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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109/192)

109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헌터 마켓>부터 분위기가 이 모양이기 때문에, 일부 헌터들도 강약약강의 성향인 게 아닐까.

F급이라고 냉대받던 내가 예전과 다른 환대를 받았다.

전형적인 사이다 상황이라고 할 만한데, 그렇다고 사이다라며 우쭐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냥 질리는 기분이다.

“커피는, 줄 서서 번호표 받으시면 판매해요.”

그렇게 말하고 몸을 일으켰다.

에이, 볼일이나 얼른 끝내고 가자.

“그보다, 위탁 상점에 가려고 하는데요.”

“네? 권리을 헌터님, 저희 <헌터 마켓>에는 위탁 상점에서 파는 하급 물품보다 좋은 아이템이 많답니다. 원래는 아무한테나 보여 주는 물건이 아니지만, 헌터님께라면 바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위탁 상점 구역에 볼일이 있어서요.”

직원은 끈질겼다. 비슷한 권유와 사양을 몇 번씩 반복한 뒤에야 그놈의 VVIP룸인지 뭔지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여기 재미없어.”

아스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직접 안내하겠다고 하는 직원을 겨우 떨어뜨려 놓고 위탁 상점 구역으로 들어섰다.

이곳에 오는 것은 두 번째다. 처음 왔을 때는 텅 비어 있었지만 지금은 다양한 노점이 열려 제법 북적거렸다.

나는 그중 가장 구석, 눈에 띄지 않는 한 상점으로 향했다. 매대에는 초보자용 아이템이 몇 개 놓여 있었고, 다른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상점 주인이 나를 보고 환한 웃음으로 맞이했다.

“오랜만이구나.”

“할머니, 잘 지내셨어요?”

바로 김덕이 할머니였다.

“오늘은 귀여운 꼬마와 함께구나. 할미가 사탕 주련?”

“꼬마 아닌데…….”

아스는 꼬마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지만 얌전히 사탕을 받아먹었다. 도르르. 입 안에서 사탕을 굴리는 소리가 났다.

암표 장사꾼을 처리할 방법을 찾기 위해 내가 상담한 상대가 바로 김덕이 할머니였다. 지금은 은퇴했다고는 하나 제작계 장인이시니까 뭔가 방법을 아실까 하는 짐작에서였다.

그리고 내 짐작은 맞아떨어졌다. 전화로 한 설명을 듣고 김덕이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 흐음. 그런 상황이라면 그 아이템을 쓰면 되겠군.

“헉, 방법을 아세요?”

- 그래. 언제 한번 나를 찾아오게.

“그러면 제가 공방으로 한번 찾아뵐게요.”

- 아니. 공방 말고 다른 곳에서 만나지.

“네. 어디로 가면 되나요?”

김덕이 할머니가 나를 부른 곳이 바로 이곳, <헌터 마켓>의 위탁 상점 구역이다.

알고 봤더니, 은퇴 후 취미로 정체를 숨기고 초보자용 아이템을 판매하고 계신다고 한다.

하긴 처음 여기서 김덕이 할머니를 만났을 때도 정체를 숨기고 계셨지…….

“그래도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진 않아요?”

1세대 제작계 헌터의 대표 격인 장인에 유명인이시니까. 그렇게 물었지만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후후후……. 의외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얼굴을 잘 보지 않는단다.”

아직까진 정체를 알아챈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한다.

나는 김덕이 할머니를 다시 바라보았다.

실내인데도 선바이저를 쓰고 벙벙한 페이즐리 패턴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팔에는 회색 팔 토시. 보통 눈썰미로는 그녀가 장인이라고 알아보기 힘든 모습이기는 했다.

어쩌면 진정한 힘숨찐 라이프는 김덕이 할머니가 즐기고 계신지도 모르겠어.

아니, 그보다는…… 주인공에게 신비한 힘을 주는 기연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언젠가 단 한 명, 김덕이 할머니를 깍듯하게 대하는 헌터에게 희귀 아이템을 주는 거다.

이런 전개 많이 들어 봤는데, 음, 알지, 알지. 주인공의 제1법칙이잖아. 평범해 보이는 노인에게 친절할 것.

나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나와 눈이 마주친 헌터가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호오, 저 사람일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를 지켜보았지만…….

“여기 화장실이 어딤까?”

전혀 아니었다. 주인공 같은 사람이 그렇게 쉽게 나타나지는 않는가 보다.

“참, 여기. 그때 말씀하신 거 가져왔어요.”

나는 인벤토리에서 스테인리스 스틸 보온병을 건넸다. 안에는 여러 잔 분량의 카페 로마노가 들어 있었다.

[아이템: 카페 로마노(★★★★☆)

상태: 좋음 (남은 시간: 01:00:00)

효과: 1회 동안 인챈트 성공 확률이 200% 증가하며, 인챈트 실패 시 아이템 파손을 1회 방지합니다.]

이 커피의 효과는 바로 이렇다.

효과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할머니께서 마셔 보고 싶다고 하셨다. 모처럼 뵈러 온 김에 겸사겸사 넉넉하게 만들어 왔다.

“고맙네. ……허어.”

카페 로마노의 상태 창을 읽던 김덕이 할머니가 한숨을 삼켰다.

“이 커피만 있었다면 그렇게 아이템을 깨 먹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동안 인챈트 과정에서 깨 먹은 아이템을 떠올리니 속이 쓰리신 모양이다. 유용하게 쓰시면 좋겠네.

“리을 양에게 줄 아이템은 이걸세.”

겉으로는 평범한 컴퓨터용 사인펜처럼 생긴 펜이었다. 받아 드니 곧 상태 창이 떴다.

[아이템: 귀속의 사인펜(★★☆☆☆)

물건에는 잊지 말고 이름을 씁시다.

사용 시 최초 소유자에게 아이템 귀속 효과 발생]

“급하게 만들었지만 효과는 확실할 걸세.”

“……! 감사합니다!”

귀속이란 해당 아이템이 완전히 소유자의 것이 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물건에 이름 쓰는 행위와 비슷하다. 이름이 쓰인 물건은 남한테 팔 수 없다. 즉 양도 불가에 거래 불가.

좋아. 이거면 충분히 장사꾼을 몰아낼 수 있다.

“후후후…….”

귀속 효과가 걸린 번호표를 들고 당황하는 장사꾼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사인펜을 인벤토리에 집어넣는데, 할머니가 불쑥 말했다.

“드디어 반지의 진짜 힘을 되찾았군.”

그녀의 시선은 크투가의 반지를 향해 있었다.

“네? 아, 맞아요.”

처음 할머니께 크투가의 반지를 받았을 때 상태 창은 이랬다.

[크투가의 반지

종류: 액세서리

효과: 사용할 수 없음]

그런데 던전에서 크투가를 만나 계약을 맺은 뒤 반지의 상태 창은 이렇게 업데이트되었다.

[크투가의 반지(★★★★★)

영겁의 불꽃 크투가와 맺은 계약의 증표.

적합한 사용자가 사용 시 크투가를 소환할 수 있다.]

아직 그럴 만한 일이 없어 크투가를 소환해 보지는 않았지만, 끼고만 있어도 전과는 다른 힘이 느껴진다.

이 반지의 재료가 된 ‘힘을 담은 돌’은 크투가가 우리 할머니에게 넘긴 것이다. 그 돌이 돌고 돌아 내 손에 있다. 이게 우연일까.

암표 장사꾼 문제 해결도 물론 중요한 용건이었지만, 오늘 김덕이 할머니를 찾아온 것은 이 반지에 대해 묻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할머니, 말씀해 주세요.”

“…….”

“이 반지를 어떻게 만들게 되신 건가요?”

* * *

<헌터 마켓>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김덕이 할머니가 해 준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반지의 재료가 된 돌은, 박희순 씨에게 손거울을 빌려주는 값으로 맡은 거란다.”

아, 그 손거울. 김덕이 할머니의 부탁으로 이공간의 오두막에서 찾아냈었지. 그 깨진 거울로 최이찬의 펜던트를 만들었고.

“크투가의 반지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나는 그 힘을 사용할 수는 없었어.”

“…….”

“박희순 씨에게 물어보니, 반지는 제대로 완성되었다고 하더군. 다만 적합한 사용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했지. 그녀는 그 적합한 사용자에게 반지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단다.”

“설마…… 그게 저인가요?”

김덕이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어떻게 내가 그 사용자인지 알게 되었는지는 모호하게 말했다. 목소리를 들었다던가.

마지막으로 내가 물었다.

“우리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글쎄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먼 사이였어서 해 줄 말은 많지 않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

“보통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던 사람이었어.”

아련한 시선이 내게 와 닿았다. 마지막 말은 담뿍 그리움을 머금고 있었다.

으음.

할머니를 기억하는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이 할머니에 대해 하는 묘사에는 공통점이 있다.

먼저, 각성자는 아니었다는 점.

‘우리 할머니가 1세대 최강 헌터?’라거나 ‘혈통빨로 세계 최강이 되었습니다.’의 전개는 아니었다.

사실 약간 기대했는데 아쉽군.

그러나 할머니가 어떤 신비한 힘을 지녔던 것만은 확실하다. 크투가는 ‘별의 흐름을 읽는다.’고 했었지. 그 힘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흑, 어차피 회귀할 거라면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로 돌려보내 줬으면 좋았잖아.

‘할머니 보고 싶다…….’

돌이켜 보면 내가 각성한 계기도 할머니의 가게에 간 것이다.

지금은 그냥 농작물 기르는 곳으로 쓰고 있긴 한데, 가게의 이공간도 묘하다. 왜 그런 이공간이 건물에 있을까.

어쩌면 나는 할머니가 준비해 놓은 길을 따라 움직이는 걸까?

‘진로 설계는 당사자랑 상담해서 정해 주셨어야죠…….’

만약 그렇다면 이 끝에는 뭐가 있는 걸까.

미친 사이비 종교맨과의 일대일 대결?

세계 구원?

에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겠지. 카페 경영을 통해 던전 공략에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도움 정도겠지.

하하, 하…….

도움 정도…… 맞겠지?

아. 그 미친 사이비 종교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카페 리을>을 정식으로 알리기로 결정하면서, 가게 주위에 무인 경비 시스템을 설치했다. 기유현이 내게 준 방범 벨도 유효하다.

이렇게 대비를 했지만 다행히 아직까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계속 이렇게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저기 좀 봐.”

그때, 아스가 내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이런, 너무 오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미안.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었어. 얼른 가자. ……? 왜 그래?”

“……저거.”

아스가 가리킨 것은 도로 맞은편 빌딩 위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이었다. 마침 뉴스가 나오던 중이었다. 도로 교통 상황을 설명하는 뉴스 꼭지가 지나가고 화면에 나온 것은 최이찬의 얼굴이었다.

곧 아래에 커다란 자막이 뜬다.

랭킹 6위 S급 헌터 최이찬…… <백은 길드> 행 확정

아. 드디어 정식 발표 났구나.

나는 아스와 함께 그대로 서서 심드렁하게 뉴스 화면을 지켜보았다. 뉴스는 국내 헌터 길드의 판도가 어쩌고저쩌고 하며 이 소식을 꽤 비중 있게 다뤘다.

내 반응이 무덤덤한 이유는 단순하다. 그냥 어제 미리 들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던전관리청>에서 해방된 최이찬이 어제 우리 가게에 들렀다. 던전에서 돌아오고 거의 일주일 만이었다.

최이찬의 자업자득이니만큼 뭐라 말할 일은 못 되지만. 등급 재등록에 랭킹 측정뿐만 아니라, 힘 조절 트레이닝, 관련 규범 교육에 시험까지 친 뒤에야 겨우 풀려났다고 한다.

헌터 등록 그거 나는 되게 금방 끝나던데…….

처음 <헌터 마켓>에 방문하기 전에 주민센터에 헌터 등록을 하러 갔었다. F급이라고 말하자 곧장 담당자에게 인계되었는데.

“선생님, 여기 인적 사항 쓰시고 신분증 주시면 되세요. 안전 교육 잊지 말고 기간 내에 인터넷으로 이수하시고요. 여기 팸플릿 가져가세요.”

……이걸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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