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92)

94화

그래, 우유가 필요한 건 사실이고, 호감도라면 ‘스마일’ 스킬도 있으니 한번 해 볼까.

‘스마일.’

입술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완벽한 영업용 미소를 그렸다.

[스킬 ‘스마일’을 실행합니다.]

[Lv1. 효과: ‘웃으면 기분이 좋아져요.’에 의해 시전 대상자의 기분이 좋아집니다.]

[시전 대상자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음메에에.”

풀을 뜯던 황금삼각뿔소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오, 미약하지만 반응이 있다.

좋아, 다시 해 보자. 그리고 다시, 또 다시…….

[황금삼각뿔소는 당신에게 약간 흥미를 느낍니다.]

[호감도: ♥♡♡♡♡]

“헉, 허억…….”

입꼬리가 뻐근하게 아팠다. 겨우 하트 한 칸을 채우는 데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모르겠다.

계산해 보니, 이 속도로 하트를 다섯 칸까지 채우려면 입에 쥐가 날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내가 하는 꼴을 보고만 있는 것이 퍽 지루했나 보다. 아스가 소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그거야, 호감도를 높여서 이 소를 테이밍하려고 했지.”

“그런 건 나약한 인간의 방식이야. 포식자는 일일이 피포식자의 호감을 갈구하지 않는 법.”

응?

이제는 우리 집 천재 아르바이트생이 평범한 중2병 소년이 아니라 화신체라고 불린 신비한 미지의 존재라는 걸 안다. 지난번 검은 점액질 사건에서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방금 대사는 굉장히 질풍노도의 시기 같았다.

“복종하지 않는 이런 몬스터 따윈 스테이크로 만들어 버리면 되는 거 아냐?”

“아아아악! 김아스, 진정해! 황금삼각뿔소는 육우가 아니라 젖소라고!”

나는 황급히 아스를 붙잡았다.

“젖소도 불에 구우면 똑같아.”

“음메에에!”

아스의 기백에 놀란 황금삼각뿔소가 뒷걸음질 쳤다.

[황금삼각뿔소가 당신을 경계합니다. 호감도가 떨어집니다.]

안 돼, 어떻게 올린 호감도인데!

“진정하고, 그래, 카페모카를 생각해! 우유가 있어야 맛있는 카페모카를 만들 수 있잖아!”

멈칫.

카페모카란 말에 우리 집 급발진 아르바이트생이 동작을 멈췄다.

그 틈을 타 나는 재빨리 에테르-위키를 열었다. 스마일 스킬 외에 호감도를 올릴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황금삼각뿔소》

종류: 동물계 몬스터>포유류

등급: A급

설명: A급 청정 던전에서만 사는 소 몬스터. 흑백의 얼룩무늬가 특징이며 주식은 목초. 우유를 채취할 수 있다.

황금삼각뿔소가 좋아하는 것:

[계속 읽기]

마침 딱 원하는 내용이 있었다. 이 위키 내용대로라면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나만 놔두고 밖에서 뭘 하는 거냐, 왜오옭!”

그때, 우리가 낸 소리를 듣고 카페 안에서 미음이와 라임이가 튀어나왔다.

그런데 라임이의 선명한 붉은색 몸체를 본 황금삼각뿔소가 갑자기 콧김을 뿜어 내기 시작했다.

탱글탱글한 몸을 튕길 때마다 점점 흥분이 거세지더니.

“……뀨우우?”

황금삼각뿔소가 라임이에게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라임이가 몸을 통통 튕기며 소를 거부했다.

그러나 선명한 빨간색 덩어리가 눈앞을 아른거릴 때마다 소의 흥분도는 점점 더 높아졌다.

“음메에에!”

“뀨, 뀨웃…….”

소는 사실 색맹이라, 빨간색을 보고 흥분한다는 속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던데. 어찌된 일인지 이 황금삼각뿔소는 라임이에게 아주 덕통 사고를 당한 것 같다.

핥짝. 소가 라임이의 매끈한 몸체를 혀로 핥았다. 어찌나 꼼꼼하게 핥는지, 탱글탱글한 몸이 침 범벅이 되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뀨우우, 뀨…….”

굳이 슬라임 언어 번역기를 쓰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싫어하는 반응이다.

“캬갸갸옭! 이 빨간 덩어리 녀석, 침 범벅이다!”

기겁하며 미음이가 뒤로 물러났다.

철퍼덕!

이리저리 피하던 라임이가 몸을 튕기다가 그대로 황금삼각뿔소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이대로는 숨이 막히겠다. 빨리 침 범벅이 된 라임이를 황금삼각뿔소에게서 떼어 내려는 찰나.

“음메, 음메에에!”

소의 호감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황금삼각뿔소는 레드 슬라임에게 흥미를 느낍니다.]

[호감도: ♥♥♡♡♡]

[황금삼각뿔소는 레드 슬라임에게 매우 흥미를 느낍니다.]

[호감도: ♥♥♥♡♡]

[황금삼각뿔소는 레드 슬라임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호감도: ♥♥♥♥♡]

엄청난 속도로 하트가 빨갛게 차오르더니…… 이윽고.

[황금삼각뿔소는 레드 슬라임이라면 우생(牛生)을 함께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호감도: ♥♥♥♥♥]

[테이밍이 완료되었습니다!

소환수: 사랑에 빠진 황금삼각뿔소가 당신의 말에 따릅니다.]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두근두근 하트의 행방은?’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수령해 주세요.]

[전용 축사 건설이 가능합니다. 이공간 안에서 ‘건설하기’를 선택하세요.]

[고급 자동 착유기를 설치할 수 있습니다. 축사를 건설한 후 ‘설치하기’를 선택하세요.]

알아서 멋대로 퀘스트가 클리어되었다.

“음메에.”

황금삼각뿔소는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스스로 척척 이공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랑은 불꽃과 같다더니, 과연 전광석화와 같은 빠르기였다.

* * *

최이찬이 몬스터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샤샤샥, 쾅!

전광석화와 같은 빠르기였다.

칼은 적확하게 몬스터의 급소만을 노렸다. 커다란 몸집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날렵함으로 전투를 끝낸 최이찬이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이름: 최이찬

클래스: 버서커(S) (Lv.39)

※ 위대한 자: 노란 옷의 왕과 계약 중입니다.]

레벨이 제법 올랐다. 이제 몬스터 몇 마리만 더 잡으면 퀘스트도 끝이 보인다.

“하아…….”

‘빨리 돌아가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무기를 갈무리하는데,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파삭, 하고 마른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다.

또 몬스터가 나타난 건가? 이 일대의 몬스터는 전부 처치했을 텐데.

의아함에 최이찬이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목소리가 끼어든다.

【그쪽으로 가지 말거라.】

“왜 그러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흐음.

최이찬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주저 없이 소리가 난 곳을 향했다.

【이런, 신뢰가 없군.】

대던전 《어비스》에 들어온 지도 여러 날.

그동안 이 노란 옷의 왕은 자주 그에게 참견했다. 어디는 위험하다거나, 어디는 좋은 아이템이 있다거나 등등.

순진하게 그 목소리를 따른 결과는 처음부터 고난이도 몬스터 구역에 떨어진 것이었다.

아무리 S급이라고 하나 실전 경험이 없는 데다 변변한 아이템도 없는 흙수저 헌터에게는 평화 끝 고생 시작.

지금의 성취는 눈물로 이룬 폭렙이었다.

불신으로 얼룩진 최이찬의 행동은 단호했다. 낄낄대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기척의 정체를 확인했다. 몬스터의 공격에 대비해 무기는 손에 들고 언제든지 스킬을 갈길 수 있게 대비했다.

바스락. 기척이 조금 더 커졌다.

수풀이 흔들리는 위치가 낮았다. 덩치는 크지 않다. 소리의 크기로 보아 무게는 60㎏ 정도인가. 설마 인간이 이곳에……?

“어, 설마…….”

일순 최이찬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예리하게 벼려진 감각은 같은 답을 내놓았다.

저 기척의 주인은…….

스륵. 손에 든 무기를 집어넣었다.

시선이 향한 곳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무기도 잃고 길을 헤매던 중년의 남자였다.

겉으로 보이는 큰 상처는 없었지만 꽤나 고생한 듯, 수염이 수북하게 난 데다 몸에는 거적때기 한 장뿐이었다. 살이 빠져 얼굴은 홀쭉했는데 눈만은 빛이 형형했다.

던전 안이 아니었다면 노숙자라고 오해할 법한 몰골.

하지만 최이찬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

노숙자 몰골의 중년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전에 한 번 뵌 적 있는데, 저 기억 안 나세요? 리을이 친구 최이찬입니다. 리을이 큰아버지 맞으시죠?”

“……어?”

몇 년 전 미로 던전에서 실종된 남자, 권지운의 아버지이자 권리을의 큰아버지인 권석민 헌터가 놀란 눈을 했다.

* * *

“음메에에.”

“그래. 간다, 가.”

알아서 척척. 커다란 젖소가 이공간 안에서 자리를 잡고 울었다. 그사이 퀘스트 보상으로 넓어진 구역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띠링, 하고 알림이 울린다.

[전용 축사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건설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오]

순식간에 지붕이 있고 먹이통이 딸린 축사가 건설되었다.

[소환수: 사랑에 빠진 황금삼각뿔소가 전용 축사를 마음에 들어 합니다.]

[고급 자동 착유기를 설치할 수 있습니다. 설치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오]

굵은 튜브와 스테인리스 통이 달린 착유기가 황금삼각뿔소의 몸에 설치되었다. 나는 곧장 착유기에 달린 버튼을 눌러 보았다. 잠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

주르륵.

스테인리스 통에 하얀 우유가 담기기 시작했다.

[아이템: 갓 짠 신선한 우유(★★★☆☆)

희귀한 A급 황금삼각뿔소에게서 갓 짜낸 우유.

평범한 우유와는 다른 풍부한 맛.

음료의 품질을 좋게 만들어 줍니다.]

이 우유는 차원의 상점에서 구입했을 때보다 별이 하나 많다. 이만하면 고생 끝에 황금삼각뿔소를 데려온 보람이 있었다.

“뀨우우…….”

고생은 내가 다 하지 않았냐는 듯, 라임이가 몸을 통통 튕겼다.

어쨌건 겨우 우유를 손에 넣었으니 이 주변을 더 살펴보기 전에 커피를 한 잔 마시기로 했다.

현재로서는 여기가 어딘지 힌트가 될 만한 정보가 없을 뿐더러,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갓 짜낸 우유가 무척 맛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던전에서 커피를 마시면 안 되는 걸까.

물론 된다. 되고 말고. 그래, 던전 탐험도 식후경이라지 않나.

곧장 우유를 들고 이공간을 나와 커피를 만들 준비를 했다. 처음에 비해 많이 길어진 레시피 리스트를 띄워 놓고 무엇을 만들지 잠시 고민했다.

답은 곧 나왔다. 지금 필요한 메뉴는 바로 그거다.

아이스크림 커피.

최이찬이 쪽지만 한 장 남기고 여기를 떠난 뒤로는 만든 적이 없던 메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밝히자면, 딱히 걔를 생각해서 안 만든 건 아니고. 그냥 겨울이다 보니 이 메뉴를 찾는 손님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화도 연결이 안 되고, 최이찬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르겠네.

<던전관리청>에서 미친 듯이 찾고 있던데, 좁은 한국에서 아직 발견이 안 된 거면 역시 던전 안에 있는 걸까. 별일 없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재빨리 커피를 만들어 냈다.

유리잔에 얼음과 에스프레소, 우유, 바닐라시럽을 담는다. 넉넉하게 아이스크림을 떠 넣은 다음 초콜릿 가루를 뿌리면 완성이었다.

이번에는 미음이와 라임이에게도 조그만 잔에 커피를 담아 주었다. 평소에는 커피에 관심이 없던 동물들이지만 두말없이 커피를 받아먹었다.

“자, 아스, 얼른 먹어 봐.”

“……알았어.”

먼저 아이스크림을 한 입, 커피와 섞어서 다시 한 입. 자연스럽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아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우유가 들어간 달콤한 커피다. 맛도 물론 좋지만 지금 이 메뉴를 고른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여기가 너무 더웠기 때문이다.

바깥은 겨울이었는데 하루아침에 한여름 바닷가 절벽 위로 워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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