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192)

96화

* * *

그날은 <백은 길드>에서 새로운 헌터를 뽑는 면접날이었다.

오랫동안 신규 채용이 없던 길드다 보니 어마어마하게 지원자가 몰렸다. 그 서류를 고르고 골라 겨우 면접이 진행되었다.

“……이건 뭡니까?”

아침부터 연이어 면접을 보느라 지친 권지운이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었다. 눈앞의 지원자가 환한 표정으로 재깍 대답했다.

“제 마음입니다, 받아 주세요!”

‘사랑해요은랑’이라고 적힌 슬로건이었다.

“……하아.”

권지운은 이마를 짚었다.

한때, 본명 외 헌터명을 짓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지금보다 랭커의 수가 적어 세간의 주목도가 달랐던 시절이었다. 랭킹 1위 무원의 영향도 컸다. 너도나도 무원처럼 멋진 헌터명을 지으려 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헌터가 그냥 본명을 쓰면서 사장된 유행이다.

권지운 역시 그 유행의 영향으로 각성 직후에는 ‘은랑’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자, 그 이름이 조금, 아니 많이…… 민망했다. 중학생 때 만든 트위터 닉네임보다 조금 나은 수준일까. 지금은 흑역사나 마찬가지인 이름이다.

굳이 흑역사가 된 이름을 슬로건으로 뽑아 와서 건넨다는 건…….

……멕이는 건가?

지원자 ‘사랑해요은랑’에게 권지운이 불합격 통보를 하려던 찰나였다.

“가드, 가드 불러요! 웬 노숙자가 면접장에 난입했어요!”

바깥에서 소란이 들렸다.

“잠깐! 함부로 들어가시면 안 돼요!”

소음은 점점 더 커졌다.

자연히 면접은 중단되었고, 바깥의 소란에 신경이 쏠린다.

“여기 부길드장이 내 아들이라니까!”

“그런 소리 하는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욧!”

“어허, 이거 놔 봐!”

“보안게이트는 어떻게 통과한 겁니까. 이쪽으로 와서 이야기 좀 하시죠.”

벌컥!

만류하는 직원을 떨쳐 낸 침입자가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비렁뱅이나 다름없는 몰골을 한 중년 남자였다. 지저분하게 자라난 머리카락과 수염에 가려졌지만 얼굴이 익숙하다.

어째서인지 신규 S급 최이찬 헌터와 함께였다.

당장 끌어내려는 직원을 피하며 남자가 외쳤다.

“아임 유어 파더!”

“……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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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랭킹, 길드 추노 금지. 현피는 던전에서

[잡담] 백은길드 면접때 이거 가져갈건데 어떰? (4)

추천: 0 / 비추: 2

작성자: 사랑해요은랑

(사진)

이거 어떰??????

내가 만든 슬로건임ㅎㅎ ㅈㄴ감동각임?

ㅇㅇ: 미친놈아 면접장에 그걸 왜 가져가

ㅁㅁ: 서류 대체 어떻게 붙음?

└지옥불만두: 한국 자소설 시스템이 문제가 많다 이런 새끼를 못걸러내네

└wab***: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잡담] 백은길드 면접 기다리는 중 ㅎㅎ (22)

추천: 0 / 비추: 2

작성자: 사랑해요은랑

(사진)

사람 많아서 오래 기다려야됨

이제 여기가 내가 다닐 곳인가ㅎㅎ

탕비실에 간식 종류 ㅈㄴ많음 기다리면서 과자 두개 까먹음

골렘두대삼: 김칫국 애잔하다

ㅁㅁ: ㅅㅂ 저 슬로건 진짜 들고갔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존버메타: 권지운 개띠용할듯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랑해요은랑: 그분의 차가운 눈빛을 받을 수 있다면,, 이한몸 불태운다

 └rra***: 미친놈 이것이 진.짜.광.기.다

 └존버메타: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신도림환승: ㅅㅂ 이새끼 백은길드 면접간다고 글을 몇개를 쳐싸는거냐 안물안궁 도배작작좀

└rra***: 안물안궁이라면서 글싼지 1분만에 들어오다니,,ㅜ 미친집착,,ㅜㅜ

└사랑해요은랑: 미안하다,,ㅠㅠ 내마음은 이미 은랑에게 바침

 └ㅇㅇ: 지독하다 권지운도 버린이름 은랑으로 닉박는 미저리

 └힝행홍: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근당근: 윗댓에 동의하는건 아닌데 너네 백은길드갖고 왜이리 난리임?? 씨앤엘로 사람 다빠졌다며ㅋㅋㅋ 공고뜬거보니 탱커도 없던데 걍 소규모길드 아님?

└red***: 권석민 헌터가 세운 길드자늠,, 규모가 줄었어도 이름값이 있지ㅇㅇ

 └피즈치자: 그게 누구여..?

└플라이트: 초기부터 활동한 헌터임 B급이긴 한데 헌터계 개판일때부터 길드 세운다고 고생많이함 틀딱들 사이에선 아들인 권지운보다 인지도있음

 └사랑해요은랑: 그래도 내겐 킹갓제네럴은랑뿐

 └플라이트: 컨셉질 지독하다;;;;

 └ㅇㅇ: 플라이트좌도 기겁하는 컨셉질ㅋㅋㅋㅋㅋㅋㅋ

└피즈치자: 요새는 왜 안보이는데? 은퇴함??

 └플라이트: 던전에서 사고터져서,, 뭐 음모론도 있고 복잡함.. 말하기 좀 그럼

사랑해요은랑: 헐 내차례다 나간다

└ㅇㅇ: 나중에 후기써조

[잡담] 백은길드 탱커 면접 후기,, (12)

추천: 86 / 비추: 2

작성자: 사랑해요은랑

(사진)

짐 면접 중단됐음;;

나의 뛰어난 능력치에 매료된 권지운이 합격목걸이를 건네려는 순간

노숙자가 난입함ㅡㅡ

여기 가드 왜 일안함 노숙자 한명 못막냐;;

역시 최강탱커인 이몸이 들어와서 지켜줘야겠군 ㅎㅎ

방금 노숙자가 아임유어파더!! 라고 외침ㅋㅋㅋㅋㅋ

내면접 이게머냐

힐러구함: 아임 유어 파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주작도 쫌 봐가면서 해라

└사랑해요은랑: 주작아니야 진짜 갑분 아임유어파더이럼ㅋㅋㅋㅋ

└trt***: 스타워즈를 감명깊게 보셨나,,

red***: ????설마 권석민 헌터임???

└사랑해요은랑: 그게누구인데.. 내면접살려ㅜ 계약서 쓰기 직전이었다고

└red***: 권지운 아버지ㅇㅇ

 └사랑해요은랑: 어쩐지 내추럴하고 로하스하면서 자연친화적인 풍모가 느껴지더라,, 현대 소비시장에 일침을 놓는 패션 멋지심 bb

 └ㅇㅇ: 탈룰라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플라이트: 헐 권석민이 돌아왔다고? 사진 더 자세히 좀 찍어봐

└사랑해요은랑: 안됨ㄴㄴ 옆방으로 데려가서 안보임ㅜ 나혼자 기다리는중ㅜ

힘없찐: 헐 이글 조회수 대박이다 ㅋㅋㅋㅋㅋㅋ

헌터24시: 안녕하세요 가장 빠른 헌터계 뉴스를 전해드리는 헌터24시입니다^^! 사랑해요은랑님, 오늘 참가하신 백은길드 면접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 여쭙고 싶어 댓글 남깁니다. [email protected] 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 * *

“아버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백은 길드>의 응접실.

부자가 온전한 해후를 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입막음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발과 면도를 마친 권석민은 한결 깔끔한 모습이 되었다. 살은 좀 빠졌지만 이렇게 보니 권지운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권지운은 울컥하는 마음을 느꼈다.

그가 각성하고 얼마 되지 않아 미로 던전 안에서 실종된 아버지다. 한때는 마음이 꺾여 수색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다. 그간의 고뇌와 염려가 파도처럼 마음을 휩쓸었다.

“떼잉, 어찌된 게 길드 가드들이 길드장을 못 알아보냐. 아들아, 하마터면 내 길드에 못 들어와서 부자상봉도 못할 뻔했다.”

“이해해 주세요. 시간이 많이 흘러서 사람이 거의 다 바뀌었습니다.”

그 말에 권석민이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고작 한 달 자리를 비웠다고 가드를 왜 다 바꿔? 사실 이 아버지 쫓아내려던 거 아니냐? 왕위를 계승 중인 거냐?”

“잠깐, 한 달이라고요?”

던전 안과 바깥의 시간 흐름이 다른 일은 드물지 않았다.

허나 자그마치 6년. 그 시차가 6년이 된다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그새 네가 많이 컸다 싶더라니. 건물도 어째 리모델링한 것 같고. 하이고, 지금이 몇 년도냐?”

“……20×× 년입니다.”

“뭐라고! 젠장, 시간을 너무 건너뛴 거 아니냐. 그래도 오차율 3년 이내면 아직 괜찮군. 더 엇갈렸다간 큰일 날 뻔했어.”

“……아버지?”

중얼중얼, 뜻 모를 말이 이어진다. 이래서는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

권지운은 감격에 차 포옹을 하려던 팔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그래, 몇 년 만에 돌아온 그 마음을 자신이 어떻게 다 헤아리겠나. 권지운은 아버지가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을 더 주기로 하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결에 권석민을 따라온 최이찬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 리을이 사촌 오빠 맞으시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우리 리을이하고는 무슨 사이실까.”

“하하, 고등학교 친구입니다. ……아직은.”

권지운은 피식 웃음 흘렸다.

현재 <던전관리청>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신규 S급 헌터가 친구라. <청라>의 그 헌터도 그렇고, 최세드릭도 그렇고. 어찌된 일인지 내 동생 근처에는 묘한 놈들이 많군.

그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 아버지를 발견한 겁니까?”

“그건 저기, 던전에서 어쩌다 보니, 마주쳐서.”

모호한 대답에 권지운이 살짝 눈가를 찌푸리고 재차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헉, 그래, 리을이!”

혼자서 뭐라 중얼거리던 권석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들아, 리을이는 어디에 있냐? 리을이, 우리 조카를 빨리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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