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192)

106화

* * *

헌터는 생각했다. 지겨운 던전이라고.

정말 이토록 지겨운 던전은 없을 거라고 말이다.

헌터는 지친 표정으로 무심하게 손을 휘둘렀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단검이 정확하게 몬스터의 이마를 찔렀다. 그녀의 레벨에 비해 약한 몬스터는 그대로 에테르 광석만 남기고 죽었다.

무료한 표정으로 헌터는 에테르 광석을 회수해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걸로 백 개째. 하지만 목표량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하아…….”

헌터는 길드 운이 지지리도 없었다. 몇 개의 길드를 방황하다가 겨우 현재의 길드에 가입 신청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에테르 광석 할당량을 채우지 않으면 정식 길드원으로 승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중도 포기하면 가입 보증금으로 뜯긴 아이템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며칠째 이미 안정화된 던전에서 순도 높은 에테르 광석을 얻기 위해 뺑뺑이에 또 뺑뺑이를 돌았다.

이 던전을 벌써 몇 바퀴 돌았더라.

이제는 몬스터 등장 위치, 지형, 엄폐물까지 달달 외울 지경이었다. 미칠 것 같다. 반복이 왜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너무도 잘 알겠다.

“아…… 때려치우고 싶다.”

헌터는 안전지대의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연달아 몬스터를 잡으면서 체력이 약간 깎여서 포션을 꺼내 마셨다. 고급 포션이 아니다 보니 맛은 지지리도 없었다.

이런 거 말고 맛있는 것 좀 먹고 싶다.

치킨에 맥주 한 잔 마시고 누워서 텔레비전이나 보고 싶다.

아니, 아니다. 그것보다는…….

에이,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없는 것을 그리워해 봐야 포션의 맛없음만 사무칠 뿐이다.

지겨운 작업으로 돌아가려고 다시 몸을 일으키는데, 웬 문이 하나 눈에 띄었다. 가정집에 쓸 법한 그야말로 평범한 문짝이었다.

이 던전의 지형지물은 모두 외웠다. 저런 것은 본 적이 없었는데…….

잠시 망설였지만 헌터는 호기심에 몸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든, 이 던전에서 광석 파밍을 계속하는 것만큼 지겹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마음으로 다가가 열어 본 문 너머는…… 카페였다. 진짜 카페.

문은 던전 바깥의 어느 카페로 연결되었다.

“앗…… 어디서…… 어떻게 오셨어요?”

헌터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한 듯 서글서글한 인상의 카페 주인이 동그랗게 눈을 떴다.

던전에서 불확정 워프 게이트가 생기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불규칙한 에테르의 흐름이 무작위로 다른 공간의 에테르와 얽히기 때문이다.

그 게이트가 평범한 문짝 모양을 하고 있는 데다, 던전 바깥의 카페로 연결되는 것은 처음 보았지만…….

헌터는 문에서 반경 1m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커피를 주문하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그래, 마침 달달한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그리고 이변을 깨달은 것은 커피에 든 달고나 조각을 씹으며 지루한 파밍 작업에 복귀했을 때였다.

“엥……?”

몬스터가 쓰러진다. 그녀는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을 느꼈다.

* * *

오늘의 교훈: 설명을 끝까지 잘 읽읍시다.

“키야오옹, 그거 참 빨리도 깨닫는구나!”

“…….”

“각성했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쯧쯧쯧, 위대하신 시스템이 작성한 미려한 문구를 몽땅 건너뛰더니, 스킵의 대가를 이제 맛보는구나, 왜옹!”

“…….”

나는 미음이를 히터 앞에 갖다 놓은 뒤 그릇에 잔뜩 시리얼을 담아 주었다. 다행히 미음이는 찹찹거리며 배를 채우느라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어디든지 연결☆신비의 문’을 통해 처음으로 던전에서 손님이 온 것이 며칠 전.

그 이후로 꾸준히 문을 통해 던전에서 온 손님이 나타났다. 그들이 원래 있던 곳은 각양각색이었다.

“어? 여기 지리산 반야봉 속성 던전인데요.”

“야, 너희! 이리 와서 커피 시켜라. 아, 여기요? 김천입니다.”

“Hello?”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랬다. 각지의 던전에 랜덤하게 문이 생겨났는데, 열면 모두 이곳 <카페 리을>로 연결된다고 한다.

그저 연결될 뿐, 문 너머의 사람은 1m 이상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그리고 <카페 리을>에서 문을 열고 임의의 던전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 ‘어디든지 연결☆신비의 문’의 설명을 다시 읽어 보자.

[※정식 명칭은 개인용 공간 연결형 일방향 도어이나 이해를 돕기 위해 친숙한 명칭으로 서비스됩니다.]

‘연결형’에 ‘일방향’이라고 적혀 있다.

정말 한쪽으로 연결만 되는구나. 뭐, 틀린 말은 하나도 없네…….

이름만 보고 짐작한 것과는 전혀 다른 작동 방식이라 얼떨떨했다.

그래도 어쨌거나 손님은 손님.

새로운 아이템을 얻었다고 신나서 설치했다가 일거리만 늘린 꼴이라 좀 억울하긴 하지만.

나는 이 문을 통해 나타난 헌터들에게도 커피를 판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실 던전에서 전투하는 중이야말로 가장 회복 커피가 필요한 순간이 아니겠는가.

빠른 주문 처리를 위해 아예 업적 보상으로 받은 ‘편안한 워크 스루 카운터’를 문 앞에 설치했다.

불의 정령들에게 커피를 팔기 위해 직접 만든 것보다 튼튼하고 깔끔한 카운터였다.

“큿……. 디버프 때문에 대미지가 들어가지 않아요.”

“이 아메리카노를 드셔 보세요.”

“……!”

눈을 동그랗게 뜬 헌터가 미미(美味)를 외친다.

다시 문이 열리고 헌터가 나타났다.

“곧 던전 보스가 나타날 텐데 스킬을 강화하고 싶습니다.”

“음……. 이 바닐라라테는 어떠세요?”

“이야아압! 크리티컬이 터진다!”

문이 닫히기 직전 스킬을 맞은 보스의 웅장한 포효가 들려온다. 벽간 소음이 심하군.

“큿……. 계속 힐링 스킬을 퍼붓는 데도 회복이 더딥니다.”

이번에는 깊게 상처 입은 헌터 여러 명이었다. 나는 카페모카를 여러 잔 만들어 건넸다.

이처럼 헌터들에게 알맞은 효과가 있는 커피를 추천해 주기도 했다. 회복 효과를 느끼고 좋아하는 헌터의 모습을 보는 것은 뿌듯한 일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영업을 했지만.

“으윽…… 으…….”

나는 곧 한계에 달했다.

손님 수도 늘어난 데다, 던전에서 직접 손님이 들어오니까 신경 써야 할 일이 자잘하게 많았다.

이런 어영부영한 방식으로는 오래 굴러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때인가…….”

“뀨우우……?”

전에 기유현이 제안했던 대로 <카페 리을>을 정식으로 등록해야겠다.

정식으로 ‘이렇고 저런 버프 효과가 있는 커피입니다.’ 하고 등록하면 너무 헌터 같아서 싫었는데.

“헌터 맞지 않느냐, 왜옹!”

파바밧. 묵직한 앞발이 내게 날아왔다.

“기분 문제라고, 기분.”

삭막한 던전 게이트 앞에서 우연히 들른 한적한 카페. 편안하고 포근한 시간.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나니 어쩐지 몸이 좋아진 기분?

내가 원한 건 바로 이런 그림이었단 말이다.

“세상이 무슨 전래 동화인 줄 아느냐…….”

고양이한테 설교를 들었다.

“이미 가망 없는 것 같은데.”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해치운 아스도 이렇게 말했다.

카페 안에서 만나는 손님들과 달리, 문을 통해 헌터들이 던전에서 전투하는 모습을 보자 신경 쓰였다. 역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돕고 싶다.

아까는 문을 통해 상처가 심한 데다 포션이 다 떨어진 헌터가 왔다. 나는 ‘체력 40% 회복’ 효과가 붙어 있는 카푸치노를 권했다. 카푸치노를 마시고 급히 상처를 회복한 헌터는 내게 아주 고마워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아니요. 전 이미 커피값도 받았는걸요.”

“그렇다고 해도 제게 큰 도움을 주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요.”

꾸벅, 고개를 숙이고 헌터가 다시 문 너머로 사라진다. 그 모습에 뿌듯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깨달았다.

나는 적어도 이번 생에는 초보자 마을의 여관 주인 역할을 하기는 이미 글렀구나…….

“유현 씨, 전에 한 제안 말인데요.”

“아. 리을 씨 스킬과 커피에 대해 정식으로 밝히자는 제안 말씀이시죠.”

우리 가게에서 커피 마시기가 취미인 듯한 랭킹 1위가 대답했다.

“네, 그거요. 결심했어요. 받아들일게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띠링띠링 하고 경쾌한 알림 소리가 들렸다.

[축하합니다! 드디어 카페 주인의 마음가짐을 갖추셨군요.]

[조건을 만족했습니다.

앞으로 커피의 스테이터스 창 및 효과를 다른 사람도 열람할 수 있습니다.]

[업적: 카페 주인의 마음가짐

커피로 세상을 이롭게 할 마음을 먹었습니다.

보상: 콜드 브루 커피 레시피]

아니, 그렇게까지 거창한 결심을 한 건 아닌데…….

거창한 표현에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기유현처럼 특수한 스킬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내가 만든 커피의 정확한 스테이터스 창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은 그저 몸으로 효과를 체감할 뿐.

그런데 이제 다른 사람도 커피의 스테이터스 창을 볼 수 있으면 더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겠지.

이후 행정적인 절차는 큰 걸림돌 없이 진행되었다. 기유현의 도움도 컸다.

서류 한 장과 실제로 커피를 만들어 보여 주는 실사 한 번으로 금방 헌터계 특수 업종으로 승인되었다.

이제껏 없었던 특이한 포션의 탄생에 대한 반향을 고려해서 엠바고를 푸는 정식 발표일이 정해졌다.

그리고 다가온 정식 발표일 전날.

나는 대량의 원두를 갈고 있었다.

* * *

곧 특수 업종으로 정식 등록한 <카페 리을>이 첫발을 내딛는 날이다.

모처럼이니 신메뉴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제일 최근에 얻은 레시피인 콜드 브루 커피를 준비하기로 했다.

한번 원액을 만들어 두면 희석만 해서 빨리 판매할 수 있다는 속셈도 있었다.

전에 쓰던 소형 로스터였으면 많은 원두를 준비하기 번거로워서 포기했겠지만, 이제는 업소용 완전 자동 대형 로스터가 있으니까 할 만하다.

나는 이공간 안으로 들어가 원두 보관용 자루에서 원두를 옮겨 담았다. 그리고 로스터에 생두를 넣고 불을 붙였다. ‘완전 자동’답게 알아서 완성되어 보관용 상자에 담기는 구조였다.

문득 보니 그 사이 이 이공간도 많이 발전했다.

‘슈슉, 슉, 슈슉, 슉.’

그냥 심어만 놨을 뿐인데 알아서 잘 자란 이빨당근이 오늘도 열심히 입질을 했다.

옆에는 이초록에게 받은 수상한 씨앗을 심은 자리였는데, 아직 싹을 틔우지는 않았다.

‘저 당근이 영양분 다 빨아먹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 여러 가지 작물에다 기계까지 들였으니까.

“음메에에!”

그래, 소도 있고.

자신을 빼먹지 말라는 듯 콧김을 뿜는 소를 쓰다듬어 주었다. 라임이와 함께가 아니어서인지 소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아직 이 소의 이름은 정하지 못했다. 어째 딱 맞는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단 말이지. 좀 더 천천히 고민해 볼까.

아무튼.

가게로 들고 온 원두를 굵은 소금 정도 크기로 굵게 갈았다. 커다란 통에 필터를 넣은 뒤 원두가루와 찬물을 붓고 잘 섞어 주었다.

[아이템: 콜드 브루 커피 원액(★★☆☆☆)

상태: 추출 중

남은 시간: 12:00:00]

다음 날 아침, 딱 12시간이 지난 원액을 필터로 거르면 완성이었다.

당장 물과 얼음을 넣어 콜드 브루 커피를 만들어 보았다.

[아이템: 콜드 브루(★★★★☆)

상태: 좋음 (남은 시간: 01:00:00)

효과: 한 가지 랜덤 버프 효과를 랜덤한 퍼센트만큼 얻습니다.]

오. 버프 효과의 종류와 양이 모두 랜덤이었다. 꼭 뽑기 하는 것 같네.

이 신메뉴는 내 생각보다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