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어, 나 찾으러 온 거야?”
“그래, 안 보여서.”
“잠깐 세드릭이랑 이야기 좀 하느라고.”
“……아.”
최이찬이 흘깃 모닥불 쪽을 바라보았다.
최세드릭은 이미 돌아간 다음이었다. 남은 것은 완전히 꺼진 모닥불의 흔적뿐.
최이찬의 눈에 보일 듯 말듯 날카로운 빛이 감돌다가 미소 속에 녹아 사라졌다.
“<씨앤엘>의 최세드릭이었지, 그 사람. 그 사람하고 친해?”
친한가?
연락처를 알긴 하지만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는 아니다. 몬스터지옥에 같이 휘말리긴 했지만 우연이었고. 푸른 세라에노꽃을 살리는 일을 내가 도와주긴 했지만 그냥 그것뿐.
친하다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모르는 사이는 아닌 정도다. 나는 어중간한 대답을 입에 올렸다.
“그냥, 뭐…… 아는 사이야. 오늘은 우연히 여기서 만났고.”
“……그래.”
어둠에 잠긴 해변을 잠시 같이 걸었다. 조용한 그가 낯설다.
잠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는데 최이찬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저기, 권리, 노파심인지도 모르겠지만.”
“응?”
“조심하는 게 좋아. 저기, 그, <씨앤엘>은.”
나는 걸음을 멈추고 최이찬을 올려다보았다. 조심스러운 말투였으나 표정은 진지했다.
나는 어렵지 않게 이유를 찾아냈다.
“……<백은>이랑 얽힌 것 때문에 그래?”
지난번 긴꼬리불사조 건도 그렇고 <씨앤엘 코퍼레이션>이 <백은 길드>를 적대적 합병하려 했다는 의혹까지 불거져 <던전관리청>에서 <씨앤엘>을 조사 중이라고 했다.
권지운에게 자세하게는 듣지 않았지만, <백은 길드>에서 만난 거만한 꼰대와 박희영의 자백으로 곧 결론이 날 것 같다던가.
“뭐, 그런 것도 있고.”
그것만은 아니라는 투다.
하지만 최이찬은 더 말하지 않고 그냥 씩 웃었다.
<씨앤엘>과 <백은>이 얽힌 사정에 최세드릭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완전히 무관하리라고 믿는 건 아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낙천적인 성격은 못 되었다.
최세드릭이 급조된 캠핑에 끼지 않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것도 권지운이 불편해서겠지. 보기보다 삽질 잘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나 우울함’ 티를 내는 최세드릭을 못 본 척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나는 아무래도 사람이 좀 어중간한 모양이다.
우리는 캠핑장 쪽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찬아, 네가 큰아버지를 구했다며? ……고마워.”
“어? 아, 아니야! 그냥 우연히……. 권리 너한테 도움이 됐으면 다행이야.”
최이찬이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귓불이 살짝 붉다.
당연한 말을 듣는 데도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은 정말 내가 아는 최이찬다웠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그거, 수련은 다 끝났어? ‘더 강해져서 돌아올게.’라고 했잖아.”
“음…….”
최이찬이 잠시 생각하더니 단호한 투로 대답했다.
“그래, 끝났어.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지.”
“다음 단계?”
“어, 그건…….”
“왜오오옭!”
최이찬이 다시 뭐라 말하려는 그 순간, 미음이와 라임이가 우리 앞에 불쑥 튀어나왔다. 미음이는 입에 자신의 장난감인 사탕수수 잎을 물고 있었다.
그 바람에 대화는 자연스럽게 그대로 끊겼다.
“왜웅, 왜우우웅(거기 큰 인간, 나와 놀아 줄 수 있는 권리를 주마)!”
“뀨우우웃!”
“아하하하, 그래,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최이찬의 손짓에 따라 미음이와 라임이가 폴짝폴짝 뛰었다. 잘 놀아 주는 사람이 와서 신이 난 모습이었다.
“이찬이 너무 괴롭히지 말고.”
“캬갸갸옭!”
“뀨우!”
전혀 듣지 않는군.
“어디…… 갔다 오는 거야. 나만 내버려 두고…….”
기운 없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아스가 주노을 씨와 큰아버지 사이에 끼여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아스의 얼굴에 피로감이 가득했다.
섬세한 우리 집 아르바이트생이 견디기엔 지나치게 인싸스러운 환경이었던 모양이다.
* * *
다음 날 밤.
어두운 밤하늘에 반짝거리는 별이 나타났다. 별빛이 흩뿌려진 하얀 모래사장 위로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투가가 말한 별의 길이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비록 이 해변은 무척 아름다웠으나, 던전은 던전. 이제는 바깥이 절실하게 그리웠다.
“와이파이가 필요하다는…….”
그래, 핸드폰도 안 되고 말이지.
나는 마지막으로 일행들을 살펴보았다.
크투가가 가게 건물에 이동 마법을 설치한다고 했으니, 그냥 건물 안에서 같이 이동하면 되는 거 아닌가 했지만…….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구나.”
“왜요?”
“인간 옮기는 건 자신 없거든. 까딱하면 사람을 두 명으로 복제할 수도 있고, 반만 갈 수도 있고.”
“……걸어갈게요.”
크투가의 말을 듣고 재빠르게 포기했다.
때문에 어제 멋진 캠핑을 즐긴 인간들과 우리 집 동물들을 더하니 일행은 상당한 대인원이 되었다.
“라임아, 나랑 같이 가도 괜찮아?”
크투가의 말에 따르면 라임이는 가출한 ‘불꽃의 조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던전이 라임이의 원래 집일 텐데. 기껏 돌아왔는데 집을 떠나도 괜찮을까.
그런 뜻에서 물었지만…….
“뀨우, 뀨우웃, 뀨!”
라임이가 몸을 통통 튀기며 동그라미를 그렸다.
“데려가라. 그곳이 마음에 든 것 같으니.”
크투가 역시 이렇게 말하니 괜찮겠지.
“음메에에!”
그리고 라임이를 바짝 따라다니는 우리 집 황금삼각뿔소도 함께였다. 자꾸 라임이를 핥으려 드는 통에 떼어 놓느라 고생했지.
소의 등에는 불의 정령들이 선물로 준 해산물이 실려 있었다.
얘도 슬슬 이름을 지어 줘야 할 텐데 뭐로 할까. 으음, 소…… 소 이름, 음…….
나중에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고.
“페페, 이별, 슬픔.”
“잘 지내, 페페.”
모두와 인사를 마치고 드디어 출발하려는 때.
크투가가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별이 가리키는 길을 곧장 따라가면 원래 있던 곳이 나올 거다.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
“저기…… 그런 불길한 말은 하지 말아 주실래요……?”
뒤를 돌아보면 돌이 된다거나 하는 저주가 있을 것 같잖아.
다 같이 별의 길 안으로 발을 디뎠다.
밤하늘을 연상시키는 어두운 공간에 빛이 길게 이어졌다. 별의 길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별의 길을 따라 얼마간 걸었을 무렵이었다.
“어……?”
갑자기 모래 폭풍이 부는 것처럼 눈앞이 흐려졌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노이즈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메시지.
[방금 권한이 없는 사용자가 서비스에 접속을 시도했습니다.]
[본인이 접속한 것이 아닐□□ □□□□ □□…….]
당황한 것도 잠시.
곧 노이즈가 걷히고 알림 창도 사라졌다. 이제 괜찮아졌나 보다.
안심하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다 나는 문득,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분명 방금까지 바짝 붙어서 함께 걸었는데, 양옆은 그저 어둠이었다. 손을 뻗어 보았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빠? 큰아버지? 이찬아! 김아스, 어디 있어?!”
까마득한 어둠 속에 내 목소리만 울린다. 품에 안고 있던 라임이도 어느새 사라졌다.
나는 발밑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아갈 방향을 알려 주던 빛의 길이 보이지 않았다. 빛이 꺼져 든 발밑은 어두컴컴해 이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들, 어디 있어요?!”
나만 혼자 떨어졌다. 왈칵 불안감이 차올랐다.
설마 이 검은 공간에서 계속 헤매야 하는 건 아니겠지. 상상만으로도 오싹 소름이 돋는다.
“후우, 하…….”
침착하자. 비슷한 일은 이미 한 번 겪었잖아. 그래, 성녀가 나를 이상한 공간으로 불러냈을 때처럼 말이다.
이번에도 성녀가 나를 부른 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다른 사람들도 사라졌겠는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눈앞의 허공을 향해 외쳤다.
“……불렀으면 빨리 나와!”
대답은 없다. 잠시 기다렸지만 주변은 어둠 그대로, 금발의 판타지풍 옷을 입은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성녀가 부른 게 아니라면…….
‘상태 창.’
나는 시스템 상태 창을 불러오려 했다. 이 상황에 대해 뭐든 힌트가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방해□□□ □□□□□ □□…….]
[Warning: 접속이 불가능합니다.]
[System Error: Blocking Access]
[System Error: Blocking Access]
그리고 침묵.
“어……?”
새빨간 에러 창을 끝으로 시스템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에테르-위키도 마찬가지.
이제까지 여러 번 에러 창이 떴었지만 이런 내용이 뜬 것은 처음이다.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무섭다. 시스템 창이 멈추자 정말로 이 낯선 공간에 혼자 남겨진 느낌이 들었다.
짙은 어둠이 당장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다.
“읏…….”
이건 성녀가 나를 불렀을 때의 어둠과는 다르다. 보다 막막하고 끝없는…… 내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암흑이다. 두렵고 속이 울렁거린다.
‘정신 차려야 해.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혼자인 것도 아니잖아.’
……진짜?
어디로 갔는지 다른 사람들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저 이 어둠 속에 혼자 남아 있을 뿐.
공포와 절망에 잠식되기 직전.
“……!”
허공의 저편에서 인영이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 검은 머리카락, 곧게 뻗은 팔다리, 어두운 곳에서도 반짝거리는 검은 눈동자는 설마.
“유현 씨……?”
아니, 아니다.
나는 곧 차이를 깨달았다.
처음에는 언뜻 기유현으로 보였던 사람은 내게 가까이 다가올수록 점점 작아졌다. 내 앞에 도달했을 때는 키가 겨우 내 가슴 조금 아래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너, 는…… 누구야?”
생긋. 부드러운 미소뿐, 대답은 없었다.
겉으로는 어린 소년처럼 보였는데, 기유현과 많이 닮았다. 10년쯤 전이었다면 기유현이 꼭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나를 도와주려는 거야?”
“…….”
대답 대신 소년이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