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진정하세요. 제가 연락을 해 보겠습니다.”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권리을도 걱정을 많이 했을 텐데 당장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줘야지.
권지운은 곧장 핸드폰을 들어 권리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음만 이어질 뿐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카톡 역시 미확인.
“지금 전화를 안 받는군요. 조금 있다 다시 연락해 보겠습니다.”
“안 돼, 시간이 없다. 얼른 만나야 해!”
“아버지, 진정하세요.”
그러나 권석민은 초조한 기색이었다. 결국 권지운은 아버지의 닦달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리을이가 최근 카페를 열었어요. 위치가 상당히 특이하지만…… 무척 맛있어요. 그쪽으로 가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아,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일부러 사람을 물렸는데, 어디서 소문이 났는지 길드 앞에는 기자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가족의 회포를 푸는 것도 쉽지가 않다. 세 사람은 기자들을 피해 뒷문으로 나가 권리을이 운영하는 카페로 향했다.
그리고 놀랐다.
“아들아, 내 눈에는 카페가 안 보이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엥?”
서울시 중구 던전게이트3가 16로.
카페 건물이 통째로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각.
또 한 명, 감쪽같이 사라진 <카페 리을>을 보고 놀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게 뭐냐는…….”
주노을이 탄식했다.
무슨 오즈의 마법사냐는…….
* * *
“페페, 수영, 가능!”
절벽 아래 고요한 여름 해변.
불의 정령 페페가 크게 손짓을 하자 화르르 불이 타올랐고 파도가 옆으로 갈라졌다.
……이걸 수영이라고 해도 되는 걸까?
페페의 열기에 바닷물이 기화하며 공기 중의 소금 냄새가 강해졌다. 곧 완전히 바닥이 드러나고 노란색 길이 이어졌다. 해초와 조개껍데기 따위가 발에 밟힌다.
“이쪽, 손님, 연회!”
“……뭐, 가 볼까.”
길의 끝에는 작은 섬이 보였다. 지도의 별 표시는 정확히 저곳을 가리킨다.
저곳에 뭔지 몰라도 이벤트가 있다 이거지. 일단 가 보는 수밖에 없나.
“이 녀석, 더 정성껏 안지 못하겠느냐, 왜옭!”
“……걸어오든가.”
“흠, 이만하면 나쁘지 않구나.”
동물들은 아스와 내가 각각 한 마리씩 안고 걷기로 했다. 내가 라임이, 아스가 미음이를 맡았다.
미음이는 아스의 품이 불편한지 한참 뒤척거리더니, 겨우 마음에 드는 자세를 찾고 고롱거리는 소리를 냈다.
황금삼각뿔소는 그대로 축사에 두기로 했다. 소까지 끌고 걷기엔 먼 거리기도 했고, 축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소가 움직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넷이서 페페 뒤를 따라 걸은 지 한참.
“헉, 허억…….”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땀 때문에 눈이 따끔거렸다.
정말 지독하게 더웠다…….
그나마 라임이의 몸이 서늘해서 만지면 기분 좋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아이스크림 커피의 효과는 이미 끊겼다. 더군다나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더위는 강해지기만 했다.
“페페, 헉……. 얼마나 남았어?”
나는 여기서 유일하게 멀쩡한 페페에게 말을 걸었다.
“금방, 도착, 안심!”
“여기 왜 이렇게 더워?”
“더움? 페페, 시원!”
응, 너는 그렇겠지……. 나는 몸이 불로 된 게 아니라 죽을 것 같아…….
그래도 다행히 페페의 말대로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 바퀴 도는 데 10분이나 걸릴까 싶은 작은 섬에 마을 하나가 있었다.
페페는 우리를 마을로 안내했다. 돌로 된 집이 드문드문 보였고, 마을의 가운데에는 커다란 신전이 있었다. 영겁의 불꽃을 숭배하는 제단 같았다.
그리고 곧 이 엄청난 더위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누구, 방문, 손님?”
돌담 너머로 삐죽, 페페와 똑같이 생긴 불의 정령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 때문에 이렇게 더운 거였다.
“페페, 귀가, 환영.”
“손님, 환영, 연회!”
작은 정령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와글와글 떠들어 댔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정령들에게 한국어에는 조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다. 조각조각 들려오는 말들은 얼추 손님을 환영한다는 뜻 같았다.
환영 파티를 열겠다며 마을 중앙으로 페페와 정령들이 우리를 데려갔다. 그런데 토막 나서 들려오는 단어들 중 뜻밖의 내용이 있었다.
“응? 우리 말고 다른 방문자가 있다고?”
“여행자, 조난, 방문.”
거의 동시에 앞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아, 뜨, 뜨거!”
아니, 낯선 목소리가 아니다.
“하, 내 참 구경하고 싶은 건 이해하지만, 갑자기 만지면 뜨겁잖아. 그래, 한 명씩, 줄 서서 한 명씩 봐.”
와글와글 몰려든 불의 정령에게 자신의 무기를 구경시켜 주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살짝 날티 나는 분위기의 얼굴, 위로 솟은 눈매가 눈에 들어왔다.
“어, 이 녀석들, 하하. 나하고 악수하고 싶어? 악수는 내 손바닥이 타니까 안 되지만, 그래, 사인은 어때?”
그리고 이 뻐기는 말투.
……설마.
“……어!”
고개를 돌려 나를 발견한 최세드릭이 깜짝 놀랐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 * *
식탁이 차려졌다.
마을의 광장에 놓인 돌로 된 커다란 식탁. 연회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이 불의 정령들은 꽤나 푸짐한 메뉴를 내어 왔다.
바다 한가운데의 섬이라서 그런가, 주 메뉴는 해산물이었다. 불에 구운 돌이나 까만 숯 따위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페페, 상식, 있음. 인간, 돌, 안 먹음.”
“어…… 오해해서 미안.”
“음식, 맛있음, 먹음!”
특히 싱싱한 참치회를 젓가락으로 집자 참치 타다끼가 먹음직스러웠고, 참치 구이에서 고소한 맛이 났다.
불의 정령들이 내뿜는 열기에 해산물이 실시간으로 익었다.
“왜옭, 왜오옹(제법 대접이 괜찮구나)!”
“뀨우우…….”
“……나쁘지 않네.”
일행이 만족스럽게 음식을 먹는 모습을 확인한 뒤, 나는 최세드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설마 이 녀석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
“넌 어쩌다 여기 온 거야?”
“엉? 나? 나는…….”
노릇노릇 잘 익은 참치 구이를 집어 먹으려던 최세드릭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마음이 울적해서.”
“……뭐?”
최세드릭은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던전 산책을 하는 취미가 있다고 했다.
대도시의 난개발이 문제인가? 서울에 녹지가 부족해서 그래? 멀쩡한 공원 놔두고 던전을 산책한다니 인간적으로 그리 공감 가는 취미는 아니지만……. 스트레스를 푸는 법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니 이해해 주자.
“그래서 대던전 《어비스》나 한 바퀴 돌려고 했거든.”
“잠깐, 여기가 《어비스》라고?”
“어. 몰랐어?”
“당연히 몰랐지. 난 자고 일어났더니 가게 통째로 여기 와 있었는걸.”
“내 참, 잘 들어.”
거드름피우는 목소리로 최세드릭이 설명을 이었다.
대던전 《어비스》에는 안전 구역이라고 불리는 층이 있다. ‘던전’과 ‘안전’이 한 문장 안에 쓰일 수 있다니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그 거대한 던전이 갑자기 세상에 나타나고 20년이 흘렀다. 20년 동안 헌터들이 대던전을 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보스를 처치한 뒤 이동용 게이트를 설치한 곳이 안전 구역이다.
“흐음, 알겠어. 여기가 그 안전 구역이라 이거지?”
나는 방금까지 산오징어회였던 오징어 숙회를 집어 먹고는 물었다. 그러나 최세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몰라.”
“……뭐?”
최세드릭은 원래 안전 구역을 산책하다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집에 가기 싫은 마음에 조금 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에테르 파장에 휘말려 이 필드에 떨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체계적인 설명에 기대했건만, 결국 최세드릭도 조난 중이라는 이야기다.
“하아, 난 또…… 나가는 법을 아는가 했지.”
“나갈 수 있는데?”
“어?”
최세드릭이 인벤토리에서 이동 스크롤을 한 장 꺼냈다.
“게이트로 순간 이동 가능한 스크롤이야. 이걸 쓰면 돼.”
“그걸 들고 있으면서 왜 안 돌아가고…….”
“그냥. 오늘은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왜오오옹(호오, 이 녀석 자연스러운 플러팅이 제법이구나).”
“……플러팅?”
아스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접시에 놓인 오징어 구이를 미음이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다행히 오징어를 뜯어먹느라 미음이는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때 불의 정령 한 명이 최세드릭을 불렀다.
“인간, 친구, 도움.”
“어, 내 참, 그렇게 자꾸 부르면 곤란하다니까. 그래, 간다, 가.”
툭, 테이블 위에 갓 잡은 물고기가 놓였다.
샤샤샥.
최세드릭이 자신의 검을 꺼내더니 순식간에 회를 떴다. 불의 정령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칼질, 멋짐, 완벽.”
“뭐? 이것도 해 달라고? 그래, 어쩔 수 없지.”
“퍼펙트, 고저스, 원더풀.”
신났네…….
그러니까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집에는 가기 싫은데 마침 정령들의 리액션도 화려했다. 이 정령들의 호응에 취해, 곧장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거였다.
물고기 몇 마리를 더 회 뜬 뒤에 돌아온 최세드릭은 이동 스크롤을 내게 건넸다.
“나는 여분이 있으니까 필요하면 이걸 써.”
“헉, 고마워. 진짜 고마워!”
사양하지 않고 곧장 받아들었다. 이 스크롤이 있으면 돌아갈 수 있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지도의 별 표시건 이벤트건 뭐건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어진 최세드릭의 말에 나는 절망했다.
“그런데 그걸 써도 돼?”
“어…… 왜?”
무슨 부작용이라도 있나? 아니면 F급 각성자는 쓸 수 없는 아이템인가?
“아까 가게 건물 통째로 왔다며? 스크롤을 써서 돌아가면, 그 부동산은 어떡하려고?”
…….
…….
아, 그러게. 내 가게…….
이대로 몸만 돌아가 봤자 집도 가게도 없이 딸린 식구만 여럿인 신세구나…….
좌절하는 그때, 갑자기 하늘에 커다란 불꽃이 나타났다.
불꽃이 공중을 빙빙 돈다.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열기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불의 정령들이 바닥에 납죽 몸을 엎드리고 환호했다.
“주인님, 현현, 환영.”
“주인님, 만세, 환영.”
[위대한 자: 영겁의 불꽃 크투가가 나타났습니다.]
[영겁의 불꽃 크투가의 정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공중을 떠돌던 불꽃이 점차 인간의 모습으로 화했다.
붉은 머리카락이 공중에 나부낀다.
탁! 소리와 함께 바닥에 발을 디딘 남자는 불꽃을 그대로 인간으로 빚은 듯한 외모였다. 겉보기는 50대쯤 되어 보였다. 머리카락과 수염, 눈동자가 모두 붉었다.
페페가 앞으로 달려 나가더니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 페페, 귀가. 인간들, 귀가, 협조.”
“……흠. 그래, 고생이 많았다.”
정령들의 주인은 다행히 조사를 제대로 사용했다.
그가 비딱한 자세로 나를 보더니 확 얼굴을 구겼다.
“왜 희순 씨와 같은 냄새가 나는 인간이 여기에 있지?”
뭐…… 누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