니다.
※ 설치비 무료]
바로 바라마지 않던 대형 로스터!
나는 이 아이템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이제 간편하게 많은 양의 원두를 볶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설탕만 조금 더 만들어 둘까.
그렇게 생각하며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던 난 깜짝 놀랐다.
“어……?”
푸른 하늘,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내리쬔다. 시야가 탁 트여 시원시원하다.
여기서 어디가 이상한지 아시겠는 분?
늘 창에서 커다랗게 보이던 대던전 《어비스》의 불길한 모습이 온데간데없었다.
아니, 그보다.
나는 후다닥 달려가 바깥을 확인했다.
쏴아아-
파도 소리가 들렸다. 황금빛 모래사장 위로 햇볕이 쏟아져 내리고, 저 멀리 판타지풍 건물이 드문드문 보였다.
“여기 어디야……?”
가게 바깥이 낯선 곳이 되어 있었다.
띠링, 알람 소리가 울렸다.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던전 산책 한 바퀴’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수령해 주세요.]
<카페 리을>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놓여 있었다.
건물에 ‘놓여 있다’는 말은 어색하지만, 그렇게밖에 표현이 안 되는 상황이다.
어제 내가 잠든 사이에 허리케인이라도 일어난 건가. 무슨 오즈의 마법사도 아니고, 어떻게 가게 건물이 통째로 낯선 곳으로 이동한 거지.
나는 황당한 마음으로 창밖에 펼쳐진 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응, 나도 바다 좋아해. 평화로운 여름 휴양지 좋지. 선베드 위에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다 밥 먹고 다시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는 휴가. 환상적이지.
그렇다고 가게째 바다에 날아오고 싶진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일단 진정하고, 다른 이상은 없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가게 안은 평소와 같았다. 이공간은 평소처럼 드나들 수 있었고, 전기와 수도도 멀쩡하다. 하지만 핸드폰은 연결이 되지 않는다.
계속 전송 실패가 뜨는 핸드폰을 내려놓는 그때, 퀘스트 완료 알림이 깜빡이는 것을 발견했다.
이게 무슨 퀘스트였지? 나는 퀘스트 상세 설명을 띄웠고, 곧 탄식했다.
[서브 퀘스트: 던전 산책 한 바퀴 /완료됨/
일에 지친 당신이여, 떠나라.
던전을 한 바퀴 돌며 건강도 챙기고 기분 전환합시다.
임의의 던전에 입장하기: 1/1
보상: 경험치(500exp), 100루비, 랜덤 레시피]
[경험치: 500exp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13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레시피 아이리시 커피를 획득했습니다.]
…….
그래, 이런 퀘스트를 받았었지.
계속 무시 중이었던 이 퀘스트가 갑자기 완료되었다는 건, 즉.
여기 던전 안이구나…….
던전에 들어가지 않으려 하니까 자는 사이에 가게 통째로 던전에 처넣는다. 발상의 전환이 대단한 시스템이다.
시스템 알림을 노려보면서 미간을 문지르는데, 옆에서 미음이가 항변했다.
“왜오옭! 내, 내가 아니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방금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지 않느냐!”
그건 그렇다. 여기서 던전이니 시스템이니 하는 것에 가장 관련이 깊은 존재는 이 고양이였으니까.
그러나 미음이는 억울하다며 펄펄 날뛰더니, 끝내 시무룩하게 고개를 늘어뜨리고 중얼거린다.
“왜우우웅……. 나한테는 이런 큰일을 저지를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말단에게 무슨 힘이 있겠느냐…….”
말단의 비애를 읊조리며 삽질 상태가 된 이 고양이의 옆에서.
“뀨우우웃! 뀨웃, 뀨우웃!”
이번에는 라임이가 갑자기 엄청난 기세로 울기 시작했다.
“라임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탱탱볼처럼 몸을 튕기는 것으로 보아 무슨 할 말이 있는 기색이다. 나는 얼른 슬라임 언어 번역기를 꺼내 라임이의 말을 해석해 보았다.
“뀨우우……. 뀨우!”
-그분의 힘이 가까이에서 느껴진다.
“그분이라는 게 누구인데? 그보다 라임아, 여기가 어딘지 알아?”
“뀨웃, 뀨웃, 뀨우우우!”
-살아 있는 영겁의 불꽃, 위대한 그분의 정원. 경배하라.
“……뭐? 그래서 그게 누구냐니까?”
“뀨우우, 뀻… 뀨우…….
-3.14159265358979…….
이번에는 원주율이 나왔다. 몇 번 더 물어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원소 주기율표, 근의 공식 따위, 아무튼 내가 궁금한 내용과는 무관한 말이 뜨다가 결국 침묵.
이 답도 없는 이과 슬라임 같으니.
우리 집 동물들은 다 왜 이럴까…….
나는 미음이와 라임이에게서 정보를 얻어 내기를 포기하고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살짝 열고 고개만 삐죽 내민 채 바깥을 살폈다. 한참을 살폈지만 들리는 것은 바람 소리가 다였다.
잠시 그러고 있으니 아스가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뭘 하는 거야?”
“아스, 쉿!”
던전 안이라고는 하나 몬스터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쉬어 가는 에피소드 여름휴가 편’ 따위의 소제목이 어울릴 법한 풍경이 펼쳐질 뿐이다.
밖으로 나가 봐도 될까? 일단 위험한 몬스터는 없는 것 같은데.
“어, 잠깐만, 아스! 함부로 나가지 마!”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늦으면 두고 간다.”
아스가 문고리를 잡고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에라, 모르겠다. 여기서 고민만 한다고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후다닥 아스의 뒤를 따라 가게 바깥으로 나갔다.
잠시 아스와 함께 주위를 수색했다. 그러나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고, 시스템 창도 아직까지는 잠잠했다.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우선 가게로 돌아가자고 말하려는 찰나.
바스락.
바로 가까이에서 마른 풀잎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아스, 물러서. 저쪽에 뭐가 있어.’
‘쫄지 마. 여차하면 내가 해치울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쭉 펴는 모습은 아스의 의도와는 달리 무척 귀여웠다.
‘그러니까 내가 지켜 주면 나하고도 데…….’
‘데?’
“데이ㅌ……!”
아스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수풀 너머의 기척이 더 커졌다. 나는 여차하면 손에 낀 반지의 힘으로 구워 버릴 생각으로 수풀 너머를 응시하다가 깜짝 놀랐다.
그건…… 소였다.
커다란 몸집, 하얀 바탕에 검은 얼룩빼기 털, 순하게 생긴 얼굴.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소다. 특이한 부분이라곤 머리에 달린 황금색으로 빛나는 삼각형 뿔 정도일까.
곧 눈앞에 시스템 알림이 나타났다.
[A급 황금삼각뿔소가 나타났습니다.]
다행히 이 소는 공격성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를 흘긋 보고 곧 관심을 잃은 소는 느긋하게 풀이나 뜯어먹기 시작했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쉬어가는 여름휴가 에피소드에 걸맞은 풍경이 펼쳐졌다.
휴, 겨우 긴장이 풀렸다. 위험한 상황은 아니구나.
“아스, 저쪽 반대편으로 가 보자.”
그런데 꼭 내 발을 잡아채려는 듯 띠링, 하는 소리가 다시 울렸다.
[서브 퀘스트: 두근두근 하트의 행방은?
커피의 맛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중요 재료, 우유가 필요하진 않으신가요?
그런 당신의 앞에 황금삼각뿔소가 나타났습니다.
황금삼각뿔소의 호감도를 최고치까지 올려 보세요.
테이밍에 성공할 시, 우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황금삼각뿔소를 테이밍하기: 0/1
보상: 전용 축사, 고급 자동 착유기]
엑…….
여전히 차원의 상점에는 우유가 품절이고, 그로 인해 메뉴의 폭이 대폭 줄어든 상태다.
그야 우유가 필요한데, 필요한 건 맞는데……. 직접 소한테 얻고 싶진 않았다.
나는 DIY보다는 돈을 주고 사서 쓰는 쪽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는 걸, 이 시스템이 제발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황금삼각뿔소는 당신에게 무관심한 상태입니다.]
[호감도: ♡♡♡♡♡]
문제는 가게 통째로 정체불명의 던전 속으로 순간 이동한 지금 이 상황. 이 소 퀘스트 말고는 다른 정보가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