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 *
어제저녁, 막 카페 영업이 끝난 시각에 최이찬이 방문했다.
“우냐아아(이 인간, 이제 돌아온 거냐)!”
“뀨우웃!”
“왜옹, 왜오옹(놀자! 놀아 달라)!”
우리 집 동물들이 최이찬을 둘러싸고 빙빙 돌며 울기 시작했다.
거기다 갑자기 아스는 최이찬을 경쟁자를 보는 눈으로 의식하며 가게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이미 카페 영업은 끝났고 정리도 다 마쳤다. 스킬 ‘바닥이 반짝반짝’을 사용해 청소한 카페 안은 먼지 한 톨 없는 상황. 더 할 일은 없다.
즉, 전부 다 방해다.
나는 간식과 함께 아스와 동물들을 옆방 텔레비전 앞에 봉인했다. 마침 오컬트 영화가 하고 있었다. 얘들이 화면이 집중하면서 겨우 조용해졌다.
“이찬아, 앉아 있어. 커피 마실 거지?”
“하하, 주면 나야 고맙지.”
나는 유리잔에 아이스크림을 넉넉하게 떠 담아 아이스크림 커피를 만들었다. 춥지도 않은지 최이찬은 곧장 잔을 전부 비웠다. 맛있게 마시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크, 하, 진짜 맛있다.”
그가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비운 유리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려 했다. 나는 당황해서 손을 뻗었다.
“이찬아, 조심…….”
그런데 깨지지 않았다.
달그락하는 소리가 났는데도 잔은 금 하나 생기지 않았다. 완벽한 힘 조절이었다.
<던전관리청>의 스파르타식 트레이닝이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과연 교육열 하나는 끝내주는 나라. 단기 교육으로 어떻게든 되는구나.
최이찬은 턱을 괴고 가게 안을 슬쩍 둘러보았다.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하긴 크투가가 있는 던전 안에서도 만났지만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가게를 둘러볼 만한 시간이 없었지.
“많이 변했네.”
“응? 뭐가? 아, 여기?”
거리는 이제 서서히 연말 분위기에 젖어 들고 있다. 최이찬이 잠적했던 기간은 날짜로 따지면 그렇게 길지 않다.
그렇지만 그 사이에 가게 안은 많이 바뀌었다.
시스템 보상으로 테이블도 ‘편안한 테이블’로 업그레이드했겠다, 신비한 문짝에 워크 스루 카운터, 그리고 새 아르바이트생까지 생겼으니까.
“잘되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고마워.”
최이찬이 자신의 목에 매달린 펜던트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예전에 내가 준 암흑 에테르가 담긴 그 펜던트였다.
이미 스킬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S급 헌터가 되었으니 이제 펜던트를 몸에 지닐 필요는 없었다. 전에 이 사실을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그는 여전히 펜던트를 하고 있었다.
“그거 계속 걸고 있네?”
“어어. 마음에 들어서.”
“마음에 든다고? 디자인이?”
펜던트는 밋밋한 줄에 새끼손톱만 한 검은 돌이 매달린 것이 전부다. 액세서리라기에는 퍽 심심한 디자인이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살짝 처진 눈이 부드럽게 접혔다. 씩. 환한 웃음이 뒤따랐다.
“모처럼 리을이 네가 준 거니까.”
“…….”
고맙긴 한데 그렇게 말하니 분위기가 퍽 머쓱했다. 뺨이 간지러운 느낌에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빈 유리잔을 치우며 한 잔 더 줄까 물어보았다.
“어, 그럼 고맙지!”
그늘진 데 없는 환한 대답이었다.
이번에는 달고나 커피를 만들기로 했다. 마침 새로 만든 달고나가 딱 적당하게 굳었다. 숟가락으로 달고나를 부순 뒤, 유리잔에 큰 조각을 골라 담으며 물었다.
“이찬아, 그때 하려던 말은 뭐야?”
“어엉?”
“지나 씨랑 강현우 헌터한테 끌려가기 전에,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아, 그거…….”
나는 완성된 달고나 커피를 최이찬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냥. 이제 돌아왔으니 네가 만들어 주는 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말을 하려고 했어.”
최이찬이 달고나 조각을 들어 씹었다. 오도독 소리가 났다. 머리 위로 반짝거리는 빛의 막대로 보아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겠지만.
나는 최이찬이 원래 내게 하려던 말을 삼키고, 말을 돌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더 자세히 물어봐야 할까?
꺼내기 어려운 말이라 말을 돌린 거라면 그냥 묻지 않는 게 나을까?
“에이, 난 또. 그 정도는 그렇게 분위기 잡고 말 안 해도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어.”
가벼운 투로 대답하고는 속으로 고민하는 찰나였다.
한 모금 마신 유리잔을 내려놓고 최이찬이 다시 말을 걸었다. 늘 얼굴에 걸려 있던 웃음기가 한 겹 엷어졌다.
“권리, 전에 그 사람 말인데…….”
“전에? 누구 말야?”
“던전에서 돌아온 날에 본 그 사람.”
모호한 표현이었지만 누구를 말하는지는 바로 알아들었다.
“아, 유현 씨?”
“그래, 그 사람. 그 사람하고는 어떤 사이야?”
최이찬의 질문에 대답을 하려다, 묘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옆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아스와 동물들이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왜옹.”
나와 눈이 마주치니 안 본 척 딴청을 부리지만 이미 늦었다. 왜 저런담. 텔레비전을 볼 때보다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는데.
나는 산만한 식구들에게 간식을 보충해 주고 다시 돌아왔다.
기유현이랑 무슨 사이라.
그의 정체와 회귀 사실을 안다. 회귀자로서 동질감을 느낀다는 점을 말할 수는 없으니 남은 답은 짧았다.
“뭐……. 친한 사이라고 할까. 내가 도움을 많이 받았어.”
마침 최이찬이 가게에 도착하기 조금 전 기유현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무슨 볼일이 있어서 며칠 연락이 안 될 거라는 용건이었다. 통화를 하는 김에, 암표 장사꾼 처리를 위해 김덕이 할머니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고 말하자 그는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 제 쪽에서도 손을 써 둘 테니 안심하세요.
“그게 혹시…… 인상착의 알아내서 처리한다느니 하는 건 아니죠?”
- 에이. 그렇게 무식한 방법을 쓸 리가요.
“저기, 유현 씨, 저는 준법 의식은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 하하하…….
경쾌하지만 불안한 웃음소리, 그리고 인삿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기유현과의 대화를 반추하는데, 최이찬이 신중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도움을 받았다…… 라. 그게 전부야?”
“어어.”
“그래, 아직 그런 거면 됐어.”
씩 짓는 웃음이 어쩐지 신경 쓰였다.
“이찬아?”
다시 물으려는 순간.
“나 <백은 길드> 들어가기로 했어.”
“뭐? 왜?”
나는 최이찬과 예전에 한 대화를 떠올렸다. 그가 S급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는 길드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었다.
왜 갑자기 생각을 바꿨지?
“설마 권지운이 억지로 권한 건 아니지?”
“아하하, 아니야. 내가 <백은 길드>에 들어가고 싶다고 부탁했어.”
“그런 거면 다행이긴 한데……. 왜 생각이 바뀐 거야?”
“권리……. 리을아.”
“으응?”
그는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서, S급이 된 건 다 네 덕분이야.”
“뭐? 아니야. 그건 아니지! 겸손이 너무 지나쳐.”
회귀 전의 비극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암흑 에테르 아이템을 구하려 이런저런 일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성취는 엄연히 본인의 것이다.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최이찬이 스스로 균열에 뛰어들었고, 스스로 헤쳐 나왔다. 내가 한 일은 약간 양념을 쳤을 뿐이다.
잠적한 동안 레벨도 엄청 올렸다면서. 레벨이 40이랬나. 그 노력 역시 그가 스스로 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최이찬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힘을 손에 넣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보답은 하고 싶어.”
“…….”
일순 눈이 날카롭게 반짝인 듯 보인 건 기분 탓일까.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은 손에 최이찬의 손가락 끝이 닿았다. 아주 조금 닿았는데도 최이찬은 화들짝 놀라 손을 치웠다.
분위기가 묘하다.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최이찬이 덧붙였다.
“그래서 말인데, 여기서 아르바이트는 못 할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말하러 왔어.”
“어? 에이, 그야 당연하지. 본격적으로 헌터 활동을 하는 거잖아. 맞다, 혹시 권지운이 심하게 부려 먹으면 나한테 일러.”
“하하하…….”
최이찬이 눈을 접으며 웃음 지었다.
수더분한 성격에 스스럼없는 태도, 환한 웃음까지. 내가 아는 최이찬이 맞다. 그런데도 지금의 그는 어딘가 복잡해 보인다. 안 그러던 애가 이러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회귀자이며 마신을 봉인하려 한다는 기유현이나.
동생이 아픈 데다 무슨 고민이 있어 보이던 최세드릭도 그렇고.
이제는 최이찬까지.
내 주변에는 어째 사정이 복잡한 사람밖에 없구나.
헉, 설마 회귀씩이나 했지만 단순한 사람은 나 한 명뿐?
“왜오오옹, 왜옭(이야기 끝났느냐. 놀아 달라)!”
“뀨우우우!”
그때 옆방에서 미음이와 라임이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튀어나왔다.
“하하하, 그래, 그래. 이리 와.”
최이찬이 미음이와 라임이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저글링을 했다. 공중을 빙빙 돌면서 신나 하는 우리 집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다행이다. 쟤보다는 내가 그래도 덜 단순하지.
헉, 무심코 고양이랑 비교를 해 버렸다.
인간으로서 위기감이 느껴진다…….
* * *
띠리링.
진우에게 헌터 채널 쪽지 알림이 울린 것은 어느 우중충한 오후였다.
‘흐흐, 또 한 명 걸려들었군.’
진우는 최근 쏠쏠한 돈벌이가 생겼다. 바로 <카페 리을>의 번호표 거래였다.
대체 그 카페가 뭐라고 헌터들이 난리를 치는지는 알 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고작 음료를 주문할 수 있는 종이 쪼가리인데 최소 10루비, 평균 20루비에 거래된다는 사실이었다.
던전 게이트 앞 외진 곳에 있는 카페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매일 돈을 갈퀴로 쓸어 담겠지.
그러니 자신이 멍청한 헌터들 돈을 좀 뜯어낸다고 해도 티도 안 날 테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지.
한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은 카페 주인이 그를 알아봤다는 것이다.
눈썰미도 좋지. 그 많은 인파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기억했는지 모르겠다. 어쨌건 들키면 성가셔질 테다.
‘흠, 당분간만 몸을 좀 사릴까.’
일단 오늘까지만 멍청한 헌터들을 벗겨 먹고 나서 말이다.
그런데 쪽지에는 그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한테 번호표를 팔겠다고……? 이렇게 많이?”
바로 <카페 리을>의 번호표를 장당 3루비에 팔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시세보다 훨씬 싼 가격이다.
진우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쪽지를 보낸 상대방을 만나러 갔다. 수상한 냄새가 나면 거래를 하지 않으면 된다. 만나서 손해 볼 일은 없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렇게 나간 거래 장소.
상대는 세상 물정 모르게 생긴 도련님이었다. 어수룩한 태도로 주위 눈치를 많이 보면서 그에게 번호표 세 장을 내밀었다.
진우의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 번호표면 장당 최저 20루비, 잘하면 30루비는 받을 수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남는 장사였다.
“이걸 나한테 팔겠다고요? 장당 3루비에?”
“네……. 저는 커피를 받으러 갈 시간이 없거든요……. 헌터 채널을 보니 번호표를 거래하시는 거 같아서, 이것도 받으시나 하고…….”
진우는 선심 썼다는 듯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말했다.
“세 장에 10루비 주겠소.”
“……! 감사합니다.”
그런데 10루비를 받아 든 상대방이 돌아가기 전, 불쑥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저…… 내일도 번호표 거래할 수 있는데요. 모레도요.”
“……그게 정말이요?”
상대는 연줄로 얻는 번호표가 있다며, 매일 세 장을 판매할 수 있다고 했다. 어마어마한 호구였다. 당장 알겠다고 얼마든지 가져오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그런데…… 대신 조건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