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게다가 어린 기유현이라니.
지금하고 성격이 달라서 귀엽긴 했는데, 그렇게 어려지면 내가 곤란……. 아아아아아니, 이게 아니라.
진정하자. 문제가 있으면 답지가 있는 법이다. 수학 학습지의 답지를 찾는 마음으로 나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혼자서 뭘 그렇게 중얼거리는 거냐, 왜오옼!”
“…….”
얘는 패스. 딱 봐도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다.
“나를 무시하는 거냐!”
나날이 눈치가 빨라지는구나, 미음아.
다시 할머니의 일기장을 펼쳐 보았지만 이제 환상은 보이지 않는다. 달리 적힌 글도 없어 텅 빈 페이지만이 이어졌다.
기유현은 며칠 연락이 안 된다고 했지. 설령 된다고 해도 어린 시절의 일을 불쑥 묻기가 껄끄러웠다.
그가 말하지 않은 과거에 대해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설명하기 곤란했다. 그의 의심을 살 수도 있을 테다.
무엇보다 그 괴로워하던 모습, 적나라한 광경.
단지 내 의문을 풀기 위해, 그가 말하지 않은 고통을 멋대로 언급해도 될까. 내 질문이 괜한 기억을 파헤치지 않을까. 우리가 그럴 만한 사이일까.
그러면 남은 건…….
나는 일단 몸을 일으켜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불에 타기 쉬운 식물과 거리를 벌리고 적당한 공터에서 시스템 창을 열었다.
[스킬: 영겁의 불꽃(S)을 사용합니다.]
[크투가를 소환합니다.]
화르르.
타오르는 불꽃과 함께 크투가가 나타났다.
불꽃이 서서히 붉은 머리카락을 한 인간의 모습으로 화한다.
그런데 시스템 알림이 끝나지 않았다.
[반경 10m를 영겁의 불꽃으로 공격합니다.]
[10초 내에 취소하지 않을 시 자동으로 실행됩니다. 10, 9, 8…….]
“으악, 취소! 취소해!”
[공격이 취소되었습니다.]
헉, 깜짝 놀랐네. 뭐 이런 무서운 반지가 다 있지.
반경 10m를 모조리 태우면 나도 죽는 거 아니야?!
나는 스킬 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영겁의 불꽃(S)’ 아래에 자그마하게 옵션 선택 창이 있었다.
[자동 공격: on ☜ / off]
이렇게 무서운 옵션의 기본 설정을 ‘on’으로 해 놓다니, 정말 방심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얼른 옵션을 ‘off’로 바꿔 놓았다.
“손녀여!”
완전히 인간으로 화한 크투가가 나를 불렀다.
“그동안 왜 한 번도 나를 불러 주지 않았느냐. 그동안 얼마나 심심…… 크흠, 아니, 쓸쓸했는지 아느냐.”
크투가는 그대로 나를 껴안으려다 멈칫했다. 숲의 경계선에 자리한 오두막을 보고 놀란 눈을 했다.
“설마, 저곳은……!”
후다닥. 크투가가 오두막을 향해 달려갔다. 텅 빈 거실을 지나 부엌의 아궁이를 발견하고 털썩 무릎을 꿇는다. 바람결에 탄식이 흐트러진다.
“오오…….”
그 반응만 봐도 답은 분명하지만, 나는 확인차 물었다.
“할머니가 지내시던 곳이 이곳이 맞아요?”
“그래, 그렇다.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 줄은…….”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이 수첩을 찾았어요.”
수첩을 펼쳤을 때 본 환상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니 크투가가 말한다.
“그건 희순 씨가 남긴 인과의 파편 같구나. 쉽게 말하면 끊어진 고리의 편린.”
“죄송한데 전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끊어진 고리의 편린이 뭘까. 진짜 머리끈 이야기는 아닐 거 아닌가.
“허, 참! 이래서 필멸자들이란. 이 쉬운 설명을 못 알아듣다니. 거, 뭐냐. VR 체험이다. 그래, 과거를 들여다보는 VR 게임!”
“아하…….”
맞춤형 설명에 겨우 고개가 끄덕여졌다.
즉, 그건 기유현의 과거가 맞단 이야기였다.
고통스러워하던 소년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교단>은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또 할머니는 왜 다른 것도 아닌 기유현에 대한 기록을 남기신 걸까. 생전에 그와 아는 사이는 아니셨을 텐데.
“…….”
“…….”
나는 나대로, 크투가는 크투가대로 생각에 잠겼다.
나는 할까 말까 망설이던 말을 결국 꺼내면서 무거운 침묵을 깨뜨렸다.
“예전에 할머니가 말없이 떠났단 이야길 했었죠.”
“…….”
“할머니가 여기를 떠나신 건, 제 부모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이에요. 갑자기 연락이 끊긴 건 본의가 아니셨을 거예요. 그러니까…….”
끝내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나는 말끝을 흐렸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에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기억이 없으니 슬픔도 없다. 그저 막연한 상실감뿐이다.
최초의 균열.
대던전 《어비스》가 발생하고, 오래지 않아 세계 각지에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 대규모의 균열을 말한다.
부모님은 이 최초의 균열에 휘말려 돌아가셨다. 나만 혼자 운 좋게 구조되었다고 한다. 내게 남은 것은 한 장의 사진이 전부다.
“그래……. 그런 거였나.”
아궁이 앞에서 몸을 일으킨 크투가가 오두막을 나섰다.
이번에는 절벽 위에서 팔짱을 끼고 오두막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이곳에 이미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더듬는 듯 아련한 표정이다.
문제는 그의 감정이 요동칠 때마다 주변에서 불꽃이 화르르 타오른다는 점이었다.
이곳은 그가 멋대로 불을 지르기에는 너무 위험한 환경이었다.
“으아앗, 조심하세요!”
“……!”
한숨 한 번 쉬었다가 던전 사탕수수를 몽땅 태워 먹을 뻔한 크투가가 움찔 놀랐다.
“크흠, 미안하다. 고의는 아니었다.”
“죄송한데 저기, 저쪽에 가서 계세요.”
내가 가리킨 곳으로 가서 크투가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다시 아련한 표정으로 탄식을 내뱉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가지가 장작이 될 뻔했다.
“손녀여, 어찌된 게 여기 가연성 물질이 너무 많구나.”
“그야 밭이니까요…….”
이공간 안을 이리저리 방황하던 크투가는 결국 커피 생두를 담아 둔 상자 앞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그가 마음대로 불을 지를 수 있는 대상이었다.
아무래도 크투가는 스스로 가스버너가 되는 데 익숙해 보인다. 화르르 불이 타오르고, 곧 원두가 볶아지는 소리가 났다.
진한 커피 냄새를 맡으며 나는 잔디에 주저앉았다.
하나의 의문이 풀리나 싶더니 또 하나의 의문이 생겨난다.
카페 주인이 하고 싶댔지 탐정을 하고 싶다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나는 미스터리 소설도 범인 스포일러 먼저 확인하고 읽는 사람이란 말이다.
“왜옹…….”
그때 미음이가 내게 다가왔다. 라임이는 황금삼각뿔소의 축사에 갔는지 옆에 없었다.
“미음아, 왜 그래?”
“잊지 마라. 너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
“하고 싶은 일?”
“가장 처음 그분에게 네가 바랐던 일 말이다. 네가 이루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이 네 역할이다. 왜우웅…….”
“흐음…….”
나는 가만히 미음이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달리 진지한 표정이다. 꼭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은 것처럼 절실해 보이기도 했다.
“우리 미음이, 웬일로 맞는 말을 하는구나.”
“나는 항상 맞는 말만 한다, 왜옹!”
“그래, 그래.”
손을 뻗어 미음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귀찮은 듯 고개를 피하다가도 곧 미음이가 골골골 소리를 냈다.
그래, 이 고양이의 말이 맞다.
휴, 무심코 말려들 뻔했네. 하마터면 세계의 비밀을 고민하는 사람이 될 위기였다.
기유현의 과거도, 할머니가 보신 인과의 정체도 지금으로서는 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시스템 창을 열어 업적 리스트를 확인해 보았다. 가장 처음 얻은 ‘초보 카페 주인’ 업적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얻은 업적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커피로 세상을 이롭게 할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 얼마나 명료하고도 좋은 문구인가.
의문은 후일 또 다른 회귀자에게 이야기하도록 하고, 그 전에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카페 경영 말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난 그때, 크투가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손녀여, 여기 커피를 전부 볶아 두었다.”
그 많은 양을 벌써 다?
그뿐만 아니라 빛깔도 완벽했다. 섬세한 불 조절로 최적의 로스팅이 완성되었다.
“으하하하! 이런 것쯤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으니 또 부르거라.”
자신의 행동에 뿌듯해하며 크투가는 알아서 돌아갔다.
기운을 차렸으니 다행이네…….
커피 볶으면서 즐거워하는 불멸자도 있는데, 나도 일이나 열심히 해야겠다.
그런 간단하면서도 진취적인 결론을 낸 나는 씩씩하게 가게로 돌아갔다.
“왜 이제 와?”
건축 미니어처에 푹 빠져 있을 터였던 아스가 내 소매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아스,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저걸 좀 봐!”
“어?”
아스가 창밖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나는 깜짝 놀랐다. 잘 보이는 위치에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거기 적힌 내용이라는 게…….
“<카페 리을> 규탄한다……?”
정말 바람 잘 날 없는 카페 경영이다.
* * *
산타클로스, 아니, 권석민은 걸음을 서둘렀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들뜬 거리. 붉은색 산타 복장에 위화감을 느끼는 자는 없다. 어쩌다 눈길을 주는 사람도 판촉 이벤트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지리산 천왕봉의 숨겨진 제단에서 ‘티코운 영약’을 가져오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제단의 입구는 감시자가 지키고 있다.
그러나 시스템과 연결이 끊긴 권석민은 감시자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미로 던전에 들어갔다 나온 전화위복이랄까.
“떼잉, 약간 시차가 날 수 있다더니 6년씩이나 날려 버리는 건 뭐냐. 아주 사기야, 사기.”
권석민은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미로 던전에서의 경험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했다. 그러나 이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도 있다.
‘놀라운 일이지. 지금의 세계가 사실…….’
“오랜만이에요.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실까요, 권석민 헌터.”
차가운 목소리가 권석민의 생각을 끊어 냈다. 흠칫 놀란 권석민이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좁은 골목의 끝, 한 여자가 앞을 막고 서 있었다.
정장 차림에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팔짱을 낀 자세는 성공한 자 특유의 여유가 느껴진다.
“나는 그냥 지나가던 산타이외만.”
“기억 안 나세요? 벌써 6년 전이지만 길드장 회의에서 뵌 적도 있는데.”
“요즘 나이가 들어서 기억이 깜빡깜빡하다 보니…….”
“그때 저는 아직 신생 길드의 대표에 불과했지만, 권석민 헌터와 악수도 했었답니다.”
생긋, 이세인이 미소를 지었다.
“……허.”
잠시 말없이 그 모습을 쳐다보던 권석민이 혀를 찼다.
“재미도 없는 장난은 그만두지. 벌써 그 몸을 집어삼켰군, 이온.”
“어머. 눈치채셨나요?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어떻게 그 안에서 살아 나왔죠?”
“떼잉, 사람을 미로에 처넣고 말이야. 길치한테 너무했어, 정말.”
“무한의 미궁. 한낱 인간의 몸으로는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인데, 무슨 수를 쓴 거죠?”
“흐핫핫핫! 하하핫!”
권석민은 거세게 웃음을 터뜨렸다. 골목의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파안대소한다.
동시에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등 뒤에 셋, 앞에 셋. 이미 포위되었다. 그 혼자의 힘으로 도망치기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미친 혼돈의 화신이여. 네가 나를 찾아온 걸 보니 아직 못 찾은 모양이지?”
이세인의 몸을 한 이온의 낯빛이 사납게 굳었다.
“마도서는 어디 있지?”
“글쎄, 요즘 나이가 들어서 기억이 영 가물가물해. 그걸 어디다 뒀더라…….”
“마도서의 위치를 말하면 살려 드릴 수도 있답니다.”
“어린이에게 행복을 배달하는 산타클로스를 방해하다니, 애들이 원망할걸.”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이세인이 생긋 웃었다. 가볍게 손짓하자 습격자들이 둥글게 권석민을 포위한다.
“역시. 말할 생각은 없나 보군요.”
“……윽!”
뒤에서 괴한이 권석민을 공격했다.
퍽!
시야가 암전한다. 권석민은 그대로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