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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101/192)

101화

큰아버지가 각성자가 아니게 되었다니 그게 정말일까? 능력이 강해지거나, 반대로 약해지는 경우는 있지만 아예 각성자가 아니게 되다니 이런 사례는 들어 본 적 없었다.

“냐아아아(정말이다).”

미음이가 나른한 울음으로 내 의문에 응답했다.

‘그럼 혹시…… 되돌리는 건 가능해?’

“왜웅, 왜우웅(불가능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에테르 친화력은 소멸했고, 시스템의 접속 권한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럴 수가…….’

“돌아가면 우선 본청에 조사 의뢰를 넣겠습니다. 실종됐던 던전에 대해서도 재조사를……. 뭘 하시는 겁니까?”

대뜸 큰 폭탄이 터진 가운데 큰아버지 혼자만이 태연했다. 권지운의 말을 끊고 큰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조카야, 종이하고 펜 있느냐.”

“아, 네, 있어요. 여기.”

나는 서랍에서 종이와 펜을 찾아 큰아버지에게 건넸다. 큰아버지는 휘날리는 글씨체로 뭔가를 끼적거리더니 지장을 찍어 권지운에게 내밀었다.

임명장

성명: 권지운

위 사람을 <백은 길드> 길드장으로 임명합니다.

권석민 (인)

“……아버지!”

“오늘부터 네가 길드장이다. 자, 축하의 박수! 얼른 박수치거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분위기에 휩쓸려서 다들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해결된 건 하나도 없지만 다 같이 박수를 치니 대충 축하 분위기가 났다.

“축하드린다는…….”

“하하, 축하드려요.”

“어둠이 그대와 함께하리니.”

이렇게 얼결에 던전 안에서 <백은 길드>의 새로운 길드장이 임명되었다.

권지운은 여전히 머리가 아파 보였는데, 멀미 때문은 아닌 듯했다.

* * *

던전 안에도 밤이 찾아왔다. 뜨겁게 타오르던 해도 저물고 붉은 달만이 고요한 밤바다를 비추었다.

내일 밤에나 돌아갈 수 있으니 하루는 이 해변 던전에서 지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가게 건물에 있는 방은 모두를 재우기엔 모자랐다.

돌아가는 방법도 알아냈고 크투가가 내게 무사 귀환을 약속했다. 그러니 찾아와 준 사람들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했는데.

“아버지도 드디어 돌아오셨고 이렇게 여유로운 것도 오랜만인데 굳이 서두를 필요 있겠니.”

“얘 이름이 라임이었냐는……. 하아, 너무 귀엽다는…….”

“어, 난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하하하, 난 아직 집이 없어서.”

모두 각자의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그럼 가게 바닥에 이불이라도 깔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큰아버지가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캠핑이다! 바다에 왔으면 당연히 캠핑이지!”

“좋다는……. 이런 인싸 이벤트 한번 해 보고 싶었다는…….”

그 사이에 큰아버지와 친해진 주노을 씨가 냉큼 동의의 뜻을 밝혔다.

이렇게 갑자기 ‘쉬어 가는 에피소드 여름휴가 편’에 걸맞은 분위기로 캠핑이 결정되었다.

다들 헌터인 만큼 인벤토리에 던전 탐색용 캠핑 장비를 갖췄다. 해변에 텐트를 설치하고, 불의 정령들이 준 해산물을 구우니 그럭저럭 분위기가 났다.

안전하다고는 하나 어쩌다 던전에서 캠핑을 하는 신세가 됐는지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하지만…….

뭐, 에라 모르겠다. 재밌으면 됐지.

다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유현 씨도 여기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은근히 친화력이 좋은 성격이니 이 뜬금없는 조합 사이에서도 잘 적응할 것 같은데.

지금쯤이면 가게 건물이 통째로 사라져서 놀랐으려나.

무사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알리고 싶은데 핸드폰이 연결되지 않으니 답답했다. 아직 미친 사이비 종교맨을 만난 일도 말하지 못했는데……. 여기서 나가는 대로 곧장 연락을 해야겠다.

이전에 자신의 비밀을 밝히면서 기유현은 마신의 부활을 막으려 한다고 말했다.

회귀자라는 공통점이 있을 뿐. 그 목표에 내가 기여할 부분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가 신경 쓰였다.

“그래서 리을 씨한테 말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아. 안 된다. 심장에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를 뻔했다. 이렇게 다 같이 친교를 쌓는 시간에 떠올리기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가지를 뻗어 나가는 생각을 애써 끊어 내고 나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IT 강국인데 왜 아직까지 던전 안에서 와이파이가 안 되냐는…….”

연결이 끊긴 스마트폰을 들고 괴로워하는 주노을의 중얼거림이 배경음처럼 들려오는 가운데.

문득, 나는 최세드릭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딜 간 거지? 아까 텐트를 칠 때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

“아스, 잠깐만.”

“어디 가려고?”

내가 몸을 일으키자 아스도 얼른 나를 따라오려고 했다. 그러나 반대쪽에서 붙잡는 손길 때문에 저지되었다. 큰아버지였다.

“알바생 소년, 여기, 이리로 와서 앉아라. 아직 어린데 아르바이트를 그렇게 열심히 한다지. 하이고 장하다. 이리 와서 더 먹어라.”

탁!

아스가 거칠게 큰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손대지 마라. 이 손에는 심연의 마력이 잠들어 있어서 말이지.”

“…….”

느슨하던 분위기가 얼어붙는다. 생선구이를 뜯어먹던 큰아버지가 가만히 아스를 바라보고, 권지운이 수습을 할 요량으로 재빨리 끼어들었다.

“아버지, 명절날 친척도 아니고 뭡니까. 어린 친구들끼리 놀게 두세요.”

“떼잉, 아들아, 길드장 임명장을 받았다고 나를 이제 뒷방 늙은이 취급하는 게냐.”

“하아……. 멋대로 떠넘기신 거 아닌가요.”

나중에 권지운에게 두통약이라도 챙겨 줘야겠다.

옆에서 권지운이 이마를 짚거나 말거나, 큰아버지는 계속해서 아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그래. 하지만 그 손, 내 눈에는 접속이 끊긴 것처럼 보이는데. 각인이 이미 소멸했군.”

“훗……. 그걸 간파하다니, 인간치고는 제법이군.”

통했다?!

아스는 얌전히 큰아버지의 옆자리에 앉았다. 큰아버지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면서 말했다.

“이런 장한 아이에게는 용돈을 줘야지. 음…… 아, 지갑이 없네. 아들아.”

“……여기 있습니다.”

권지운이 자신의 지갑을 통째로 큰아버지에게 건넸고, 큰아버지는 안에서 지폐를 한 뭉텅이 꺼냈다.

“자, 용돈이다.”

“……됐어, 그런 거.”

“어허, 어른이 주시면 네, 하고 받는 거다. 얼른 받아라.”

“…….”

으음, 저 분위기로 봐선 그대로 둬도 별일 없겠군.

이 틈에 나는 슬쩍 캠핑장을 떠나 최세드릭을 찾아 어둠에 잠긴 해변을 향했다.

최세드릭을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기척이 없는 해변의 구석진 곳에서 페페의 붉은 몸이 빛을 발했고, 구슬픈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하아…….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이 상황 어째 기시감이 드는데.

최세드릭은 모닥불 맞은편에 페페를 앉혀놓고 우울한 표정으로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페페는 지루한 표정이다.

“거기서 뭐 해?”

“……!”

생각에 깊이 빠져서 내 인기척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최세드릭의 뺨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너, 너어, 너는! 사람이 심각해 보이면 모른 척해 줘야지!”

“어, 그러려고 했는데…….”

페페가 제발 어떻게 좀 해 달라고 계속 눈빛을 보내더라고.

아까부터 집에 가기 싫다고 말하는 게 이상하긴 했는데, 왜 여기서 혼자 우울해하고 있는 걸까.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야기라도 들어 볼 요량으로 최세드릭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퍽 지루했는지 페페는 내가 오자마자 냉큼 달아났다.

“페페, 지루함, 귀가함!”

탁, 탁, 탁…….

페페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해변은 파도 소리와 모닥불 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최세드릭은 나를 쫓아내지는 않았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타오르는 모닥불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하아…….”

“…….”

나는 금방 지루해졌다.

그렇다고 이렇게 ‘나 무슨 일 있음’이란 티를 내는 최세드릭을 놓고 돌아가기도 그랬다. 음, 그럼 내가 먼저 물어보지 뭐. 어차피 최세드릭한테 할 말도 있었고.

“무슨 일인데?”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으로 끝나는 거 알아?”

“어? 그야 알지. 둘 다 죽잖아. 갑자기 그게 왜?”

“하아……. 그러니까 너한테는 말 못 해.”

“……?”

우수에 찬 눈으로 하기에는 퍽 뜬금없는 소리였다. 앞뒤 말이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그냥, 길드 문제 때문에 좀……. 신경 쓰지 마.”

“그래.”

길드라면 <씨앤엘> 관련이겠지. <씨앤엘>에는 나 역시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는 데다, 길드 내부 문제를 꼬치꼬치 묻기도 그랬다.

그래서 단답으로 대답했는데 최세드릭은 알아서 다시 말을 꺼냈다.

“야.”

“왜?”

“사람이 갑자기 변하는 건 이유가 뭘까?”

“무슨 일인데 그런 걸 물어?”

“아, 아,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그냥, 거 뭐냐, 일반론! 그래, 일반적으로 말이야.”

무슨 일 있기는 있구나…….

나는 점점 힘을 잃어 가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최세드릭의 모호한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았다.

“으음……. 기억 상실?”

“아니, 기억은 멀쩡해. 옛날에 있었던 일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그럼 그냥 심경의 변화 아냐? 그냥 오늘부터 착하게 살아야지, 세끼 잘 챙겨 먹고 운동도 해야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잖아.”

“아니. 그런 변화가 아니라, 꺼림칙하기도 하고, 어쩔 땐 다른 사람이 된 거 같기도…….”

최세드릭이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쏟아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떠오르는 단어를 그대로 입에 올렸다.

“그러면 빙의 이런 거 아냐?”

“뭐? 너, 무,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아니, 일반론이라니까. 일반적으로 그런 클리셰가 있다 이거지.”

“쳇……. 됐어.”

정말로 이 화제는 이제 끝이라는 듯 최세드릭이 말을 끊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뭐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냐? 뭔데?”

“아, 그거. 고맙단 말을 하려고.”

“그래, 고맙다고……. 뭐, 뭐 뭐, 뭐?!”

그렇게 놀랄 일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뒤로 기울이는 최세드릭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멀리 캠핑장의 모습이 보였다. 권지운은 쓴웃음을 지으며 큰아버지를 말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이 진짜로 곤란해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 저래 보여도 나름 즐거워하는 거다.

권지운과의 관계를 계속 피했다면 저런 모습도 못 봤겠지.

화해를 한 결정적 계기는 <백은 길드>의 사건이었지만, 그 전에 도움이 된 것은 최세드릭의 말이었다.

“그날, 몬스터지옥 안에 들어갔을 때. 세드릭 네가 말했잖아. 하나뿐인 가족이니까, 후회 안 하게 할 수 있는 건 해 보라고.”

“…….”

“그 말이 되게 큰 도움이 됐어. 그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마침 여기서 만나네.”

“…….”

꺼져 가는 모닥불을 앞에 놓고 진지하게 이런 말을 하니까, 정말이지…….

엄청나게 민망했다.

“아무튼, 그러니까 세드릭 너도 우울한 생각 그만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웃으며 말을 붙이는데.

벌떡.

최세드릭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래,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지.”

“……?”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야. 네 말이 맞아. 피하기만 해서는 끝이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봐야지.”

“어, 어……?”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고 진취적인 표정을 짓는다. 그대로 계몽 포스터로 써도 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최세드릭은 인벤토리에서 이동 스크롤을 한 장 꺼냈다. 스크롤을 찢기 전, 마지막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미안하지만 나 먼저 간다. 나가서 다시 보자. 그때는 카페에 손님으로 갈게.”

빛이 반짝이더니 순식간에 최세드릭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쨌건 기운을 차렸으니 다행이다. 다행이긴 한데…….

“로미오와 줄리엣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 방법도 어딘가엔 있을 거야.”

마지막에 한 이 말만은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얘가 고전 명작을 감명 깊게 읽었나?

모닥불이 완전히 꺼졌다. 나도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몸을 일으키는 그때였다.

“리을아.”

“……어.”

나를 찾던 걸까. 최이찬이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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