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왜오옹…….”
“미음아, 왜 그래?”
“왜우우웅……. 위대하신 시스템, 그분은 네 의사에 반해서 행동할 수는 없다.”
“그래?”
조금 전 큰아버지가 한 말이 신경 쓰였나 보다. 미음이는 눈을 도르르 굴리며 한참 눈치만 보다가 덧붙였다.
“이것만은 사실이다. 믿어 다오, 왜옹!”
큰아버지가 시스템에 대해 한 말은 일리가 있었다. 시스템, 즉, 성녀는 어떤 의도를 갖고 내게 능력을 부여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스템이 준 스킬과 퀘스트가 내게 도움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니까…….
나는 픽 웃으며 미음이의 말랑한 볼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그래? 미음이 넌 누구 편인데? 나야, 시스템이야?”
“왜옹, 왜오오옭! 그 질문은 치사하다!”
마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는 질문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미음이는 갈팡질팡했다. 한참 뒤에 나를 슬쩍 쳐다보며 작게 대답했다.
“당연히……. 인간, 네가 더 좋…….”
“탈락! 답변 시간 초과했어. 오늘은 간식 안 줄 거야.”
“나, 나는 진지하게 대답하려고……. 나를 놀린 거냐! 왜옹!”
“아, 들켰다.”
“캬갸갸옭!”
파바밧. 냥냥 펀치가 날아왔다.
그 사이에 이 고양이한테 정이 많이 들었나 보다. 놀리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 것을 보니.
시스템 운운이 어떻건 간에.
‘계속 우리 집 고양이 하면 좋겠네…….’
나는 라임이, 그리고 보란 듯이 삐진 티를 내는 미음이와 함께 이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음메에에!”
라임이를 발견한 코르넬리아 롱기누스가 축사에서 나와 달려왔다. 혀로 라임이를 마구 핥아 댄다.
참고로 코르넬리아 롱기누스란 이 황금삼각뿔소의 이름이다.
……하나 변명하자면 내가 지은 이름 아니다. 정말이다.
도무지 황금삼각뿔소의 이름으로 괜찮은 것이 떠오르지 않아서, 우리 집 식구들에게 하나씩 이름 후보를 받기로 했다. 투표를 해서 민주적으로 뽑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비읍이 어때?”
후보 1번, 이건 내 의견이다.
“대충 얼룩이라고 부르면 괜찮지 않느냐, 왜옹!”
후보 2번, 미음이의 의견.
“뀨웃! 뀨우웃!”
후보 3번, 번역해 보니 피타고라스라는 뜻이었다. 삼각뿔이라 피타고라스인가 보다.
“벨리알. 후훗, 내가 지었지만 멋진 이름이야.”
후보 4번, 아스의 의견. 찾아봤더니 무슨 악마의 이름이란다.
이렇게 네 개의 후보가 나왔지만, 모두가 자신의 이름이 최고라고 주장해 의견이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투표는 무승부로 끝났고, 갑론을박 끝에 황금삼각뿔소더러 직접 고르게 하기로 했다.
“음메에에! 음메!”
그런데 이 소는 콧김을 뿜으며 엄청나게 화를 냈다.
[소환수: 사랑에 빠진 황금삼각뿔소가 자신의 이름을 밝힙니다.]
[이름: 코르넬리아 롱기누스]
그, 음, 이름이 되게 우아하고 멋지네.
[코르넬리아 롱기누스가 왜 남의 이름을 멋대로 정하려 하냐며 화를 냅니다.]
어, 미안…….
“음메!”
사과를 받아들이겠다는 듯 황금삼각뿔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이 소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코르넬리아의 축사에 새 물통을 놓아 주었다. 이 소에게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줘야겠다 싶어서 준비한 것이다. 그리고 가득 찬 우유 통을 새것으로 교체해 주었다.
일을 마치고, 우유 통을 들고 나가려는 바로 그때였다.
“……?”
문득 시야의 한쪽 구석에 슬레이트를 올린 지붕이 보였다. 절벽 아래에 있던 오두막의 지붕이었다.
맞다, 저곳.
김덕이 할머니의 부탁으로 손거울을 찾을 때 발견한 곳이다. 저곳에 우리 할머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왜 잊고 있었을까.
잠깐, 설마.
아니,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되지만……. 어쩌면 크투가가 말한 할머니가 살던 오두막이 바로 저곳이 아닐까.
나는 우유 통을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왜옭, 어디 가는 거냐?”
“뀨우웃?”
동물들의 부름을 뒤로 하고 절벽을 내려갔다.
돌 더미의 틈새로 난 자그마한 길을 지나면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오두막은 숲의 경계선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당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툼한 카펫이 깔린 거실 같은 분위기의 방. 테이블 뒤로는 자그마한 문이 있었다. 처음 왔을 때는 가구에 가려진 통에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문 너머는 옛날 방식으로 지어진 부엌이었다. 아궁이에 숯 조각이 남아 있다. 사람이 살던 흔적이었다.
바로 알았다. 크투가가 말한 오두막이 여기가 맞다.
“…….”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동안은 이 이공간의 정체에 대해 크게 의문을 느끼지 않았다. 사방은 안개에 감싸인 숲. 빽빽한 숲은 길조차 없어 너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그냥 작물을 심고 기르는, 폐쇄된 공간이려니 여겼을 뿐이다.
크투가가 말한 오두막이 정말 이곳이라면, 이 이공간은 대체 어디인 거지?
정제되지 않은 의문이 툭, 툭 튀어나와 머릿속을 어지러이 휘몰아쳤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다.
여기에 또 다른 할머니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찾자. 분명 뭔가 힌트가 될 만한 것이…….
그러나 오두막은 텅 빈 상태. 그럴듯한 물건은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나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불이 꺼진 아궁이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다 바스러진 재 속을 휘휘 저으니 단단한 것이 손에 닿았다.
“……이거다.”
수첩이었다.
나는 검댕이 묻어 엉망인 표면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구석에 ‘박희순’이라고 할머니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일기장 같다.
대체 무슨 내용을 적어 두셨을까?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채 일기장을 펼치는 순간이었다.
“읏……!”
일기장의 텅 빈 페이지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정신이 어디론가 끌려 들어간다. 빠르게 필름을 되감는 듯한 소리와 함께 시야가 멀어졌다.
어느새 나는 컴컴한 어둠 속에 있었다.
이런 일은 이미 한 번 겪었다. 나는 내가 환상을 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눈앞에서 영상이 빠르게 되감기더니 어느 한 장면에서 멈춘다.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아둔하신 우리의 왕이여.】
【억겁의 시간을 반복해도 좋다.】
【인과의 끝에 이르러, 암흑의 옥좌에 앉은 왕을 일깨울 수 있다면.】
【그래, 억겁의 시간을 넘어서라도.】
이어 영상 안으로 내 의식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순간, 나는 낯선 공간에 있었다. 커다란 강당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나는 무심코 바닥을 확인했다. 단단한 감촉과 함께 흙으로 발자국이 찍힌다. 성녀가 불렀을 때와 같다. 단순한 환상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진짜 같은 풍경이었다.
그때와 다른 점은 이곳에 많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은 초등학교 고학년쯤으로 보이는 아이들, 그리고 인솔자처럼 보이는 성인이 한두 명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일단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돌아다녔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그때, 낯이 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저기, 얘!”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아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네?”
다행이다. 이 소년은 제대로 내 목소리를 들었다. 살짝 짜증이 난 표정으로 소년이 돌아보았다.
“나 기억 안 나? 우리 만난 적 있잖아.”
“모르겠는데요.”
크투가의 정원에서 돌아오던 길, 나를 이끈 그 소년이다.
그러나 소년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부루퉁한 표정을 할 뿐이었다.
“나는 권리을이라고 해. 얘, 네 이름은 뭐니?”
“선생님이 모르는 어른한테 이름 말하면 안 된다고 그랬어요.”
아주 똘똘한 소년이었다…….
“선생님? 여기 학교야?”
“그것도 몰라요? 누나 진짜 수상하네. 진짜 유괴범 이런 거 아니에요?”
“어? 아니, 아니야! 나는 그게, 물건 배달하러 온 사람이야! 그래서 잘 몰라서, 아하하.”
“흐음.”
대충 납득한 것 같다.
다행이다. 환상이라지만 유괴범으로 몰리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여기는 <교단>이에요.”
“뭐? 방금 뭐라고…….”
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소년은 내 말을 듣지 않고 다른 화제를 꺼냈다.
“오늘은 수학여행 가는 날이라서 다 모였어요. 나는 제주도 가고 싶었는데, 경주로 간대요. 누나는 제주도 가 봤어요?”
“어? 어, 한 번 가 봤어.”
“체, 부럽다.”
소년이 바닥을 가볍게 찼다.
“그보다, 아까 한 말은 무슨 뜻이야? <교단>이 뭔데?”
“그것도 몰라요? 그거야 당연히, 별의…….”
그때 강당에 차임벨 소리가 울렸다. 소년은 말을 끊고 고개를 돌렸다.
어른 한 명이 아이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그가 선생님일까.
그 뒤에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강당에 달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문이다.
왤까. 저 문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굉장히 불길하고…… 열어서는 안 될 듯한 직감.
“어! 모일 시간이에요. 가야겠어요.”
“자, 잠깐만!”
황급히 손을 뻗었지만 허공만 움켜쥐었다. 타다닷, 세 발짝을 뛰어간 소년이 나를 보고 생긋 웃었다. 그 웃음은 내가 아는 사람과 무척 닮아 있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내 이름은 기유현이에요.”
“……!”
소년이 멀어진다.
그 이후로 일어난 일에 내가 개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순식간에 시야가 아득해졌고, 나는 눈앞의 광경을 관객처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문이 열리고, 너머의 무서운 것이 소환되려 한다.
그제야 나는 이곳이 무엇을 하기 위한 장소인지 알아차렸다.
안 돼. 여기 있는 애들 모두 죽을 거야. 섬찟한 예감이 머리에서 번뜩였다.
곧 주변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아이들이 고통에 절규하며 실신했다. 소년이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았다. 괴로워 보인다.
안 돼, 뭘 하는 거야. 저러다 죽겠어!
그렇게 외쳤지만 내 목소리는 저편에 닿지 않는다.
가냘픈 몸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픽 쓰러지는 순간.
천천히 떨림이 멎는다. 열린 문틈으로 뻗어져 나온 빛의 그물이 소년의 몸을 감싸고 끌어당긴다.
아, 알겠다. 이건 그의 ‘각성’이다.
한번 허물어진 소년의 마음을 빛의 그물이 감싸고 기웠다. 빛의 그물에 이끌려, 소년의 영혼이…….
【어머, 이런 것을 보고 있었다니.】
“……!”
성녀의 목소리였다.
【즐거운 관람 되셨을까요?】
【미안하지만 이 이상은 당신에게 보여 줄 수 없어요.】
【자, 돌아가도록 하세요, 당신의 세계로.】
…….
…….
시야가 암전한다.
“헉, 허억……!”
땀으로 이마가 축축했다. 희뿌연 햇빛에 눈이 따끔거린다.
정신을 차리자 나는 불이 꺼진 아궁이 앞에 주저앉은 채였다.
“왜오오옭! 인간, 너 거기서 뭐 하느냐!”
“뀨우우, 뀨우!”
뒤늦게 나를 쫓아 온 미음이와 라임이가 앞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
“캬갸옼! 검댕 묻은 손으로 나를 만지지 마라!”
일단 방금 환상 속에서 본 소년이 기유현의 어린 시절 모습인 건 확실해 보인다. 그것까진 알겠다.
그렇다면 별의 길에서 만난 소년은 왜 어린 기유현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타임 패러독스인가 뭔가 영화에 많이 나오는 그거?
나 회귀한 것 아니었나? 사실 회귀가 아니라 시간 여행 그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