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8/192)

108화

왜 갑자기 글이 지워졌지? 대체 무슨 내용이었을까. 지워지니 더더욱 궁금하다.

오기가 생겼다. 나는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헌터 채널의 글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등록한 헌터라면 모두 이용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큰 커뮤니티다 보니 원하는 정보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거기다 검색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제목을 특이하게 쓰는 경우도 많은 탓에 알아보기 힘들었다.

[잡담] 오늘 ㅋㅍㄹ 번호표 받으러 갔는데

기껏 그럴 듯한 제목을 발견하고 눌러보았더니…….

[잡담] 오늘 ㅋㅍㄹ 번호표 받으러 갔는데 (1)

추천: 16 / 비추: 0

작성자: 분홍젤리할짝

(사진)

오늘 갔다왔는데 삼색냥이 졸귀임

히터 앞에서 식빵 굽더라

간식도 줬음 ㅇㅅㅇ)v

체리만두: ㅁㅈㅁㅈ 고양이귀욥

…….

전혀 관계없는 내용이었다.

어쩐지 미음이가 오늘 밥을 많이 안 먹더라니, 간식을 얻어먹어서였구나.

“왜, 왜오옹! 이 몸의 사진을 멋대로 찍다니 무례하구나!”

하는 말과 달리 얼굴에는 기쁜 티가 역력했다.

“뀨우웃…….”

자기 이야기는 없어서 라임이는 아쉬워하는 기색이었다.

기운 내, 라임아. 이미 너한테는 열렬한 추종자가 둘이나 있잖아.

자꾸만 끼어드는 동물들을 떼어 놓고 헌터 채널을 검색하기를 한참. 이번에는 진짜 원하는 내용의 글을 찾아냈다.

30초 전에 올라온 따끈따끈한 글이었다.

[잡담] ㅋㅍㄹ 번호표 내일자 n0번대 제시 (0)

추천: 0 / 비추: 0

작성자: ㅇㅇ

찔러보기 ㄴㄴ

내일자 번호표 n0 초반대 한장

n0 후반대 한장 있습니다

제시가격 써서 쪽지ㄱㄱ

10루비 밑으론 답장 안함

헤, 이것 봐라.

한번 요령을 알아내자 어렵지 않게 비슷한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잡담] 미개봉 콜드 브루 양도 직거래 (0)

추천: 0 / 비추: 0

작성자: ㅇㅇ

오늘 구매 ㅋㄷㅂㄹ 상태 좋음

상태 보존 시간 한시간 반 남은거 두잔 있음

가격 한잔 10루비

직거래 쪽지 주셈

찔러보기x 네고불가

“허어…….”

어이가 없으면서 짜증이 확 솟구쳤다.

사정이 생겨서 카페에 못 오게 된 바람에 번호표를 양도한다면 이해한다. 커피도 뭐, 남는 걸 다른 사람에게 맛보여 주고 싶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 글들을 보자 신미라의 부탁으로 콘서트 티켓을 구하려 했을 때가 떠올랐다. 원가의 몇 배나 되는 가격을 적어 놓고 적반하장 식으로 나오던 미친 암표 장사꾼밖에 없었지.

즉, 이자들은 꾼이다. 장사꾼 말이다.

임시 닉네임을 달고 글을 올렸다가, 연락이 오면 곧장 삭제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양도는 무슨! 판매잖아.

거기다 가격이 10루비라고?

현재 카페에서 판매하는 메뉴의 가격은 1루비에서 5루비 사이다.

가장 싼 아메리카노가 1루비.

차원의 상점에서 판매하는 위스키 가격이 꽤 비싼 터라 아이리시 커피가 5루비로 제일 값이 나갔다.

가격을 올리라는 요청도 꽤 받았다. 전에 기유현도 커피 가격이 너무 싸단 이야기를 했었지. 하지만 당장 가격을 올릴 생각은 없다.

처음에야 커피 원두부터 전부 내 노동력으로 빚어야 해서 힘이 들었다. 제로부터 시작하는 카페 생활이랄까.

그래도 지금은 대부분 자동화되었다. 재료비도 거의 들지 않는 데다, 한번 원두를 로스팅해 두면 그 이후로는 할 일이 많지 않다.

그러니 이 정도가 적절한 가격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그동안 차곡차곡 루비를 번 만큼 나는 이미 부자다. 돈만 생각하면 굳이 이 노동을 할 이유는 없다. 그냥 카페를 운영하고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

그건 그거고.

그렇다고 내가 만든 커피로 웃돈을 얹어 장사를 하는 모습을 보니…… 굉장히 기분이 안 좋았다. 고생은 나하고 아스가 하는데 돈은 플미×들이 번다니.

띠링. 때맞춰 시스템 알림이 울렸다.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서브 퀘스트: 암표 거래 근절하여 광명 찾자

큰일입니다!

당신의 카페에 플미×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을 몰아내고, 건전한 카페 문화 우리 함께 만들어 가요.

부당 이득을 취하는 상인 몰아내기: (미완료)

보상: 경험치(10exp), 명성(1), 인기(2), 실버 티스푼]

꼭 급조한 것처럼 퀘스트 보상이 쩨쩨했다. 하지만 지금은 보상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퀘스트가 뜨지 않았더라도 이 꼴을 두고 볼 순 없었으니까.

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아까부터 왜 그래?”

내가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굳은 표정을 하자 아스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나는 방금 찾은 글을 보여 주며 아스에게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 악랄한 인간들이 있다니……! 태초의 혼돈조차도 경악할 악행이야.”

역시 나와 함께 종일 카페 일을 하는 아스도 엄청나게 화를 냈다. 분노를 연료로 삼아 서로 공감하는 시간을 보내기를 잠시.

“그런 인간들에게는 메테오를 날려 버려야 해.”

“아…… 아니, 아니, 그건 아니지! 아스, 잠깐 스톱!”

나는 황급히 우리 집 급발진 아르바이트생을 붙잡았다.

웃돈을 주고 번호표를 거래한 일이 무척 화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력을 쓸 순 없잖아. 그렇게 설명하자 아스는 진정했지만, 부루퉁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거야?”

그러게, 어쩐다.

<던전관리청>이나 헌터 채널에 신고하기?

이건 일시적인 효과밖에 없을 테다. 개개인의 거래라고 잡아떼면 제재에 한계가 있다. 기껏해야 글이나 지워 줄 테고, 앞으로 장사꾼은 더 은밀하게 장사를 하겠지.

암표나 웃돈 거래가 이게 문제다. 폐해가 크지만 법적 처벌 근거는 애매하다.

우리 집 과격파 아르바이트생의 의견대로 대뜸 무력을 행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놔두기엔 너무 화가 난다.

고민 끝에 나는 기유현에게 한번 의견을 구해 보기로 했다. 그는 헌터계 고인물이니 뭐 좋은 의견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카톡을 보냈더니 금방 답장이 왔다.

[기유현]

인상착의 알려주시면 제가 처리할게요 ^^

…….

인상착의는 또 왜 물어봐?

촉이 왔다. 기유현이 말하는 ‘처리’가 진실한 대화나 설득 따위가 아니리라는 촉 말이다. 이 남자의 발상도 아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결국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10루비를 내고서라도 기다리지 않고 편하게 번호표를 받고 싶은 거다.

장사꾼을 족치는 것보다 우선 시스템적으로 이 상황을 막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아.

나는 핸드폰에 있는 연락처 중 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짧게 가다가 곧 전화가 연결되었다.

“안녕하세요! 네, 오랜만에 연락드리네요. 잘 지내셨죠? 다름이 아니라 부탁드릴 일이…….”

* * *

“그냥 쉬고 있어도 되는데.”

“훗……. 그늘이 드리운 곳이 나의 길.”

<카페 리을>의 정기 휴일이 되었다.

모처럼이니 마음 같아서는 하루 종일 빈둥빈둥하고 싶었지만, 나는 일어나자마자 외출 준비를 했다. 목적은 물론 암표상을 처리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아스도 나와 함께 가기로 했다. 여전히 퉁명스러운 표정이지만, 새 옷을 꺼내 입는 모습을 보니 들뜬 것 같다.

하긴 지난번 용산에 옷 쇼핑하러 간 이후로 둘이서 외출은 처음이구나. 그 용산행은 결국 엉망진창이 되었고.

좀 더 여기저기 데리고 다닐 걸 그랬나…….

“그럼 얘들아, 얌전히 집 지키고 있어.”

한참 뒤에 구석에서 ‘왜오옹’, ‘뀨우우’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노느라 바빠 관심도 없는 동물들을 두고 문을 열었다.

그렇게 가게를 나와서 내가 향한 곳은 바로 <헌터 마켓>이다.

발걸음이 무겁다. 사실은 별로 오고 싶지 않았다. 지난번에 왔을 때 직원이 너무도 재수 없었기 때문이다.

강약약강이 끝내 주는 직원의 태도에 일일이 상처받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발로 냉대 받으러 가고 싶지는 않은 기분이라고 할까…….

“하아…….”

“왜 그래? 여기 들어가려는 거 아니야?”

입구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앞에서 서성이는데 아스가 내게 손짓했다.

“그래, 계속 망설이기만 해도 소용없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하잖아.

“으응, 갈게. 아스, 같이 가.”

그렇게 나름의 각오를 다지고 <헌터 마켓>의 1층 출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친절한 웃음과 다정한 말투가 나를 맞이했다. 그러나 나는 이 완벽한 접객 태도가 헌터증을 내는 순간 눈 녹듯 사라질 것을 안다.

“저, 찾는 게 있는데요…….”

떨떠름한 마음으로 용건을 밝히려던 찰나였다.

“아!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권리을 헌터님!”

“네?”

“<헌터 마켓>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헌터님께서 만족하시도록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VVIP룸으로 모시겠사오니 일행분과 함께 이쪽으로 오시지요.”

“네……?”

얼결에 그 VVIP룸으로 끌려가 앉았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소파는 그대로 잠들 수도 있을 정도로 푹신했다. 직원이 가방과 코트를 받아 주었고, 앉자마자 웰컴 푸드라면서 비싸 보이는 다과와 주스가 나왔다.

물건을 사러 온 것도 아닌데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과잉 친절이다.

왜 갑자기 나한테 이러나 하는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직원이 살며시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권리을 헌터님, <카페 리을>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하하……. 감사해요.”

아하.

아무래도 나는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 더 유명해진 듯싶었다.

<카페 리을>의 커피가 한참 인기가 있으니, 내가 F급인데도 이런 취급인 건가.

빈 주스 잔에 주스를 따라 주는 과잉 친절을 선보이면서 직원이 다시 말했다.

“저어, 헌터님의 커피를 따로 맛볼 수 있는 영광을 주실 수 있으실까요……?”

“내일 오전에 오셔서 번호표 받으시면 돼요.”

그러나 직원은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그게 아니라…….”

“……?”

“저희 <헌터 마켓>은 여러 VVIP 분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상위 랭커는 물론이고, 본청의 간부분들과도 오랜 인연이지요.”

“그런데요……?”

“권리을 헌터님의 커피를 따로 맛볼 수 있게 해 주시면, 여러 VVIP 분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실 수 있겠지요. 헌터계에 입지를 굳히시는 데도 도움이 될 겁니다.”

돌려 말했지만 요는 내 커피가 인기가 있으니 그 높으신 분들에게 뇌물로 내놓아 봐라, 하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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