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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116/192)

116화

그러면 이제 남은 문제는 알맞은 메뉴 가격이 어느 정도인지 결정하는 일인데…….

“엑,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비싸지 않아요?”

“아니요, 이것도 저렴한 편입니다.”

“맞아요. 버프 능력을 생각하면 이 정도 가격은 되어야죠.”

“그래도 10배나 올릴 수는 없어요. 조금만 더 낮출게요.”

“흐음, 그럼 이렇게…….”

나는 힐러, 약제사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 가며 음료 가격표를 작성했다. 여러 요인을 고려하다 보니 꽤 시간이 많이 걸렸다.

“거기서 뭘 하는 거야?”

창고에서 돌아온 아스가 말을 걸었다.

아스의 품에는 자신의 키만 한 하드보드지와 문구 용품, 여러 공작 재료가 들려 있었다.

저렇게 많은 양으로 무얼 만들려는 건지 신경 쓰였다. 건축 미니어처 만들기니까 뭐 괜찮겠지.

“어, 잠깐 할 게 있어서. 아스, 먼저 자.”

“……알았어.”

아스가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힐러, 약제사와 한참을 이야기한 끝에 적당한 새 가격표를 만들었다.

그런데 불쑥 한 가지 의심이 들었다.

“잠깐만요. 혹시 담합, 뭐 이런 걸로 처벌받는 건 아니겠죠?”

“그런 일은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힐러가 자신 있게 선언했다.

“생산직 헌터가 담합으로 처벌받는 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비정상적으로 높은 가격을 강요하는 경우, 표준 가격표보다 20% 이상 비싼 경우 두 가지입니다. 법적 문제는 없고, 지금도 저렴합니다.”

약제사가 자료를 내밀었다.

표준 가격표라니, 그런 것도 있구나. 꽤 법률이 잘되어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메뉴 가격을 확 정짓자 곧장 시스템 알림이 떴다.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메뉴판 꾸미기’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수령해 주세요.]

[에테르-위키에 ‘암흑의 옥좌’ 항목이 추가되었습니다.]

어째 업데이트된 항목이 이름만 봐도 불길한 느낌을 팍팍 풍겼다.

찜찜한 마음으로 읽어 보았는데 어떤 장소에 대한 설명으로 당장 나와 관련은 없어 보였다.

내가 시스템을 너무 의심했나?

[시스템은 언제나 당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니 더 믿음이 안 가지만……. 나는 그대로 에테르-위키를 껐다.

“그럼 늦은 시간에 실례 많았습니다.”

“다음에는 손님으로 방문하지요.”

협의에 만족한 두 사람이 돌아갔다.

스스로 납득하고 내린 결정이긴 하지만, 갑자기 커피 가격을 올렸으니 불만을 품는 사람도 나오려나?

의외로 그렇지는 않았다.

* * *

다음 날 아침.

아침을 먹으며 텔레비전 채널을 돌릴 때였다.

미음이가 보고 싶어 하는 드라마를 틀었는데 갑자기 뉴스 속보가 나왔다.

“캬갸갸옭! 갑자기 뭐냐? 돌아온 헌터의 유혹 다음 화는 어딜 간 거냐!”

불평해도 속보인데 어쩔 수 없다. 곧 커다란 자막과 함께 뉴스 영상이 떴다.

경주 균열 사망자 0명… 안전하게 폐쇄 확인

뉴스 화면 속은 건물이 완전히 무너진 거리를 비추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밝다. 사망자 0명이라는 희소식 덕분이겠지.

리포터가 균열 처리에 참여한 헌터를 인터뷰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왔다.

막 귀환한 듯, 헌터는 경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러나 자신의 상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흥분한 어조로 외쳤다.

- 무원! 무원이 나타났다니까!

- ……!

현장이 술렁거린다.

잠시 뒤 화면이 뉴스 스튜디오로 전환되더니, 아나운서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 지금, 시청자 제보 영상이 들어왔습니다. 경주 균열 발생 현장에 랭킹 1위 무원이 출현했다고 합니다. 저희 헌터TV에서 단독으로 입수했습니다. 독점 보도입니다, 시청자 여러분. 바로 영상 보여 드리겠습니다.

화질은 낮았고, 모래가 낀 것처럼 화면이 지지직거렸다. 균열 안에서 촬영한 것 같았다. 흐리기는 해도 어떤 상황인지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균열이 터지면서 빨려 들어온 건물의 잔해가 즐비했다. 그 너머로 헌터들을 노리고 달려드는 몬스터 무리가 보인다. 전위가 잘 싸웠지만, 워낙 몬스터의 수가 많아 대형이 무너지는 것은 금방일 터였다.

그때,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흐린 화질이었지만 바로 알았다. 저 길게 뻗은 몸에 특유의 걸음걸이.

기유현이다.

- 저건 누구지? 설마……!

앞으로 나서며 그가 손을 뻗었다. 곧 촘촘한 빛의 그물이 주위를 감싸나 싶더니, 섬광과 함께 굉음이 터진다.

전위의 헌터를 할퀴기 직전이었던 발톱이 바스러졌다.

쏟아져 나오던 몬스터들이 하나둘 쓰러지더니 문자 그대로 빛이 되어 사라졌다. 모든 몬스터가 완전히 사망하기까지는 채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압도적인 힘이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 형체만 흐릿하게 보이는 영상이 경이로우면서도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지난번에 본 기유현의 과거 영상으로 인한 잔상에 불과할까.

- 우와아아악!

영상 촬영자의 환호성과 함께 화면이 크게 흔들렸다.

- 이제 우린 살았어!

- 감사합니다!

그제야 카메라를 발견했는지, 그가 카메라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건물의 잔해가 드리운 그림자가 걷히고 그의 얼굴에 빛이 비치기 직전, 바람에 긴 코트 자락이 펄럭인다.

다음 순간, 그는 자취를 감추고 그대로 영상이 끝난다. 뉴스는 다시 현장 인터뷰로 이어졌다.

- 무원 님이 없었다면 이렇게 피해 없이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크흑……!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림다!

며칠 연락 안 된다더니, 경주에서 균열이 터질 걸 미리 알아서였나 보다. 단신으로 균열을 막아서 미래를 바꾼 건가.

그는 그의 방식대로 먼치킨 회귀자로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구나.

나도 할 일을 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텔레비전을 끄려 했는데 현장 인터뷰가 계속 이어졌다.

- 아! 그리고 <카페 리을>에도 감사드림다!

엥? 갑자기요?

- 제일 먼저 투입된 힐러가 상태 이상에 걸려 하마터면 다 죽을 뻔했슴다. 그런 위기 상황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셨슴다. 그분의 커피가 아니었다면 힐러가 회복할 때까지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아. 그 말을 들으니 기억이 났다.

어제, 어디로든 연결☆신비의 문을 통해 급해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얼핏 보기에도 보통 상황이 아니기에, 잠시 영업을 정지하고 되는 데까지 커피를 만들어서 건넸었지.

- 그러시군요. 헌터 님, 정말 노고 많으셨고,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듣겠습니다.

- 커피 가격이 싸서 걱정됩니다. 그런 좋은 곳은 꼭 가격을 올렸으면 좋겠슴다!

네?

에엥, 그렇게까지?

살다 보니 소비자가 가격이 싸다고 걱정하는 모습을 다 보게 되는구나.

생방송 뉴스 속보에서 그렇게 말했기 때문인지, 가격 인상은 저항은커녕 오히려 열렬하게 환영받았다.

뭐, 가격 인상 건은 그렇다 치더라도.

‘커피로 세상을 이롭게 할 마음을 먹었습니다.’

다소 거창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내가 만드는 커피가 이런 식으로 세상에 도움이 되는 걸까. 그렇다면 기쁘긴 하다.

균열에서 사망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정말로.

* * *

그리고 하나 더 일이 있었다.

가격이 변경된 메뉴판이 무리 없이 정착된 며칠 뒤, 힐러와 약제사는 그날 말했던 대로 손님으로 방문했다.

두 사람 다 주저 없이 카페라테를 시킨 것으로 보아, 역시 그날 마시고 싶었던 모양인데…….

“크흠, 크흠. 사장님.”

“아, 네.”

두 사람이 만족도 막대를 끝까지 채우며 카페라테를 다 마신 다음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아까부터 내 눈치를 보던 힐러가 말을 걸었다.

“이것 좀 보세요.”

힐러는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핸드폰 화면 속에는 새하얀 토끼가 배추 잎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꽤 귀엽다.

“우리 집 토끼예요. 밥도 잘 먹고 건강하고, 정말 귀엽답니다.”

아하. 그때 이분도 사실 반려 동물 자랑하고 싶으셨구나…….

“왜오옹(내 사진도 올리거라)!”

“뀨우, 뀨!”

최근 SNS 스타를 꿈꾸는 우리 집 동물들이 발치에서 참견했다. 나는 동물들을 진정시키고 당장 힐러의 인스타도 팔로했다. 이렇게 귀여운 동물 사진이 올라오는 인스타 팔로잉이 늘었다.

그리고 힐러와 약제사를 배웅하다가 나는 불현듯 기억을 떠올렸다.

“아!”

“왜 그래?”

옆에서 아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 사람이었어!”

“뭐가?”

저 힐러를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해 냈다.

회귀 전, 최세드릭에게 갑질 의혹을 제기했던 힐러다!

<축복의 정원>이 <씨앤엘 코퍼레이션>을 보이콧하다가, 이후 합병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랑 관계없는 일이다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이제 확실히 알겠다.

‘최세드릭 걔는 괜찮은 건가.’

물론 실제로 최세드릭이 갑질이나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면 내가 끼어들 일은 아니다. 사과하고 수습하는 게 제일이겠지만, 어쨌거나 그가 스스로 책임질 일이다.

‘개인적으로야 최세드릭이 사과했으면 싶지만…….’

크투가가 살던 던전에서 만났을 때 우울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으음. 무슨 일이었을까. 잘 지내고 있으려나?

* * *

최세드릭은 그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씨앤엘 코퍼레이션>의 여러 불법 행위 의혹은 대표의 비서, 이온의 독단으로 정리되었다.

이세인은 비서의 행동을 제대로 관리 감독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과문을 발표했다. 비서의 체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비서 이온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양 감쪽같이 사라졌다.

결국 <씨앤엘 코퍼레이션> 측에서 상당한 보상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그간의 사건은 종결되었다.

빅3 중에서도 최대 규모인 <씨앤엘>을 무턱대고 압박할 수 없다는 본청의 계산도 있었으리라.

던전 공략의 공백, 각 길드 간의 알력 관계, 그 밖의 여러 변수를 고려한 결정이겠지.

어쨌거나 <씨앤엘>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멈추고, 최세드릭은 성큼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늘 조용하던 최상층이 오늘따라 번잡스러웠다. 건축 자재를 든 사람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이건 다 뭐예요?”

“아, 세드릭.”

이세인이 그를 발견하고 생긋 웃었다.

“대표실을 리모델링하려고. 이온이 저지른 일 때문에 한동안 어수선했잖아. 심기일전하는 의미에서 분위기라도 바꿔 볼까 하고.”

“……그래요.”

눈앞의 사람은 분명 그가 아는 이세인이 맞다.

<씨앤엘>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돌아왔을 텐데…….

그런데 왜 이렇게 위화감이 느껴질까.

“그러면 빙의 이런 거 아냐?”

불쑥 권리을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

……일어날 리가,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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