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92)

99화

“……네?”

내가 얼이 빠져 있는 사이 크투가는 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손녀여, 네게 전권을 위임하마. 너는 유일한 계약자로서 나를 소환할 수 있다.”

“왜웅, 왜우웅(크투가 님이 직접……! 인간, 제법이구나. 이건 좋은 기회다).”

“뀨웃, 뀨웃, 뀨우웃!”

옆에서 동물들이 폴짝폴짝 뛰었다.

“흠, 나쁘지 않아. 원시의 혼돈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순도 높은 힘이 느껴져.”

아스까지 이렇게 말한다.

띠링.

크투가의 선언에 따라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떴다.

[위대한 자: 영겁의 불꽃 크투가가 당신과의 계약을 원합니다.]

[계약 시 크투가의 가호를 얻을 수 있습니다.]

“…….”

잠시 가만히 시스템 창을 바라보고만 있자.

[계약 시 크투가의 가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계약 시 크투가의 가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나를 재촉하듯 반복적으로 창이 깜빡거렸다.

하지만…….

“이거 꼭 해야 하는 거예요?”

대충 분위기로 봐서 대단하다는 건 충분히 알겠다.

살아 있는 불꽃이 인간으로 변했다가 다시 불이 되었다가 하는데, 대단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시스템 창에서 말하는 명칭부터가 ‘위대한 자’라니까. 실제로 위대하겠지.

하지만 소위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하지 않던가.

달리 말하면, 원치 않는 큰 힘에도 원치 않는 큰 책임이 따른다.

아무리 대단한 힘을 준다고 해도 내가 그걸 잘 활용할 자신은 없었다. 어딘가에 나보다 더 적합한 존재가 있을 테다. 그런 생각에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차라리 최세드릭이 걸맞지 않을까. 강하니까. 그런 생각으로 옆을 돌아보았지만.

“엉? 왜? 부담스러워? 허, 참, 너한테 잘 어울리니까 받아들여. 너는 그거, 뭐냐, 커피 십타쿠니까!”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마…….”

“냐아아아, 냐아아아(커피 십타쿠, 커피 십타쿠)!”

“뀨우웃! 뀨우웃!”

우리 집 동물들이 신나서 따라하잖니…….

그 호칭을 아직 사용하다니. 나는 속으로 최세드릭이 올바른 언어 습관을 갖추기를 간절히 기도해 주었다.

그럼 황혼의 마왕(자칭)인 아스라면 어떨까.

“나는 불 싫어해.”

그러나 눈도 마주치기 전에 아스가 거절의 뜻을 밝혔다.

“으…….”

“걱정하지 마라, 손녀여.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변화도 없을 테니. 그저 그 반지의 힘을 강화하기 위한 계약이라고 생각하거라.”

망설임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래, 원두를 로스팅할 때 반지의 힘이 꼭 필요하기도 하고…….

에라, 모르겠다. 복잡한 생각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 주위에 한국에서 제일 큰 힘에 제일 큰 책임을 가진 남자도 있으니까. 나 한 명 정도는 별다른 각오 없이 이런 계약을 맺어도 어떻게 되지 않을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왼손의 반지가 뜨겁게 달아오르더니 시스템 창이 떴다.

[위대한 자: 영겁의 불꽃 크투가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적격자: 권리을의 의지에 따라 능력이 부여됩니다.]

[스킬: 영겁의 불꽃(S)

상세: (Lv.max) 크투가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잠깐, S급?

막연하게 강하다고 느끼는 것과 이렇게 등급 표시를 직접 보는 것은 체감 차이가 엄청났다.

“……히끅.”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이 나왔다.

“끅, 흡, 히끅!”

“어, 야, 죽지 마. 저 불덩어리가 무슨 짓을 했기에 숨이 넘어가!”

“아니, 나는 계약에 따라 스킬을 부여했을 뿐이다. 스킬 등급이 S급일…….”

“힉, 흡, 죽겠…… 끅!”

“왜우우웅(그런 걸로 놀라다니 간이 작은 인간이구나).”

“물, 물, 물.”

“여기, 물 좀 마셔.”

나는 아스가 건넨 물 컵을 비우고서야 겨우 딸꾹질을 멈췄다. 휴, 죽는 줄 알았네.

F급 물 몸에 S급 스킬을 얻고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을 하다 사망. 이런 내용으로, 어처구니없이 사망한 헌터에게 주는 ‘어윈 상’ 수상 유력 후보가 될 뻔했다.

간신히 소란이 진정된 다음.

갑자기 크투가와의 계약 때문에 화제가 넘어갔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귀환이다. 동산이 된 부동산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

“그러면 저기, 저 돌아갈 수 있는 거죠? ……내 부동산하고 함께 말이에요.”

크투가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안 돼. □□의 잔소리가 엄청나서,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은 한정되어 있다. 별의 흐름이 바뀔 때까지 기다리거라.”

“그게 언제인데요?”

“어디 보자…….”

크투가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햇빛 때문에 내 눈에는 별이 보이지 않지만, 그는 별의 흐름을 읽는 듯 생각에 잠겼다.

그의 침묵이 길수록 나는 불안해졌다.

스스로 불멸자라고 했으니 크투가는 아마 무척 긴 시간을 살았겠지. 아까 페페도 자그마치 1200살이라고 했잖아.

인간과 시간 개념이 다른 불멸자라든가, 바깥세상과 시간 흐름이 다른 세상은 클리셰다. 설마 그런 클리셰 같은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혹시, 막…… 300년 뒤다, 이런 건 아니죠?”

하늘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크투가가 씩 웃었다.

“내일이다.”

휴, 다행이다. 내가 걱정한 것보다 299년 364일은 빠르다. 바쁜 현대인을 존중하는 K-이세계에 감동했다.

“하루 뒤인 내일 밤, 포말하우트의 별빛이 비추는 때 별의 길이 열린다. 건물에는 이동마법을 설치해 둘 테니 그 길을 통해 돌아가면 된다.”

“……믿어도 되는 거겠죠?”

“그럼, 그럼! 손녀에게 나 영겁의 불꽃이 거짓말을 할까.”

그거…… 냄새, 아니, 흔적이란 건 괜찮은 거겠지…….

아무튼. 어쨌건 돌아가기 전에 하루는 이 한여름의 던전 안에서 보내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게 되면 역시,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페페와 불의 정령들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나를 빙 둘러쌌다. 그들의 눈에 호기심과 열망이 가득했다. 페페의 선창을 따라 정령들이 외쳤다.

“커피, 커피, 커피.”

“커피, 커피, 커피.”

정령들의 호응에 맞추듯 띠링 하는 소리가 울렸다.

[서브 퀘스트: 출장 영업은 끝나지 않아!

보라, 무구한 정령의 눈동자를.

들어라, 당신을 부르는 정령의 목소리를.

불의 정령들이 당신의 커피에 관심을 보입니다.

출장 영업을 통해 한 몫 크게 땡깁시다.

아이리시 커피 판매하기 0/20

보상: 경험치(200exp), 명성(10), 인기(20), 어디든지 연결☆신비의 문]

* * *

주노을은 가만히 앞서 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먼저 화제의 새로운 S급 헌터 최이찬.

몇 년 동안 실종 상태였던 <백은 길드>의 길드장 권석민.

그리고 <백은 길드>의 힐러 권지운.

독특한 조합이다. 도대체 어떤 연유로 이들이 사라진 단골 카페를 찾는지 무척 궁금하다.

“저기, 안 오세요?”

앞서 걷던 최이찬이 그녀를 불렀다.

“가, 간다는…….”

후다닥 걸음을 옮기면서 주노을은 흘깃 최이찬을 살폈다.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다.

이들 중 가장 신경 쓰이는 사람이라면 역시 이 최이찬이다.

그녀의 영입 제안을 가차 없이 거절했으니까.

‘로열이 어디가 어때서 그러냐는…….’

초기 멤버에 원거리 딜러가 많은 <로열 길드>는 만성적인 근거리 딜러 부족에 시달렸다. 이런 때 나타난 새로운 S급 근딜 버서커! 탐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예산을 쥐어 짜내 업계 최고 대우를 약속했다. 덤으로 한 달에 일정 금액까지 덕질을 지원해 주는 복리후생 제도까지!

그러나 돌아온 것은 안읽씹이었다. 사실은 핸드폰을 계속 꺼 둔 상태였을 뿐이지만, 주노을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 최이찬이 <백은 길드>의 부자와 함께 있다니. 설마 물밑에서 영입 약속을 한 건 아니겠지.

‘그렇게 둘 순 없다는…….’

이것이 주노을이 냉큼 이 일행에 끼어든 이유였다.

물론 그 이유뿐만은 아니다. 사라진 단골 카페의 행방이 신경 쓰인 것도 사실이다. 이제 그녀는 매일 그 카페의 커피를 마시고 리레 슬라임을 보지 않으면 하루를 제대로 보낸 것 같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거다.

이런 흥미진진한 건수를 놓칠 수는 없지. 잘 따라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내야겠다. 알아내서…….

‘나중에 헌챈에 후기 써야겠다는…….’

일행은 대던전 《어비스》의 던전 게이트를 지나 7층으로 이동했다. 앞장 선 사람은 권석민이었다.

“아들아, 이쪽이다!”

그는 마치 카페 주인이 어디 있을지 아는 것처럼 거침없이 던전 안을 나아갔다. 귀찮은 몬스터가 나타나는 길을 피해 워프 게이트를 탄다.

‘설마 이 길은…….’

주노을은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 자신의 의문을 입에 담았다.

“저, 권석민 헌터, 지금 영겁의 불꽃 크투가의 정원으로 가는 거냐는…….”

“그렇다. 거기가 틀림없어!”

통째로 사라진 카페가 왜 거기 있냐는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그 필드는 접근이 어렵다는……. 헌터가 들어가면 정원의 주인이 화내면서 불로 지진다는……. 완전 웰던이라는…….”

“그러면 다른 방법은 없나요? 저기, 그.”

최이찬이 주노을을 돌아보며 말끝을 흐렸다.

“주노을이라는…….”

주노을은 걱정으로 흐려진 최이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인을 걱정하는 시무룩한 강아지 같은 인상이었다.

카페 주인과는 무슨 관계일까. 최이찬과 카페 주인의 관계에 호기심이 생기는 한편, 이 문제를 해결한 뒤 감사의 뜻으로 최이찬이 <로열 길드> 계약서에 지장을 찍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영겁의 불꽃에게 구워지는 건 싫다. 하지만 S급 근딜 버서커를 위해서라면 해 볼 만한 게임이다.

기다려라, <로열>의 길드원들아. 길드장이 새로운 길드원을, 그것도 대어(大魚)로 데려갈 테니까!

주노을은 자신감 있게 선언했다.

“나만 믿으라는…….”

주노을은 주머니에서 작은 바늘을 꺼내 손가락을 땄다.

똑똑. 네 방울의 피가 주노을의 그림자 안으로 떨어졌다. 마치 피를 삼키듯 그림자가 일렁인다.

[스킬: 와이번 소환(S)를 사용합니다.]

그림자 안에서 네 마리의 날개 달린 소형 용이 튀어나왔다. 이를 알아본 권지운이 짧게 감탄했다.

“와이번……!”

주노을의 주요 스킬인 소환술이었다.

테이밍 스킬과의 차이는 대상을 길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노을의 피를 대가로 와이번은 소환 계약을 맺었다. 내용은 일행을 빠르게 목적지로 데려다주는 것. 계약에 따라 정해진 역할을 다할 뿐, 와이번에게 복종 의무는 없다.

즉, 이는 달리 말하면.

“으읍, 욱! 아들아, 쓸모없어진 나를 여기다 버리려는 거냐! 왕위를 계승하는 중인 거냐.”

“아버지, 머리 울리니까 큰소리는 좀, 읍…….”

“윽, 뭔지 모르겠는데 뭐가 막 핑핑 도는데요.”

“미안하다는…….”

속도를 우선시하다 보니 승차감이 엄청나게 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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