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10장. 당신의 곁에 언제나 함께하는 카페 리을
<백은 길드>의 최상층에 위치한 길드장실.
며칠 전 갑자기 길드장이 교체되면서 아직 어수선한 그곳. 직원이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자의 도착을 알렸다.
응접실로 향한 권지운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방문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실까, 우리 여동생과 지금은 친구인 분께서.”
“……안녕하세요.”
최이찬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꼬박 일주일간 <던전관리청>에 붙잡혀 있던 최이찬이 어제 겨우 풀려나면서, 랭킹이 갱신되었다.
첫 등록에 랭킹 6위. 경이로운 결과였다.
덕분에 랭킹이 한 단계 밀린 것을 떠올리고 권지운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헌터 랭킹 따위에 연연하지는 않았으나, 역시 오래 유지하던 랭킹이 밀리는 것이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여기서 헌터를 뽑으신다고 들었는데요.”
“대강 이야기는 들었어요. 최이찬 헌터가 이 이른 아침부터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한 이유. 우리 쪽 직원이 숨넘어가게 달려와서 말했으니까.”
“그러면, 저를 길드에 받아 주실 수 있을까요.”
곧장 본론을 꺼내는 최이찬은 여전히 수더분한 모습이었다. 권지운은 테이블 위의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백은 길드>에 들어오는 게 최이찬 헌터한테는 무슨 이득이 있느냔 겁니다.”
“…….”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할까요. 현재 <백은>은 과거의 유명세에 비해 실질적인 힘은 거의 없습니다.”
이어진 말에는 감출 수 없는 곤란함이 묻어 나왔다.
“아버지께서는…… 하아, 나한테 다 던져두고는 좋다고 무슨…… ‘나는 자연인이다’에 출연하고 싶다고 하시고.”
“하, 하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농담인 줄 알고 최이찬은 웃으려 했다. 그러나 권지운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 골치 아파 하는 표정.
진짜구나…….
몇 년 동안이나 행방불명이었던 아버지가 돌아온 것은 진심으로 기쁜 일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권지운은 골칫거리를 하나 더 떠안게 되었다.
권리을을 급히 만나야 한다며 재촉하더니, 던전에서 돌아오자 이번에는 귀촌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의미심장한 말투로 보아 뭔가 계획이 있으신 것 같기는 한데.
있으신…… 것 맞겠지?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어요…….”
“…….”
최이찬은 무언의 위로를 건넸다.
“크흠, 흠. 내부 일이라 말하기 부끄럽지만, 사람이 많이 빠져서 처음부터 길드를 재건해야 하는 실정입니다. 최이찬 헌터의 능력에 알맞은 대우는 힘듭니다.”
“괜찮습니다. 그런 건…….”
최이찬이 뭐라 뒷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권지운의 말이 이어졌다.
“주노을 헌터가 컨택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겉으로는 가벼워 보여도 길드는 내실 있게 이끄는 분이에요. 그쪽의 조건은 마음에 안 차던가요.”
“그분은…… 어제 만나서 거절하고 왔습니다.”
권지운은 속으로 탄식했다.
어쩐지 오늘 새벽 ‘라임사랑단’이 헌터 채널에서 계속 우울한 글만 쓰더라니, 그런 사정이 있었군.
“<청라>는? 마침 한이성 헌터와는 내가 친분이 좀 있어요. 수준 높은 길드고요.”
“그쪽은 갈 생각 없습니다.”
호오. 뜻밖에 단호한 말투다.
권지운이 손으로 턱을 괴었다. 비뚜름한 웃음이 손바닥에 가려진다.
자연히 며칠 전에 본 광경이 떠올랐다. 영겁의 불꽃 크투가의 정원에서 동생을 데리고 귀환한 날 말이다.
권리을을 맞이한 그 남자, 기유현.
전에 봤을 때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살피지 못했지만 리을이와 상당히 친해 보였지.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보던 최이찬의 표정도 떠오른다.
‘알기 쉽기도 하지.’
권지운은 이제 이 자리가 우스우면서도 불쾌해졌다. 그는 면담을 마무리할 요량으로 말을 골랐다. 얼굴의 불쾌감은 채 다 감춰지지 않은 채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동생 리을이를 많이 아낀다는 건 알 거라고 생각해요.”
“……네.”
최이찬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게 동생의 인간관계에 간섭하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무슨 일이 있건 그러지 않을 겁니다. 리을이가 마음에 들어 한다면 그게 비록…….”
권지운은 잠시 숨을 삼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쨌거나 동생의 곁에 누군가가 얼쩡거리는 것이 좋은 기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숨과 함께 짜증을 뱉어 내고 말을 이었다.
“……누구라고 해도 받아들일 겁니다.”
“그러시겠지요.”
“내가 권리을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 길드에 가입하려고 하는 거라면, 불쾌하니까 이만 돌아가시라는 뜻입니다, 최이찬 헌터.”
최이찬은 잠시 말이 없었다.
먼저 미팅을 요청하기에 중요한 용건이라도 있나 했는데 시간 낭비였다. 이만 정리하자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때 다시 최이찬이 입을 열었다.
“그 상대가 무원이라도 말인가요.”
“…….”
권지운은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최이찬을 바라보았다.
“하하, 놀라지 않으시네요.”
“아니, 놀랐어요. ……최이찬 헌터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요.”
한이성이 직접 권지운에게 무원의 정체를 밝힌 것은 아니다. 캐낼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 교류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아차리게 되는 일이 있다. 예를 들어, 한이성이 유난히 신경 쓰는 헌터의 정체 같은 것들.
어렴풋한 짐작에 불과했으나 방금 확신이 되었다.
짐작하고도 모른 척한 이유는 간단하다. 현 세대의 헌터라면 모두 얼마쯤 무원에게 부채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권지운은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가 각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창원 시내 한복판에서 A급 균열이 터졌다. 당연히 대비상사태.
권지운이 처음으로 실전을 겪은 날이기도 했다. 아비규환 속에서 피를 쏟아 내는 사람을 치료하는 일은 생각보다 버거웠다. 사명을 다했다는 자부심은커녕,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그때 누군가가 ‘이제 살았다!’ 하고 외쳤다. 이렇게나 상황이 심각한데 무슨 헛소리냐, 하고 고개를 들자 그가 있었다.
먼 발치였지만 또렷이 보였다. 단 한 명이 빛의 그물로 어긋나고 뒤틀린 공간을 기워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광경이었다.
그날 자신이 느낀 감정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열등감, 동경, 질시, 호의……. 무원을 향한 그 수많은 감정의 밑바탕에는 부채감이 있다.
그러니 본인이 원하지 않는 형태로 정체가 밝혀지지 않게 해 주는 의리 정도야 발휘할 만하지.
권지운은 어렵지 않게 눈앞의 수더분한 남자에게서 채 다 지워지지 않은 경계를 읽어 냈다. 그렇다면 갓 각성한 이 S급은 어떻게 무원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경계하게 되었을까.
“그가, 그러니까 무원이, 대던전 《어비스》의 마신을 부활시키게 될 겁니다.”
대화가 다시 터무니없는 곳으로 튀었다. 현존하는 최강의 헌터가 마신을 부활? 당치도 않는 소리다.
권지운은 살짝 눈을 찡그리고 말했다.
“나는 라이벌을 음해하는 행위는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여러 층으로 나뉜 탑 형태의 대던전 《어비스》. 그 최고층에 무언가 무서운 것이 잠들어 있다는 가설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왔다. 다만 현 세대의 헌터는 아직 그 끝에 도달할 힘이 없을 따름이다.
공략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더라……. 머릿속으로 가늠하는 와중이었다.
“길드장님 말씀대로 <백은>이 그저 소규모 길드에 불과하다면, 애초에 <씨앤엘>은 왜 하필 <백은>을 노렸을까요.”
“……뭔가 알고 있군.”
“길드장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많이요. 예를 들어, 아직 봉인을 해제하지 못한 오래된 아티팩트가 <백은>에 있을 텐데요.”
“……!”
길드 내부 사정을 외부인이 언급하는 것은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권지운은 다시 턱을 괴었다. 이번에는 딱딱하게 굳어진 입매가 손바닥에 감추어졌다.
“최이찬 헌터는 S급 버서커지 않았나? 간파…… 아니, 예언 스킬이라도 있었나?”
“예언가를 만날 수는 있죠.”
확신에 찬 눈이다. 뭐가 있기는 한 모양인데.
“난 오컬트 안 믿어요. 최이찬 헌터도 누가 부적이나 항아리 팔면 조심하시고.”
“……하하.”
최이찬은 목에 건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작고 검은 돌은 유난히 반짝거려서 그의 목 언저리에서 무척 눈에 띄었다. 엄지로 검은 돌을 쓰는 모양을 보고, 중요한 물건인가 생각하기를 잠깐.
“어렸을 때 균열에 휘말린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저를 구해 주신 분이 권석민 헌터셨고요. 헌터가 되면 꼭 은혜를 갚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
“전혀 안 믿으시는 표정이시네요.”
“지금 꺼내기에는 너무 공교로운 이야기 아닌가요.”
최이찬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하하, 정말인데요. 은혜를 갚기 위해 길드에 가입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괜찮습니다.”
“최이찬 헌터가 <던전관리청>에서 신규 각성자 안전 수칙을 달달 외우는 일주일 동안.”
“…….”
최이찬은 그 고난의 시간을 떠올리고 낯빛을 흐렸다.
“나는 아버지의 상태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원인은 불명이지만 능력이 사라진 것은 진짜더군요. 아버지는…… 정말로 자연인…… 아니, 은퇴를 원하시고, 최이찬 헌터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에두르지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하라는 뜻이었다.
최이찬이 펜던트를 건드리던 손을 내려놓았다. 이제까지의 대화는 서론이었다는 듯 표정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적어도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게 길드장님에 대한 호의란 걸 알아주시면 좋겠어요.”
“…….”
“이대로는 권리을의 목숨이 위험할 겁니다.”
권지운의 낯빛이 그대로 사납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