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92)

95화

햇볕은 뜨겁고 공기는 후텁지근하다. 당장 얇은 옷을 꺼내 입었는데도 효과는 미미하다. 잠시 나가서 황금삼각뿔소를 데려온 것만으로도 땀이 줄줄 흘렀다.

미리 에어컨을 설치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를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한여름 날씨의 바닷가 절벽 위로 건물째 워프할지 어떻게 짐작했겠는가.

[아이템: 아이스크림 커피(★★★★☆)

상태: 좋음 (남은 시간: 01:00:00)

효과: 몸이 매우 차가워집니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이 아이스크림 커피의 효과 항목이다.

달콤한 맛과 함께 몸 안으로 차가운 기운이 밀려 들어왔다. 윌리스 캐리어(에어컨의 개발자다)의 가호 못지않은 서늘함이었다. 열기가 식으니 겨우 기운이 난다.

나는 남은 커피를 다 비우며 중얼거렸다.

“이런 걸 망중한이라고 하는 거겠지…….”

“한중한이 정확한 거 아니냐, 왜옹.”

태클을 걸면서도 미음이도 아이스크림 커피를 싹싹 긁어 마셨다. 털 짐승이라 더 더운 듯싶었다.

어떻게 우유를 구하기는 했지만. 여기가 대체 어딘지,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지 해결된 건 하나도 없는 상황이다.

그래도 커피가 맛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위안이 된다.

“……? 뭐지?”

그때, 아스가 무엇을 감지한 듯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다. 겨우 몸을 식혔는데 다시 열기가 느껴졌다. 더군다나 열기는 점점 더 거세져, 마치 근처에 불이라도 지른 것 같았다.

아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나는 깜짝 놀랐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진짜로 가게 앞에 불이 났다.

“불……! 소화기 어딨지? 소화기 가져와야 해!”

허둥지둥 불을 끄려던 나는 깜짝 놀랐다.

잘 보니 불덩이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불의 정령처럼 생긴 생김새였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던 불의 정령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불이 눈물을 흘린다니까 이상하게 들리는데, 그렇게밖에 표현이 안 되었다. 정령의 눈가에서 흐른 눈물이 수증기가 되어 사라져갔다.

“흑흑…….”

너무나도 ‘나 무슨 일 있으니까 빨리 물어봐 줘.’ 하는 모습이었다.

구슬픈 울음은 한참 계속되었다.

슬쩍 이쪽 눈치를 보다가 다시 우는 것이, 계속 이 앞에서 움직이지 않을 기색이었다.

잠시 고민 끝에 나는 불의 정령에게 다가갔다.

하도 우니까 신경 쓰이는 데다, 저 ‘빨리 와서 말 걸어 줘.’ 하는 눈빛을 무시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울다 지친 정령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면 곤란하기도 하고. 테이블이며 의자며 다 나무거든.

“얘, 왜 울고 있니?”

불의 정령이 수증기를 흩뿌리며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불, 그놈, 나쁘다.”

“차가운 불?”

“그놈들, 나, 식혔다. 페페, 수영, 불가능. 페페, 귀가, 불가능.”

“집이 어딘데?”

“바다, 페페, 주인님.”

“아, 그렇구나…….”

전혀 모르겠다…….

언어 체계에 조사가 없는 건지, 단어만 늘어놓는 녀석의 말을 알아듣기란 힘이 들었다.

후끈한 열기에 땀을 뻘뻘 흘리며 한참 문답을 반복한 뒤에 겨우 파악한 내용은 이렇다.

이 녀석의 이름은 페페.

불 속성의 정령으로, ‘영겁의 불꽃’이라는 주인을 모신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님의 권속, 불꽃의 조각이 가출했다. 페페는 주인님의 명으로 가출한 조각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조각, 가출, 나쁘다.”

“뀨우우…….”

“어, 라임아, 왜 그래?”

“뀨…….”

슬그머니 라임이가 내 뒤로 몸을 숨겼다. 꼭 페페를 피하려는 것 같았다.

라임이 설마 너…….

일단 찰싹 달라붙는 라임이를 진정시키고 계속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한참 가출한 조각을 찾아다니다 드디어 불꽃의 조각을 찾아냈다고 한다. 냉큼 데려가기 위해 조각을 삼켰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페페가 찾던 것과는 다른 차가운 불꽃의 조각. 그 바람에 몸이 식어 바다를 헤엄칠 수 없게 되었다.

“주인님, 기다림, 바다.”

주인님의 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바다를 건널 수 없어서 울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심사숙고 끝에 이 정령을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운 말투로 전했다.

“페페, 저기, 원래…… 불은 물에 닿으면 꺼져.”

그러나 페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가능, 수영, 반지.”

“……반지?”

“크투가님, 반지, 불. 페페, 수영, 가능.”

“설마 이거 말이야?”

끄덕.

페페가 가리킨 것은 내 손에 낀 붉은 돌이 박힌 반지였다.

크투가의 반지. 김덕이 할머니에게 산 뒤 커피를 볶는 데 잘 쓰는 아이템이다.

“영겁, 불꽃, 발화.”

그래도 되나? 페페의 몸도 불이고 이 반지도 불을 붙이는 용도니 괜찮겠지?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페페를 향해 반지의 힘을 사용했다.

화르르.

페페의 몸에 불이 붙고, 방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뜨거움이 느껴졌다.

“페페, 따뜻함, 기쁨.”

그러나 강렬한 불꽃이 몸을 감싼 것은 잠깐이었다. 페페의 몸은 다시 식어 버렸다.

“페페, 차가움, 슬픔.”

페페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수증기를 흩날리는 이 정령을 어떻게 달래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

띠링, 띠링. 분위기에 맞지 않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알림 창이 떴다. 퀘스트였다.

[메인 퀘스트: 불의 정령 페페 구하기

당신은 길을 잃은 가여운 정령 페페와 만났습니다.

페페의 몸을 따뜻하게 해 집으로 돌려보내 줍시다.

예로부터, 몸을 따뜻하게 하는 데는 알코올이 사용되었습니다. 알코올이 든 커피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달성 시, 영겁의 불꽃이 당신을 치하할 것입니다.

필요 아이템: 아이리시 커피

페페에게 아이리시 커피를 전달하기 0/1

보상: 포말하우트의 별빛, 해당 던전 지도]

이 난데없는 퀘스트에서 주목할 부분은 두 가지였다.

첫째, 서브가 아니라 메인 퀘스트다.

이제까지 메인 퀘스트는 나름 굵직한 건수에만 떴다. 그러니 이 퀘스트도 우연히 마주친 페페를 도와주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지금 처한 상황의 해답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둘째, 보상으로 주는 지도.

포말하우트의 별빛……이란 건 아이템일까. 뭔지 모르겠으니 일단 지금은 넘어가자.

중요한 건 지도다.

지도가 있으면 여기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알 수 있겠지. 출구가 표시되어 있을 수도 있고, 이 정체불명의 던전에서 빠져나가는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저할 시간은 없다. 나는 레시피를 확인하며 당장 페페에게 물었다.

“페페, 너 몇 살이니?”

“나이, 질문, 꼰대.”

“…….”

“한국인, 서열 의식, 나쁨.”

아주 똘똘한 정령이었다…….

“그게 아니라, 페페를 돕기 위해서 필요한 정보라서 그래.”

“페페, 빠른, 1200살.”

예상보다 상당히 많긴 하지만…… 미성년자는 아니니 괜찮겠지.

나는 페페더러 앞에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 뒤, 가게 안으로 돌아왔다.

퀘스트 조건인 아이리시 커피를 만들기 위해서는 위스키가 필요했다. 차원의 상점에서 위스키를 선택하자 경고 창이 떴다.

[지나친 음주는 건강에 나쁘며, 상태 이상을 유발합니다.]

[당신은 19세 이상입니까?

네 ☜ / 아니오]

꽤 철저하구나…….

‘네’를 선택하니 작은 유리병에 든 위스키가 손에 들어왔다. 뚜껑을 열자 확 진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제법 도수가 높은 것 같았다.

위스키에 설탕을 넣고 팔팔 끓지 않을 정도로 데웠다. 이어 에스프레소와 따뜻한 물을 차례로 담았다.

다음으로는 생크림이 필요했다. 생크림은 황금삼각뿔소에게 설치한 착유기의 버튼을 조작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었다.

이 생크림을 잔 끝까지 채워 주면 완성이었다.

[아이템: 아이리시 커피(★★★★☆)

상태: 좋음 (남은 시간: 01:00:00)

효과: 몸이 매우 따뜻해집니다.]

잔에서 진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설탕, 커피, 위스키가 이루는 조화로운 향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앞에서 기다리던 페페에게 당장 잔을 가져다주었다.

“페페, 이걸 마셔 봐.”

“냄새, 좋음, 마심.”

페페가 유리잔을 받아들었다. 페페의 손이 닿는 순간 유리잔이 녹기 시작했지만, 다행히 잔이 완전히 녹기 전에 전부 마실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리시 커피의 마지막 한 방울이 입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강력한 불꽃이 페페의 몸을 휘감았다.

“페페, 뜨거움, 기쁨.”

땀이 주르륵 흘렀다. 화상을 입지 않기 위해 뒤로 물러나야 할 정도의 열기였다.

성공이다!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 불의 정령 페페 구하기’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수령해 주세요.]

[포말하우트의 별빛을 획득했습니다. 이공간에서 포말하우트 별을 관측할 수 있습니다.]

[던전 지도를 획득했습니다.]

“페페, 감사, 보답.”

“괜찮아, 보답 같은 건 안 해도 돼.”

어차피 지도를 얻는 퀘스트를 해치우는 겸사겸사였고.

“은인, 우리 집, 초대……!”

그런데 아이리시 커피에 들어간 위스키의 도수가 너무 강했던 모양이다. 취기가 오른 페페가 갑자기 흥분하기 시작했다.

“초대, 연회, 신남……!”

페페가 움직일 때마다 화르르 타오른 불꽃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이대로는 페페의 불꽃에 집에 홀라당 타 버릴 것 같았다.

“으앗, 진정해, 페페! 잠깐, 좀 차분하게……!”

“초대, 거절, 불가……!

불꽃이 가게의 벽돌담에 그을린 자국을 만들어 냈다. 마당의 나무에 불이 옮겨 붙기 직전.

페페를 진정시킨 건 아스였다. 활활 타는 불꽃을 향해 거칠게 일갈한다.

“진정해라. 나의 주인님에게 이게 무슨 무례냐!”

“세계, 황혼, 마왕……? 왜, 여기, 존재?”

“불꽃의 정령, 내 주인님에게 예를 갖춰라.”

“저기, 아스, 고용주를 그렇게 말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지 않을까.”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스와 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라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고용계약이 전부다.

주인님이라니 듣기에 좀…… 그렇다.

“주인, 몰라봄, 죄송.”

푸시시,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인간 아닌 것들끼리 극적인 화해, 아니 서열 정리가 이루어진 것 같았다.

아까보다 훨씬 차분해진 페페가 서글프게 고개를 늘어뜨렸다.

“페페, 친구, 없음. 혼자, 귀가, 쓸쓸함. 사과, 반성, 작별.”

페페의 눈에서 흘러넘친 눈물이 수증기가 되어 흩뿌려졌다. 꾸벅,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나는 그대로 떠나려는 페페를 황급히 불렀다.

“아니야, 페페, 초대 받아들일게. 고마워.”

“정말, 기쁨, 신남!”

나는 방금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지도를 눈으로 훑었다.

바다의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 페페의 집이 있는 곳에 커다랗게 별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이벤트’ 마크가 깜빡거렸다.

정확히 무슨 이벤트인지는 모르겠지만.

페페의 초대가 이 답도 없는 상황을 타개할 해결책이 될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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