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 * *
그 시각.
기유현은 핸드폰을 보며 고민하는 중이었다. 권리을에게서 카톡이 와 있었다.
[권리을]
유ㅎ녀시 오느ㄴ ㅎ나 ㅁㄹ
“으음…….”
……이게 무슨 뜻일까.
9장. 영겁의 불꽃은 사랑을 싣고
인간의 모습을 한 크투가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에는 혼란과 짜증 그리고 그리움이 서려 있었다.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슬그머니 물러났는데 크투가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열기가 훅 끼친다. 어느새 숨소리도 들릴 거리였다.
“대답해라. 조난자여, 너한테 왜 희순 씨 냄새가 나는 건지.”
“네? 혹시…… 박희순 씨를 말하는 건가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크투가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 이 특이한 냄새를 잊을 리가 없지.”
“왜 사람 냄새를 맡고 그래요!”
나는 질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샤워는 아침에 했다. 하지만 이 필드는 여름 날씨인 데다 페페와 함께 한참을 걸었단 말이다.
이상한 사람을 보듯 눈을 흘겼더니 크투가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박희순은 우리 할머니인데요.”
여기서 또 할머니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다. 이 영겁의 불꽃과 할머니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었던 걸까.
내가 대답하자마자 불길이 잦아들었고, 한결 차분한 분위기가 되었다.
“크, 크흠. 그래, 손녀구만. 손녀란 말이지. 자, 자. 얼마든지 더 먹어라.”
크투가가 참치 접시를 내 쪽으로 밀었지만, 그가 화낼 때 다 타서 숯덩이가 된 지 오래였다.
“…….”
“…….”
“여기 손님 대접이 너무 빈약하구나.”
“페페, 성실, 억울.”
“뭐라고 했지?”
“참치, 참치, 참치.”
자신의 주인에게 개길 수 없었던 페페가 냉큼 다시 참치를 잡아 왔다.
새로 회를 뜬 반만 익은 참치를 집어 먹었다. 바삭하게 잘 구워져서 맛있었다.
“아스, 이것도 먹어 봐. 맛있어.”
“……많이 먹었어.”
“어엉? 소년, 골고루 먹어야 이 형님처럼 쑥쑥 자라지. 그래, 기분이다! 그거 다 먹으면 이 최세드릭이 사인해 줄게.”
“하아…….”
“왜옹, 왜오오옭(이 녀석 지금 딱 ‘이 짜증나는 인간은 뭐지.’ 하는 눈빛이었다).”
잠시 골치 아픈 현재 상황은 잊고 만찬을 즐기는데, 크투가가 다시 말을 걸었다.
“그래, 거…… 희순 씨는 잘 지내나.”
“……돌아가셨어요.”
“……!”
크투가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충격받은 얼굴이다.
“그래, 그랬군. 벌써 그렇게 되었나.”
표정에 회한이 짙게 묻어났다. 이 인간 모습을 한 불덩어리가 우리 할머니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희순 씨와 좋은 시간을 보냈었다. 하지만…… 슬픈 일이다. 인간의 시간은 너무도 짧구나. 나와 같은 불멸자는 언제나 필멸자의 그림자를 그리워하지.”
중얼중얼. 뒷말은 숨결에 흐트러졌다.
잠깐, 설마……?
문득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능성이 머리를 스쳤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할머니는 혼자 계셨다.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나 보다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아예 이야기 한 번 들은 적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사진 하나 남아 있지 않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큰아버지, 권지운, 나 모두 각성자다. 한 집안에서 세 명이나 연달아 각성자가 나온다라. 꽤 드문 확률 아닌가?
설마.
에이, 말도 안 돼.
나는 크투가를 빤히 바라보았다.
“으음…….”
“왜 그러느냐?”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한 크투가는 인간과 똑같이 생겼다.
만약 이 신 비슷한 존재인 크투가와 인간이 자식을 만드는 게 가능하고, 그래서 그 피가 내게 흐르는 거면 어쩌지?
집안에서 연달아 각성자가 나온 이유도 이 출생의 비밀 때문이라면?
나와 같은 의문에 도달한 듯 미음이가 눈을 빛냈다. 아닌 척해도 흥미진진해하는 기색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 출생의 비밀 좋아하는 K-드라마 애청자 같으니.
나는 조심스럽게 내 의심을 입에 올렸다.
“설마…… 그럼 당신이 우리 할아버지예요?”
주르륵.
최세드릭이 마시던 주스를 그대로 쏟았다.
“…….”
“…….”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크투가가 아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희순 씨와 나는 순수한 관계였다.”
“휴…….”
다행이다. 내 피 중 25%가 인외인가 하는 의심에서는 일단 벗어났다.
소중한 나의 인간성, 소중한 나의 유전자. 앞으로도 인간답게 살겠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각성자셨나요?”
“아니, 그녀는 각성자는 아니었다. 다만 별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지.”
점성술…… 같은 걸까?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럼 할머니하곤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그때 희순 씨는 숲속의 오두막에서 생활했단다. 에테르계를 떠나 방황 중이던 나는 우연히 그녀를 만나고, 그녀의 능력에 매료되었지.”
이야기가 길어질 기미다. 불의 정령들이 눈치껏 대방어회와 술을 가지고 왔다. 노릇노릇하게 잘 익은 방어살을 한 점 먹고 기화된 알코올을 훅 뿜어낸 크투가가 말을 이었다.
“희순 씨는 아주 입맛이 까다로워서 매 끼니 새로 한 쌀밥이 아니면 먹지 않았지.”
“……네?”
“절절 끓는 아랫목에서만 잠을 잤어.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장작을 패고 물을 길어 왔고.”
“…….”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를 그대로 내뱉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하지만 직접 숯을 만들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밥을 지었다는 이야기를 한참 들으니 역시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거…….
……밥셔틀?
아련한 표정에 그렇지 못한 추억이었다.
“하지만 나는 에테르계에 속한 불멸자다. 인과율의 제한 때문에 항상 그녀의 옆에 있을 수 없었어. 오직 별의 흐름에 따라서만 움직일 수 있는 몸.”
“…….”
크투가가 술잔을 비웠다. 공기 중에 알코올 냄새가 휙 퍼진다.
“그러다 어느 날, 희순 씨가 나를 불러서 말했다. 언제든 나를 소환할 수 있게 돌에 힘을 담아 달라고.”
잠깐, 설마 그거…….
나는 슬그머니 손을 테이블 아래로 감췄다.
크투가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자신을 언제든 불러 준다는 말에 기뻤던 크투가는 냉큼 자신의 힘을 담은 붉은 돌을 넘겼다.
그러나 다음 날, 할머니는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별의 흐름이 바뀌기 전까지 크투가는 오두막에서 할머니를 기다렸다. 그러나 할머니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에게 부여된 인과율이 한계에 달했다.
결국 크투가는 자신의 정원, 즉 이곳으로 돌아왔고 시간이 흘러 지금. 들려온 것은 한참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뿐.
이상한 이야기였다. 카페를 운영하실 무렵의 할머니는 이계의 신이니 던전이니 하는 것에는 일절 관심이 없어 보이셨다. 그런 할머니가 크투가를 만난 적이 있다니.
나는 생전의 할머니에 대해 더 알아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이는 나중 일이고, 일단은…….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에게 손을 보여 주었다.
“힘을 담은 돌이란 게 혹시 이거예요?”
“……!”
크투가의 반지.
이름부터 크투가의 이름이 들어 있으니 맞겠지.
이 반지는 김덕이 할머니가 만든 것이지만, 아이템에는 원료가 필요한 법이니까. 더구나 우리 할머니와 김덕이 할머니는 아는 사이셨고.
즉, 크투가 → 우리 할머니 → 김덕이 할머니 → 나로 전달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하겠지.
“어떻게 그걸 네가……!”
화르르.
크투가가 다시 커다란 불꽃의 형태로 변했다. 이 살아 있는 불꽃은 사방으로 분노를 뿜어내며 모든 것을 태우기 시작했다.
“주인님, 분노, 도망.”
불의 정령들이 우르르 뒤로 물러나고, 불길이 타올랐다.
“나는 그녀를 믿고 힘이 담긴 돌을 건넸다. 나를 속였어! 인간이 함부로 내 힘을 이용하라고 준 돌이 아니다!”
“으, 으악……!”
“어이, 야, 위험해!”
그대로 불길에 휘말릴 뻔한 나를 최세드릭이 뒤로 잡아당겼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화를 내던 크투가는 금방 푸시식 불길을 꺼뜨렸다. 축 늘어진 붉은색 머리카락이 시무룩해 보였다.
“하아…….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크투가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내 힘이 담긴 돌을 몇 번이나 소환했다. 원래라면 그녀가 소환되어야 하는데, 아무리 해도 응답이 없었지. 오늘 겨우 소환에 성공했는데, 웬 벽돌 건물이 날아오더군.”
당신이구나!
당신 때문에 내가 가게 통째로 여기로 소환된 거였어.
범인을 찾았다. 마음 같아서는 목이라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다.
“주인님, 실연, 슬픔.”
페페가 위로인지 뭔지 모를 말을 했다.
“그…… 말씀 잘 들었고, 사정은 잘 알겠어요. 저기, 음…… 기운 내시고요.”
원인이 크투가라면 해결책도 크투가가 갖고 있겠지.
“여기서 그 건물과 함께 원래대로 돌아가는 방법은 없나요?”
“내 알 바 아니다.”
“네?”
“이곳은 나의 정원. 한 번 들어온 이상 정원의 주인인 내 것이다.”
“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무슨 ‘금 그어놓고 넘어오면 다 내 꺼’ 이거예요?!”
항의했지만 크투가의 반응은 냉정했다.
“그 건물에 희순 씨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아, 네. 돌아가시기 전까지 사시던 건물이에요.”
“그렇다면 그 건물은 희순 씨의 흔적이다. 돌아가려면 얼마든지 돌아가라. 하지만 희순 씨의 흔적은 놓고 가거라.”
미쳤나 봐…….
순수한 관계라며, 순수한 관계라며!
아까 냄새 운운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현대인에게 부동산이 어떤 의미인데 그걸 놓고 가라는 거야!
그러나 크투가는 완고했고, 신에 가까운 존재로 보이는 그와 싸워서 이길 자신도 없었다.
고착 상태에 빠진 그때.
이제껏 얌전히 소리를 죽이고 내 무릎 위에 안겨 있던 라임이가 용맹하게 앞으로 나섰다.
“뀨우웃. 뀻…… 뀨우우웃!”
“어, 라임아!”
“뀨우…… 뀨우우!”
몸을 통통 튕기면서 라임이가 크투가에게 다가갔다.
“호오? 너는 얼마 전 가출한 불꽃의 조각 아니냐. 돌아왔군.”
역시 라임이가 그 가출했다는 조각이 맞았구나…….
라임이와 크투가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뀨우, 뀨우, 뀨우우, 뀻…….”
“뭐? 적법한 힘의 계승자? 자격을 갖추었다고?”
“뀨우우……. 뀻…… 뀨우.”
“흐음, 흠, 그래. 가출한 게 아니라 그래서 따라갔었다고, 흠.”
“뀨우, 뀨웃!”
“저 인간이…… 그래, 흠. □□가 지켜보는 □□의 주인, 호오…….”
불안하게 왜 내 쪽을 쳐다보면서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거죠?
얼마 전 성녀를 만난 이후로 당분간 의미심장충은 거절하고 싶은데요.
라임이와 대화를 마친 크투가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뜨뜻미지근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손녀여.”
“아깐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요?”
“내게 필멸자의 혈연은 유의미하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겠지. 너는 내 손녀나 마찬가지다.”
크투가가 씩 웃고는 이어 말했다.
“좋아. 너와 계약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