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뭐요?”
“그, 그렇게 놀라지 마시고요……. 선금을 받고 싶은데요…….”
지속적으로 번호표를 판매하는 대신, 판매 대금 중 100루비를 먼저 달라는 것이었다.
“하하, 갖고 싶은 아이템이 있는데 오늘까지 잔금을 내야 해서……. 안 되시면 다른 사람 찾아보고요.”
“허, 잠깐, 잠깐. 성질도 급하기는!”
진우는 다시 계산기를 두들겨 보았다.
100루비면 그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꽤 큰 지출이었다. 하지만 이런 호구를 놓치기는 아깝다. 망설이는 사이에 다른 상인을 찾아가기라도 했다간, 자신이 호구 잡혔다는 사실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진우는 카페 주인이 얼굴을 기억하는 통에 한동안은 몸을 사려야 한다. 당분간은 이 비즈니스를 할 수 없는 상황.
“흐음…….”
그래, 까짓것. 번호표를 팔면 100루비 정도는 금방 회수할 수 있겠지.
“거 그럼 그렇게 합시다! 내 인심 썼소.”
물론 진우는 호구가 아니다. 때문에 상대의 연락처는 물론이고 헌터 등록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인적 사항을 넣어 간이 계약서까지 작성한 뒤에야 선금을 지급했다.
그렇게 번호표를 받아 든 진우가 허겁지겁 자리를 뜨고.
남겨진 거래 상대는 생긋 웃으며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짧은 신호가 가고 전화가 연결된다. 그의 표정에는 더 이상 어수룩함은 남아 있지 않다.
“헬로. 말한 대로 처리했어. 이 돈은 갖고 있어 봐야 쓸데없으니 적당한 데 기부할게.”
- 그래.
“나한테 빚 하나 진 거다?”
- …….
대답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매정하기는.
남자는 방금 진우에게 보여 준 헌터 등록증을 검지손가락으로 쓸었다. 환영술이 지워지며 원래의 글자, 환영술사 오서호의 이름이 나타났다.
랭킹 18위의 헌터이나 지금은 연예인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환영을 다루는 그의 능력만큼은 진짜였다.
‘그 카페가 대체 뭐길래 1위씩이나 되어서 저런 날파리한테까지 신경을 쓸까.’
호기심이 생긴다. 조만간에 직접 알아보도록 할까.
* * *
“이게 무슨 일이지……?”
진우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헌터 채널에 <카페 리을>의 번호표 판매 글을 올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평소대로라면 채 10분이 가기도 전에 쪽지가 쏟아질 텐데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설마 판매 글을 올렸다고 차단당했나?
그럴 리가. 쉽게 들키지 않으려고 제목을 여러 번 바꿔 가며 올렸다.
“흐음…….”
시계를 보니 어느덧 카페 오픈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전에 이 번호표를 다 처리해야 할 텐데.
마음이 초조해졌다. 진우는 큰마음 먹고 가격을 대폭 낮춰 판매 글을 썼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이번에는 연락은커녕, 글의 조회수조차 거의 올라가지 않았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다.
‘혹시 유행이 지났나?’
진우는 헌터 채널에 <카페 리을>에 관련된 검색어를 넣은 뒤, 가장 최신 글을 눌러 보았다.
[잡담] 마음이 벅차오른다,, (4)
추천: 38 / 비추: 0
작성자: 설탕할짝
ㅠㅠㅠㅠㅠㅠ
빙결 속성 대미지 땜에 계속 못 뚫던 던전 있었는데
하필 빙결무효포션도 다떨어져서 동결건조되기 직전이었슴
그 이상한 문짝 통해서 ㅋㅍㄹ 커피주셔서 클리어했음ㅜ
ㅈㄴ감사하다
급한상황이었는데 돈도 딱 정가만 받으심;ㅜㅜ
ㅇㅇ: ㄹㄹ 갓임
위탁상점2호: 삭막한 헌터계에 내려온 빛리을,,ㅜ
red***: 솔직히 음료가격 너무싼듯 빛빛빛 글케 팔아서 남는거있나ㅜ
└ㅁㅁ: ㅋㅋㅋ아픈사람 앞에놓고 급행료받는 약국놈들이 개에바;
여전히 별것도 아닌 커피 가지고 온갖 염병을 다 떨었다. 그러니 유행이 지난 것도 아닌 듯한데, 번호표는 팔리지 않는다.
젠장, 이대로는 돈만 날리게 생겼다.
시계를 보며 갈등하던 진우는 몸을 일으켰다.
직접 이 번호표로 커피를 구입한 뒤, 그 커피를 판매할 생각이었다. 상태 유지에 시간제한이 있어서 빠듯하지만, 이 또한 호구를 잘 잡으면 비싸게 팔 수 있었다.
그러나…….
“으음……?”
번호표를 받아 든 카페 주인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번호표를 진우에게 그대로 돌려주었다.
“죄송하지만 이걸론 판매를 할 수 없어요.”
“뭐요? 번호표가 있는데 왜 못 판다는 거요?”
“이거 직접 받은 거 아니시죠?”
카페 주인이 번호표 구석에 찍힌 작은 마크를 가리켰다.
“이 번호표는 최초 소유자 귀속 효과가 있어요. 최초 소유자시면 빛이 날 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네요.”
귀속 효과는 보통 고급 장비나 아이템에만 부여한다. 그런 것을 이런 종이 쪼가리에 쓰다니 기가 막히는 한편. 이미 투자한 돈은 회수해야 했다. 진우는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거, 친구한테 받은 겁니다. 친구끼리 대신 받아 줄 수도 있는 거 아니요.”
“그래도 본인이 오는 게 원칙이라서요.”
“친구가 나더러 여기 커피를 마셔 보라고 받아다 준 거라니까. 그 성의를 땅에 버리라 이건가?!”
완강한 진우의 태도에 카페 주인이 한 발 물러난 듯했다.
“정 그러시면 이번에만 받아 드릴 순 있는데요…….”
그러나 이어진 카페 주인의 말을 듣고 진우는 낯빛을 굳혔다.
“음료도 귀속 효과가 걸려 있어서, 오직 최초 소유자 본인이 마실 때만 효과가 있거든요. 그래도 괜찮으세요?”
“……!”
구깃. 진우는 손에 쥔 번호표를 구겨 버렸다.
그래서는 판매가 불가능하니 아무 의미가 없다. 고작 커피 한 잔을 사 마시려고 이런 외진 곳까지 온 게 아니었으니까.
“귀속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돈은 어떡하라고!”
“돈이라뇨? 이 카페는 예약금은 따로 받지 않는데요?”
당했다.
사고보다 먼저 직감이 알렸다. 당했다고. 허접한 핑계를 대면서 선금을 뜯어 간 그 어리숙한 샌님이 뒤통수를 쳤다. 귀속 효과에 대해 알고 돈을 뜯은 것이 틀림없다.
호구 잡혔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신! 그 샌님하고 짜고 내 돈을 뜯어 간 거지!”
“네? 무슨 말씀이세요?”
조금만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억측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테다. 그러나 호구인 줄 알았던 상대가 자신을 호구 잡았다는 사실이 그를 분노케 했다.
시선이 쏠린다. 등 뒤에서 수군거림이 들렸다.
욱 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난동을 부리지는 못했다. 뒤에 줄을 서서 자신을 노려보는 헌터가 척 봐도 강해 보였기 때문이다.
“크흠, 아니, 뭐 됐수다. 이만…….”
결국 진우는 주춤대며 뒤로 물러섰다. 훌륭한 강약약강의 자세였다.
하지만.
“손님, 잠깐만요. 이거라도 가져가세요.”
카페 주인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음료가 든 컵이었다.
“누굴 약 올리는 거요?”
탁, 하고 컵을 쳐내 그대로 바닥에 쏟아 버리려 했다.
찌릿.
다시 등 뒤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호의를 거절하거나 음료를 쏟기라도 했다간 가만 안 둘 기세였다.
‘호구 같은 놈들…….’
속으로야 그런 욕을 중얼거렸지만 맞설 자신은 없었다. 오랫동안 강약약강의 자세를 체화한 진우는 투덜거리며 컵을 받았다.
곧장 시스템 알림이 떴다.
[최초 소유자로 확인되었습니다.]
[아이템: 레몬에이드에 귀속 효과가 부여됩니다.]
* * *
나는 귀속의 사인펜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미리 만들어 둔 번호표에 슥슥 거침없이 마크를 표시해 나갔다.
이 사인펜으로 암표꾼들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번호표와 음료에 귀속 효과가 부여된다고 공지를 올리고 하루 정도는 혼란이 있었다. 하지만 금방 정리되었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장사꾼들을 몰아낼 수 있다고 기뻐했으니까.
“흐음, 이상한데…….”
“왜 그래?”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서 말했나 보다. 옆에서 아스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 다시 작업에 열중했다.
“역시 이상하단 말이지…….”
왜 퀘스트 완료가 안 뜨지?
더 이상 장사꾼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헌터 채널도 뒤져 보았지만 번호표나 커피를 거래한다는 글은 없었다.
그러면 완료된 거 아냐? 다 된 거 맞잖아? 설마 전에 보상이 쩨쩨하다고 투덜거려서 그래?
[최선을 다해 준비한 보상입니다. 소중하게 여깁시다. ٩(ㅇㅅㅇ)ง]
삐졌구나…….
그래, 쩨쩨하다고 해서 미안해. 소중하게 간직할게.
그렇게 말했지만 여전히 퀘스트 완료 알림은 울리지 않았다.
나는 퀘스트 창을 열어 완료 조건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부당이득을 취하는 상인 몰아내기: (미완료)]
딱히 다른 조건은 적혀 있지 않다. 그럼 여기서 뭘 더 해야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는 걸까.
그 의문은 곧 풀렸다.
“내 돈은 어떡하라고!”
너무나도 그림으로 그린 듯한 장사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스, 진정해. 괜찮아.’
나는 당장 뛰쳐나오려는 아스를 진정시켰다.
장사꾼은 화를 내기는 했지만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더 따져 대지는 못했다.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그나저나 이 상황에 기시감이 느껴지시는 분?
전에 우리 카페에 기자 아저씨가 왔을 때가 떠올랐다. 가끔 포털 사이트 메인에 그 기자 아저씨의 이름이 보여서 반가웠다. 진정한 저널리스트의 길을 걷고 계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기자 아저씨의 마음을 정화한 것이 바로…….
‘이거였지.’
나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레몬에이드를 장사꾼에게 건넸다.
“누구 약 올리는 거요?”
처음에는 거부하려던 장사꾼 아저씨는 주위의 눈치를 이기지 못하고 마지못해 레몬에이드 컵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마신다.
“……!”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남은 레몬에이드를 다 비운다. 장사꾼 아저씨가 맑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인생을 잘못 살았어.”
역시 또 이렇게 되는구나…….
이미 한 번 겪은 일을 전부 다 말하면 지루할 테니까 짧게 요약하자면.
아무튼 앞으로 선량하게 살겠다, 뭐 그런 이야기였다.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암표 거래 근절하여 광명 찾자’를 완료했습니다.
쩨쩨한 보상을 수령해 주세요.]
경험치: 10exp를 획득했습니다.]
[실버 티스푼을 획득했습니다.]
[명성: 1 / 인기: 2를 획득했습니다.]
[카페 리을의 현재 등급: D]
[아이템: 실버 티스푼 (★★☆☆☆)
그냥 티스푼입니다. 의외로 무기로도 쓸 수 있습니다.
종류: 빠른 속도 단거리 무기
공격력: 1
비고: 독극물에 닿을 시 변색됩니다.]
이렇게 장사꾼이 퇴치되고 곧장 퀘스트 완료 알림이 떴다.
나는 상태 창을 대강 눈으로 훑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껏 이 레몬에이드를 주문해서 마신 손님은 그밖에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감상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어쩐지 상쾌한 기분인 기분이에요.”
“머리가 깨끗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마 마음이 안정되는 데 도움을 주는 것 같다는…….”
건강 보조 식품 홍보 문구보다도 더 불분명한 표현. 까놓고 말하면, 특별한 버프 효과는 없었다 이 뜻이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엄청난 효과를 냈다.
설마 ‘정신을 정화한다.’라는 게 소악(小惡)을 정화한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이 레몬에이드의 등급을 올리면 더 엄청난 것을 정화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마시게 해서 경범죄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도?
으음, 진지하게 가능할 것 같아서 좀 무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