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 * *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테이크아웃용 컵을 손님에게 건네고 고개를 돌리다가, 나는 흠칫 놀랐다.
‘카페 리을 규탄한다.’
대형 플래카드가 시선을 강탈했기 때문이다.
“…….”
카페 바로 건너편, 카운터에서 잘 보이는 위치에 저런 플래카드가 있으니까, 뭐랄까.
자기 삶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잘못 살았나?’
무단 횡단 한 번 하지 않고 건실하게 살았는데.
회귀 직후에는 게으름을 좀 피우긴 했지만, 그건 누구라도 그럴걸.
주중에 풀타임 근무 및 야근까지 하고 토요일 새벽 5시에 헬스장에 갈 수 있는 사람만 나를 비난할 수 있다, 암.
“왜우웅(당당하게도 말하는구나).”
“…….”
어제 분리수거도 했고 손도 깨끗이 씻고 인증서 갱신도 했는데? 뭐가 문제지?
헉, 무심코 과거를 돌아보며 무익하게 반성할 거리를 찾을 뻔했다.
“아스, 나 잠깐만.”
플래카드의 자기반성 유발 효과를 견디지 못하고 나는 플래카드 가까이 다가갔다.
여기서 <카페 리을>을 규탄하는 이유라도 알아야겠다.
그러나 플래카드에는 단체명이나 이유가 한 마디도 적혀 있지 않았다. ‘카페 리을 규탄한다.’라는 문구가 전부.
샤샤샥.
내가 다가가자 플래카드 뒤에서 도망치는 사람의 인기척이 났다. 그는 골목 귀퉁이에 숨어 이쪽을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기,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
“무슨 이유로 이런 걸 거신 거예요?”
“…….”
대답은 없었다. 그럼 어쩔 수 없군.
나는 침착하게 핸드폰을 켜서 불법 현수막을 신고했다.
오래지 않아 구청에서 나온 사람이 현수막을 수거해 갔다.
휴, 이제 살 것 같군.
그리고 이날 저녁, 카페 영업을 마친 후.
“나 창고 좀 봐도 돼?”
앞치마를 벗자마자 아스가 물었다.
“되긴 한데, 왜? 뭐 필요해?”
“건축 재료가 모자라서.”
“응, 다녀와.”
아스는 요즘 건축 미니어처 만들기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런데 미니어처 세트의 설명서대로 만드는 데 만족하지 않고, 직접 건물 개조까지 했다.
아직 완성 전이라며 내게는 보여 주지 않아서 대체 무얼 만드는지는 모르겠다.
어쨌건 적절한 취미 생활은 워커홀릭이라는 무서운 병 방지에 도움이 되니까 환영이다. 노동 디톡스는 중요하니까.
아스를 창고로 보낸 다음, 난 스킬 ‘바닥이 반짝반짝’으로 홀을 청소했다.
입구의 전등을 끄고 이제 쉬려던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열렸다.
“죄송해요. 오늘 영업은 벌써 종료했어요.”
“<카페 리을>의 사장을 만나고 싶습니다.”
문 앞에는 낯선 남녀가 서 있었다. 큰 각오를 다지고 문을 두드렸는지 심각한 표정이다.
나는 이들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외투 안에 ‘카페 리을 규탄한다.’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었기 때문이다.
아하, 그 불법 현수막을 설치한 사람들이구나.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왜 그런 자기반성을 유발하는 플래카드를 설치했는지 일단 이야기나 들어 보자는 마음에서였다.
“어쨌건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뭐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
예의상 그렇게 말했는데 두 사람이 놀란 눈을 했다. 얼굴에 선명한 경계심이 드러난다.
“아니요, 적이 베푸는 것을 받을 순 없어요.”
“적?”
여자 쪽이 남자 쪽을 진정시키며 대신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찬물이나 주세요.”
그렇게 말한다면야…….
나는 이들에게는 얼음물 두 잔을 내주고, 내 몫으로 따뜻한 카페라테를 만들었다.
고소한 냄새가 공기 중에 확 퍼졌다. 부드럽고 고소한 커피의 맛이 하루 종일 소모된 기력을 회복해 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내 커피 잔에 모였다.
먹고 싶어 하는 표정 같은데…….
“좀 드시겠어요?”
“크, 크흠!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뭐, 그렇게까지 사양한다면야…….
나는 카페라테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물었다.
“그래서 남의 가게 앞에 그런 플래카드를 설치한 이유가 뭔가요?”
“그건…….”
서로 살짝 눈을 맞춘 뒤 두 사람이 자기소개를 했다.
남자 쪽은 힐러 전문 길드 <축복의 정원> 소속 힐러. 눈 밑이 거뭇하고 피로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여자 쪽은 포션 제조 연합 소속 <길드중앙약국>의 대표 겸 포션 약제사. 긴 생머리를 늘어뜨렸고 이지적인 분위기였다.
남자 쪽은 어디서 본 듯한 기분이 드는데. 음……. 모르겠다. 생각 안 나는 걸 보니 별일 아니겠지.
“힐러분이랑 약제사분이 무슨 용건이신데요?”
“크윽! 정말 너무하는 것 아니에요?!”
힐러 쪽이 다짜고짜 버럭 화를 냈다.
“네?”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이곳 <카페 리을>의 음료가!”
“음료가?”
도무지 짚이는 곳이 없어 눈만 깜빡이자 힐러가 가슴을 두들기며 외쳤다.
“너무 저렴합니다!”
“……네?”
분통을 터뜨리는 힐러를 진정시킨 다음 약제사가 차분한 설명을 덧붙였다.
내용인즉슨, <카페 리을>의 음료가 힐러 진료비나 포션 가격보다 지나치게 싸서 손님의 발길이 끊겼다는 것이다.
“그 카페라테, 기력 50% 회복 효과로군요. 얼마에 팔고 계시죠?”
“2루비인데요.”
“……!”
“세상에 이런 일이…….”
두 사람이 탄식을 내뱉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나는 두 사람을 위로할 요량으로 말을 꺼냈다.
“그, 그래도 이건 커피인걸요. 무한정 마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힐러나 포션을 찾는 헌터도 많지 않나요?”
“그렇게 간단한 상황이 아닙니다. 이걸 보세요. 헌챈에 이런 것이 돌 정도라고요.”
착잡한 표정의 약제사가 외투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헌터 채널의 글을 그대로 인쇄한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재촉에 못 이겨 그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유머] 포션 vs 카페 리을 비교글 (233)
추천: 227 / 비추: 2
작성자: 루비복사버그
table
논란 종결
ㅋㅍㄹ 압승
분홍젤리할짝: ㅇㅈㅇㅈ
app***: ㅇㅈㅇㅈ
ㅇㅇ: ㅇㅈㅇㅈ
…….
아래로 비슷한 내용의 리플이 이어졌다.
이 글에서는 이렇게 떠들어 대고 있지만.
포션이 커피보다 범용성, 보관성이 훨씬 좋다. 커피는 만들면 시간 내에 마셔야 하는데다가 레시피 종류도 포션보다 적으니까. 직접 던전 공략에 참가하는 힐러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냥 인터넷 밈이라 과장했을 뿐. 다들 진심은 아닌 것 같은데…….
“하아…….”
그렇게 말했지만 약제사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한숨을 푹 쉬더니 찬물을 들이킨다.
나는 그녀를 위로할 마음으로, 표의 마지막 항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저기, 귀여운 동물이라도 키워 보시는 건 어때요?”
나머지 항목은 어떻게 안 되더라도 동물은 키울 수 있지 않을까.
“왜오옹?”
“뀨우?”
히터 앞에 액체 상태로 늘어져 있던 우리 집 동물들이 자기 이야기인 줄 알고 재깍 고개를 들었다.
너희 안 불렀어. 그대로 거기서 놀고 있으렴.
“키우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집 강아지는 포션 냄새를 싫어해서 데리고 다닐 수가 없는 걸요.”
“와, 강아지 키우세요? 사진 있으시면 보여 주세요.”
“여기, 이 강아지예요.”
약제사가 핸드폰을 꺼내 강아지 사진이 있는 인스타를 보여 주었다. 인절미를 닮은 노란 빛깔의 강아지였다.
“우와, 너무 귀여워요. 이 인스타 팔로해도 될까요?”
“정말 똑똑하답니다. 아직 어린데 벌써 ‘손!’도 알아들어요.”
“대단하네요! 강아지 이름은 뭔가요?”
“얘 이름은…….”
“크흠, 크흠! 약제사 님, 크흠!”
피로한 인상의 힐러가 헛기침을 하면서 약제사의 어깨를 두들겼다. 헉, 하고 정신을 차린 약제사가 머쓱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런. 강아지가 귀여워서 옆길로 새 버렸다. 그래도 분위기가 약간이나마 부드러워졌다. 아쉬운 마음을 접어 넣고 본론으로 화제를 되돌렸다.
“일단 사정은 알겠어요. 하지만 그런 이유로 이 카페를 규탄하셔도……. 맞다, 아까는 왜 도망치신 건데요?”
“그건, 저희 요청을 은밀하게 말씀드릴 타이밍을 기다리느라 그랬어요.”
힐러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럼 저한테 하실 그 은밀한 요청이 뭔가요?”
“……! 그거야, 저희 부탁은 한 가지입니다.”
절실한 표정의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음료 가격을 올려 주세요!”
“……네?”
“최소 지금의 두 배, 아니, 다섯 배는 올려 주시면 좋겠어요.”
“그렇게나요?”
놀라 되물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그렇게라뇨.”
약제사가 농담기 없는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그 아이리시 커피라는 메뉴만 해도 그렇습니다. 빙결 무효 포션을 만들기 위해서는 영하의 냉동고에서 한참 스킬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도 쓰고 텁텁한 맛이 나는 건 어쩔 수 없고요.”
“…….”
“그런데 커피 한 잔만으로 빙결 속성 대미지를 방어하다니! 정말, 하아……. 충격이었어요.”
“힐러 쪽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초보 힐러들은 커피가 있으니 괜찮다며 파티 가입을 거절당하는 일도 있어요.”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현재의 커피 가격이 적당하다는 내 생각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 저렴한 원재료 가격을 생각하면 지금 수준이 딱 알맞다. 1루비에서 5루비의 가격대가 너무 싸다는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하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
흐음, 어떻게 한다.
여기서 내가 겸손을 떤답시고,
‘제가 만드는 커피 별거 아닌데요, 뭐.’
라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건 결국 나만이 아니라 사람을 치료하거나 포션을 만드는 노고를 깎아내리는 거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면, 이 사람들은 그 별거 아닌 일을 위해 정성을 쏟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겸손도 지나치면 오만이라고 하잖아.
굉장히 신경 쓰이는 플래카드를 설치한 것 외에 피해 입은 것도 없고.
뭐……. 어쩔 수 없나.
커피 가격에 대한 내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 유사한 일을 하는 헌터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가족 중에도 힐러가 있는걸.
권지운이야 한국 내 힐러 중 탑급이니 무관하다고 해도 말이다.
“알겠어요. 협의해 보죠.”
“……!”
내 말에 두 사람이 반색했다.
[서브 퀘스트: 메뉴판 꾸미기
지속가능한 카페 경영을 위하여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습니다.
메뉴 가격을 알맞게 조정합시다.
메뉴 가격 알맞게 재설정하기: (미완료)
보상: 에테르-위키 업데이트]
띠링.
내 뜻을 밝히자마자 시스템 창에 퀘스트가 생겨났다. 이런 퀘스트를 띄운다는 건, 내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거겠지.
보상은 그동안 존재를 까먹고 있던 에테르-위키밖에 없었지만.
[에테르-위키는 언제나 당신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죄책감을 자극하려는 듯 아련한 문구가 떴다.
어, 그래, 미안.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알림 창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