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와이번은 순식간에 영겁의 불꽃 크투가의 정원으로 공간을 도약했다.
“저기 있다는!”
햇볕이 내리쬐는 해변의 절벽 위. 벽돌로 지어진 카페 건물이 보였다.
그러나 와이번이 카페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들은 의아함을 느꼈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작은 불덩어리들이 카페 앞에 일렬로 줄을 서 있었다.
“자, 한 번에 하나씩. 밀지 말고!”
“커피, 커피, 커피!”
경쾌한 대답이 뒤따랐다.
* * *
시간, 넘치도록 있음.
재료, 재고 충분함.
소비자, 호기심이 넘치는 상태.
퀘스트, 괜찮아 보이는 보상 있음.
출장 영업을 하기 위해 완벽한 조건이 갖추어졌지만,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이 불의 정령들을 카페 안으로 들여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몸이 불로 이루어져 있는 이 불의 정령들이 들어왔다간 건물 안이 금방 타 버릴 테니까.
하지만 그런 이유로 정령들에게 커피를 판매하지 않겠다고 했다간 화를 낼 기세였다. 기대에 찬 눈동자가 오롯이 나를 향했다.
“퍼펙트, 고저스, 원더풀!”
“넘버원, 판타스틱, 커피!”
옆에서 페페가 실시간으로 푸는 후기 역시 정령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페페, 너 바이럴 잘하는구나…….
물러서지 않을 기세의 정령들과 함께 일단 카페가 있는 해변으로 돌아온 다음, 나는 생각에 잠겼다.
안에서 커피를 만들어 밖으로 가져다주는 방법도 있지만 아무래도 번거롭다.
그러느니 차라리 이게 낫겠다.
나는 가게 1층에 딸린 창고에서 적당한 크기의 판과 방염포를 꺼냈다.
대체 왜 이런 물건이 창고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이 창고는 가게 크기에 비해 큰 데다 온갖 물건이 다 있었다.
‘할머니는 왜 이런 걸 모아 두신 걸까…….’
아무튼, 의문은 뒤로 하고.
최세드릭과 아스가 도와줘서 원하는 물건은 금방 만들 수 있었다. 바로 바깥에서 걸으면서 주문을 하고 음료를 받을 수 있는 카운터다.
이른바 워크 스루 카운터.
“자, 한 번에 하나씩, 밀지 말고!”
호기심 넘치는 불의 정령들이 내 말에 따라 재빨리 일렬로 줄을 섰다. 모두들 아이리시 커피를 주문했기 때문에, 주문을 처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커피, 커피, 커피!”
도자기 잔에 크림을 잔뜩 올린 커피를 마지막 불의 정령이 받아들었다. 한층 더 뜨거워진 불을 뿜으며 정령이 커피를 마시는 순간, 곧장 퀘스트 완료 알림이 떴다.
띠리링.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출장 영업은 끝나지 않아!’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수령해 주세요.]
[경험치: 200exp를 획득했습니다.]
[어디든지 연결☆신비의 문을 획득했습니다.]
[명성: 10 / 인기: 20을 획득했습니다.]
[카페 리을의 현재 등급: D]
“어, 저길 봐!”
“캬갸갸옼(와이번이다)!”
하나씩 보상을 확인하려는 그때, 최세드릭과 미음이의 날카로운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어, 저건…… 몬스터? 아니, 사람이 타고 있는데?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란 하늘 한가운데에 드래곤을 닮은 몬스터 네 마리가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각각 사람을 한 명씩 태운 채 날갯짓을 한다.
시큰거리는 눈을 손으로 비빈 후 다시 살펴보려는 찰나였다.
잠깐…… 저 와이번들, 이쪽으로 가까이 오잖아?
현란한 곡예비행이 하늘을 수놓았다. 누군가의 비명이 bgm으로 울리는 가운데, 와이번이 바닥에 착지했다.
“아야야, 아프다는…….”
스르륵. 그림자에 녹아내리듯이 와이번이 사라지고, 와이번의 등에서 내린 사람들이 앓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들의 면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저기요?”
다 아는 사람들이구만…….
* * *
“……그래서, 정령들에게 커피를 팔고 있었어.”
상황을 정리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먼저, 커피를 더 마시고 싶어 하는 불의 정령들을 진정시켜 돌려보내는 데 한참. 또 와이번을 타고 나타난 방문자들이 멀미를 극복하는 데 또 한참.
겨우 마주 앉아서 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사실을 정리하면 바로 이렇다.
첫 번째, 주노을 씨. 자주 우리 가게에 와서 커피를 마시던 단골이다.
“갑자기 가게가 없어져서 걱정했다는…….”
“아하하,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아, 저는 권리을이에요. 리을이라고 불러 주세요.”
“주노을이라는……. <로열 길드>의 장을 맡고 있다는…….”
헉, 유명한 분이셨구나. 나처럼 욜로 라이프를 추구하는 분인 줄 알고 혼자 내적 친밀감을 느꼈었는데…….
가만, 이렇게 되면 빅3 중 두 길드의 장이 우리 가게 단골인 상황이다.
단골들이 너무 강해? 내가 먹인 S급들?
알고 보니 그녀는 S급 소환술사로, 와이번을 소환해 이곳으로 날아왔다고 한다.
두 번째는 권지운.
“윽, 리을아, 물 좀, 읍…….”
“괜찮아? 식은땀을 엄청 흘리는데. 얼른 여기 얼음물 좀 마셔, 자.”
물 컵을 전부 비우고도 정신을 못 차린다. 나는 권지운을 의자에 편히 기대앉게 해 주었다.
멋진 비행을 했나 본데.
그리고 최이찬.
“하하……. 오랜만이야, 리을아. 잘 지냈어?”
난 그 태연한 인사를 듣고 어이가 없었다.
무슨 이상한 쪽지 한 장만 남기고 그대로 사라져 놓고, 뭐? 잘 지냈어?
“오랜만이야? 사람을 걱정시켜 놓고 그게 할 말이야?”
등이라도 한 대 시원하게 후려갈길까 했지만 나는 곧 포기했다. 얘가 그 사이에 어째 몸이…… 더 단단해졌기 때문이다. 때려 봐야 내 손이 더 아플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분위기가 달라졌다. 순한 대형견 같던 얼굴에 살짝 날카로운 기색이 감돌았다. 옷도 늘 입던 트레이닝복이 아니라 제대로 된 방어구를 걸쳤다.
보다 헌터다워졌다고 할까. ‘더 강해져서 돌아올게.’라던 쪽지의 내용이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지자 퍽 어색했다.
등짝에 스매시를 날리려다 어중간하게 멈춘 내 손을 최이찬이 가볍게 잡았다. 최이찬의 손바닥에 잡힌 굳은살이 내 손가락에 닿았다.
“…….”
뒤통수에는 아스의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낯선 사람이 많으니 긴장했나 보구나.
미안하기는 한지 최이찬이 한 손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하……. 미안. 그게,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던전 안에서 핸드폰이 안 터지더라고.”
“당연하지…….”
“던전을 나와서 전화하려니까, 이게 또.”
최이찬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여 주었다. 어디 부딪쳤는지 액정이 완전히 박살 난 상태였다.
“세게 잡았더니 이렇게 돼서, 하하.”
머쓱한 웃음이 뒤따랐다.
눈을 접으며 웃는 모습은 내가 아는 최이찬이 맞았다. 하긴 최이찬이 최이찬이지 그렇게 달라질 일이 있겠어.
겨우 어색한 느낌이 사라져서 나는 어깨에 힘이 빠졌다. 최이찬도 나를 따라서 헤헤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큰아버지였다.
오래전 던전에서 실종된 이후로 계속 소식이 없었던 큰아버지. 최이찬이 던전에서 우연히 그를 발견했다고 한다.
내가 미래를 바꿔서 최이찬이 살아났고, 최이찬이 큰아버지를 구해서 다시 미래가 바뀌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쁘면서도 감격스러웠다.
“리을아!”
“큰아버지!”
예전에 나한테 잘해 주셨는데. 감격에 차 큰아버지와 얼싸안은 것도 잠시.
“아이고, 아무튼 이렇게 만나서 다행이다. 리을이 네가 지금 고등학생인 거 아니냐. 학생이 어쩌다 카페를 개업한 거냐.”
“저…… 스물세 살인데요.”
내 나이를 몇 살이나 어리게 알고 계셨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걸까.
“그러냐? 어쩐지 조카가 좀 큰 것 같더라니. 하이고, 그래, 오차율이 이 정도에 그쳐서 다행이다. 더 어긋났다간 아예 일을 그르칠 뻔했어.”
“……일이라뇨?”
큰아버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조카야, 잘 들어라. 네 할머니가 남긴 물건 중에 크투가의 힘이 깃든 것이 있다. 지금은 누가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꼭 찾아야 한다.”
“이거 말인가요?”
나는 손에 낀 반지를 큰아버지에게 보여 주었다.
“헉! 그걸 벌써 손에 넣다니. 아이고, 장하다, 우리 조카. 그럼 이제 그 미친 노인네…… 아니, 불덩어리를 만나야 한다.”
“불덩어리…… 혹시 크투가를 말하는 거예요?”
“그래, 놀라지 말고 들어라. 이 필드에는 비밀의 섬이 있다. 불의 정령의 안내를 받아야만 길이 열린다고 하지.”
“네, 다녀왔어요.”
“그 섬에 있는 크투가의 신전에서 크투가를 만나 계약을 맺어야 한다. 당황스럽겠지만 지금은 이 큰애비 말을 믿고…….”
“계약…… 벌써 맺었는데…….”
“…….”
“……큰아버지?”
큰아버지가 말을 잃었다. 허탈하신 것 같다. 본의 아니게 그의 말을 가로챈 것 같아 나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크흠, 크흠! 우리 조카, 스스로 잘하는 아이가 되었구나. 참 잘 컸어, 하하하!”
하지만 어떻게 오랜 기간 실종 상태였던 큰아버지가 크투가의 반지와 계약에 대해 알고 있는 걸까. 설마 큰아버지도 성녀를 만났다거나?
“그보다 큰아버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떼잉, 이 세계선은 너무 많은 일이 뒤엉켜 있군. 그 일을 막으려면…… 흠, 흐음…….”
중얼중얼, 뜻 모를 말이 이어졌다. 이래서는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기가 어려웠다.
나는 감격에 차 포옹한 팔을 슬그머니 풀었다.
그래, 큰아버지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다 헤아리겠어. 나는 큰아버지가 마음을 진정시키시길 바라며, 막 얼음물을 원샷한 권지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큰아버지는 어떻게 된 거야?”
“미로던전에서 길을 헤매다 나왔더니, 시간…… 윽, 읍.”
권지운이 창백한 낯빛으로 또 구역질을 했다.
큰아버지가 미로던전에서 길을 잃었는데, 안에서는 한 달이었지만 나오니 6년이 흘렀다는 말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더 물어봤다간 금방 안에 든 것을 쏟아낼 것 같아, 나는 일단 말을 끊었다.
“……됐어, 나중에 들을게. 그냥 쉬고 있어…….”
그러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권지운이 업무를 대행한 지 오래되었지만 원래 <백은 길드>의 길드장은 큰아버지였다. 큰아버지가 돌아오셨으니 이제 권지운의 부담이 줄어들 것 같았다.
“그럼 큰아버지, 이제 길드장으로 복귀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큰아버지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어, 정말요?”
“네?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금시초문이었던 듯, 권지운도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는 이미 헌터로서의 능력을 전부 잃어버렸다. 지금은 각성자도 아닌 일반인이니 물러날 생각이다.”
“그게 무슨……. 아버지, 어떻게 된 일인가요.”
“던전에서 일이 좀 있었다.”
“……!”
의문이 더더욱 부풀어 오른다.
그러나 큰아버지는 더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끔찍한 기억을 잊으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