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192)

117화

“요즘 집에 잘 안 들어간다며?”

이세인이 최세드릭에게 말을 걸었다. 그를 걱정하는 듯 부드러운 시선이 함께였다.

“네, 뭐. 그냥요.”

최세드릭은 방금 떠오른 무서운 상상을 애써 떨쳐내며 대답했다.

“지금 사는 곳이 마음에 안 들어? 다른 데로 구해 줄까?”

“아니에요. 집 좋은데 뭐 하러요.”

최세드릭은 <씨앤엘 코퍼레이션>이 소유한 한강변의 고급 아파트에 혼자 살았다. 거실 창문으로 보이는 탁 트인 뷰와 호화로운 인테리어, 셀러브리티에게 최적화된 철저한 보안으로 유명하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집이지만 최세드릭이 최근 집에 잘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세인의 눈길이 닿는 곳이기 때문이다.

<씨앤엘 코퍼레이션>의 소유이고 자신의 주거지이니 이세인이 관리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녀의 개입이 꺼림칙하게 느껴져 견딜 수 없었다.

언제부터였더라……. 그 비서가 사라지고 난 이후부터다.

꺼림칙한 기분은 점점 커져, 집보다 영겁의 불꽃이 타오르는 던전에 있을 때가 더 마음 편할 정도였다.

그러니 어디로 옮기건 상황은 마찬가지다.

“그래? 그럼 리모델링이나 할까? 대표실도 공사하는 김에 싹 바꾸면 기분 전환이 될 텐데.”

“다음에 해요. 지금도 뭐 번쩍번쩍하구만.”

“……그래.”

생긋, 미소를 지은 뒤 이세인이 직원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조금 전 느낀 꺼림칙함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증명하듯 그 모습은 최세드릭이 아는 이세인의 모습이 맞았다.

기꺼이 최세드릭, 최로나 남매의 가족이 되어 주었던, 야망 넘치면서도 사리에 밝은 사람 말이다.

“하나뿐인 가족이니까, 후회 안 하게 할 수 있는 건 해 보라고.”

다시금 권리을의 말이 떠올랐다. 한때 최세드릭이 그녀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잘난 척 떠들어 놓고는 그 말을 잊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기댈 수는 없다. 자신의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내야 한다.

“……세드릭?”

“그냥 지나가다 잠깐 들른 거예요. 대표님 바쁘신데, 이만 갈게요.”

“그래. 로나 얼굴 보고 갈 거지?”

“네.”

말과는 달리 대표실을 나온 최세드릭이 향한 곳은 최로나의 병실이 아니었다.

최상층에서 한 층 아래, 모퉁이를 돌아 가장 안쪽 방.

증발 전 비서 이온이 쓰던 사무실이었다.

이미 증거가 될 법한 물건은 모두 회수한 다음이지만, 어쩌면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란 기대에서였다.

이온의 사무실에서는 직원 두 명이 파티션을 뜯어내고 있었다.

“그건 뭐야?”

“어! 아, 최세드릭 헌터님.”

직원이 파티션을 바닥에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얼굴에 아주 잠깐 부담스러워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최세드릭은 개의치 않고 다시 뭘 하는지 물었다.

“이세인 대표님이 이 사무실은 철거한다고 하셔서 정리 중이었습니다.”

“그래? 나한테 하신 말씀하곤 다르네.”

“네?”

직원들이 화들짝 놀랐다.

“미처 발견 못 한 증거가 나올 수도 있으니 그대로 보존하라고 하시던데.”

“…….”

공중에서 곤혹스러운 시선이 마주 오갔다. 이세인은 상벌에 엄격한 상사다. 지시에 혼선이 일어나 멋대로 사무실에 손을 댄 게 알려지면 큰 질책을 받을 테다.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은 최세드릭은 고개를 까딱이며 문 밖을 가리켰다.

“놓고 나가.”

“네, 넵!”

“맞다. 잠깐만. 거기.”

이제 큰일 났다. 누가 잘못 말한 거야? 그런 불평을 중얼거리며 후다닥 나가려는 직원들을 최세드릭이 다시 불렀다.

“지금은 대표님한테 보고 안 드리는 게 나을 거야. 오늘 공사 때문에 예민하시거든.”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비친다. 원칙대로라면 지시의 혼선에 대해 바로 보고하고 내용을 재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예민한 상태의 이세인에게 보고하러 가기는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씩. 산뜻한 미소와 함께 최세드릭이 그들의 고민을 덜어 주었다.

“나중에 내가 좋게 말씀드릴게.”

“……! 그, 그래 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감사합니다.”

“가 봐.”

완전히 직원들이 떠나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에야 최세드릭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아걸고 주위를 살핀다.

그러나 증거가 될 법한 물건은 모두 회수된 다음이라 사무실은 텅 빈 모습이었다.

“……?”

주위를 둘러보던 중 툭, 발에 뭔가 걸렸다. 아래를 보니 자그마한 별 모양 장식품이었다. 열쇠고리일까.

최세드릭은 장식품이 굴러온 쪽을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 아무것도 없는 벽이다. 아니, 잘 보니 벽에 미세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

두드려 보니 안쪽에서 통, 하는 소리가 났다. 안쪽이 빈 것이 분명했다.

최세드릭은 자신의 검을 꺼내 벽의 틈에 박아 넣었다. 힘을 주어 돌리자 어렵지 않게 겉의 패널을 떼어 낼 수 있었다.

벽 너머에는 어린아이 한 명이 들어가면 꽉 찰 듯한 자그마한 공간이 전부였다. 이온이 증발하기 직전 손을 썼는지 눈에 띄는 물건은 없다.

남은 것은 단 한 장의 사진.

오래전에 찍은 것 같았다. <씨앤엘>을 세우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일까. 이세인이 어색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었다. 옆에는 비서, 이온이…….

“윽……!”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최세드릭은 몸을 비틀거리다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그 바람에 손에서 놓친 사진이 바닥에 떨어졌다.

두통은 금방 가라앉았다. 최세드릭은 이마의 식은땀을 손으로 한번 훔치고 사진을 주워들었다.

오래전에 찍은 것 같았다. <씨앤엘>을 세우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일까. 이세인이 어색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었다. 이세인의 독사진이다.

뭔가 잊어버린 느낌인데. 뭘까. 생각나지 않는다.

사진의 뒷면에는 작게 메모가 적혀 있었다. 그 내용은…….

“마도서……?”

* * *

카페 영업은 매일 성황이었고, 본의 아니게 나는 제법 유명해졌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놀랍게도, 어제는 나를 모델로 어린이 대상 위인전을 만들고 싶다는 연락까지 받았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거절할게요.”

- 권리을 헌터님, 다시 한번 고려해 주세요.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헌터님을 본받을 수 있도록……!

“……그런 무서운 말씀 하지 마세요.”

애들이 나를 왜 본받아. 참신한 아이템을 찾는 건 알겠지만, 너무 무리수 아닌가?

그리고 겨우 다가온 다음 정기 휴일은 마침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모처럼이니 나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기로 마음먹었다.

파티라고 해도 그냥 아는 사람들을 초대해서 간식을 먹는 게 전부인 계획이었다. 본의 아닌 셀러브리티 생활에 심신이 지쳤으니 가끔 이런 시간을 보내야지.

초대한 사람 대부분이 참석하겠다고 답을 했다. 그러나 큰아버지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예 카톡을 읽지도 않으셨다.

산타 분장을 하고 선물을 나눠줄 정도였으니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권지운에게도 물어봤지만, 그는 아예 큰아버지를 만나지도 못했다고 대답했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서 일단 행방을 수색한다고 했다.

유튜브에 더 이상 업데이트가 없는 걸로 보아 다시 산에 가신 것도 아닌 듯한데.

나는 늦게라도 꼭 참석해 달라는 카톡을 남긴 뒤 파티 준비를 시작했다.

[차원의 상점 ☆★☆★크리스마스 특별 세일 ★☆★☆

§우수고객§ 전용 ☞특/별/서/비/스☜

그동안 애용해 주신 적격자님께만 특별히 판매하는 상품입니다.

크리스마스 파티 세트 (크리스마스 장식 세트, 크리스마스 레시피 포함)

: ☆★특별 할인가★☆ 50루비

※ 주의: 지금 이 창을 끄시면 다시는 구입할 수 없습니다.]

에고고, 눈 아파라…….

차원의 상점이 눈치껏 이런 아이템을 띄웠다.

그동안 잔뜩 번 루비를 내게서 회수하려는 의도가 빤히 느껴졌지만, 큰맘 먹고 구입했다. 열심히 벌어서 뭐 하겠어. 이럴 때 기분도 내야지.

“냐아아, 냐아(징글벨, 징글벨)!”

“뀨, 뀨우, 뀨!”

“……벨.”

우리 집 식구들도 즐거워하니까 됐지, 뭐.

[새로운 레시피 크리스마스 핫초코를 획득했습니다.]

[새로운 레시피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획득했습니다.]

[구매하신 크리스마스 장식 세트를 인벤토리에 수령했습니다.]

먼저 핫초코를 만들기로 했다.

머그컵에 지옥의 초코 소스와 파우더를 담뿍 담았다. 데운 우유를 부어 잘 녹인 다음, 부드러운 우유거품을 올렸다.

마시멜로와 잘게 썬 초콜릿으로 장식하니 제법 비주얼이 그럴듯했다.

[아이템: 크리스마스 핫초코(★★★★☆)

상태: 좋음 (남은 시간: 01:00:00)

효과: 크리스마스 기분이 됩니다.]

엉……?

정말, 크리스마스 시즌이 지나고 나면 의미 없는 효과가 붙어 있었다.

다음은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다 같이 만들었다. 스펀지케이크에 생크림을 바르고 딸기를 잔뜩 올려 맛있어 보였다.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콤보 보너스가 발생합니다.

콤보: 크리스마스 파티 세트(크리스마스 핫초코, 크리스마스 케이크)

효과: 엄청나게 크리스마스 기분이 됩니다.]

케이크는 냉장고에 잘 보관해 놓고, 손님이 도착하기 전 시식 차원에서 핫초코를 다 같이 맛보았다.

“……?”

그러나 특별한 효과는 체감할 수 없었다. 고소한 우유와 진하고 달콤한 초콜릿 맛이 어우러진 핫초코가 무척 맛있기는 하지만 그냥 그게 다인데.

“냐아, 냐아아, 냐(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뀨, 뀨우, 뀨!”

“……라.”

아하.

핫초코를 마시기 전부터 이미 크리스마스 기분을 만끽하는 중이라 효과가 느껴지지 않는 거였다.

다음으로 카페를 크리스마스 풍으로 장식하면 준비는 끝이었다.

아까 차원의 상점에서 산 장식 세트 중 꼬마전구를 꺼냈다. 가게 담벼락에 두르면 예쁠 것 같았다.

그런데 아스가 할 말이 있는 듯 내 쪽을 쳐다보았다.

“저기, 있잖아.”

요즘은 좀처럼 누나라고 불러 주지 않는구나. 그때 귀여웠는데.

“아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나도 그거, 있는데. 카페 장식할 거.”

“그래? 아, 설마 미니어처 만든 거?”

“……응.”

수줍음을 감추기 위해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뿌듯해하는 티가 났다.

“그럼 아스가 만든 것도 같이 장식하자. 얼른 가져와.”

“……! 알았어.”

후다닥 아스가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돌아온 아스의 손에는…… 마왕성이 들려 있었다.

“……?”

잠이 덜 깼나. 이상한 소리를 해 버렸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 집 아르바이트생이 뿌듯한 표정으로 마왕성 미니어처를 올려놓았다.

“아스……. 이게 뭐야?”

“원시의 혼돈이 기거하는 궁전, 암흑의 옥좌야.”

고딕풍의 첨탑과 성벽에 머리 셋 달린 개의 미니어처까지 딸려 있었다.

윽, 지나칠 정도로 실감 나는 엄청난 완성도의 마왕성이다.

머리 셋 달린 개 미니어처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시선을 피하다가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잠깐,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암흑의 옥좌?

‘에테르-위키.’

[자격을 확인 중입니다. ……완료.]

[적격자: 권리을 확인되었……]

‘건너뛰기.’

주르륵 나열되는 문자열을 스킵하고, 가장 최근에 얻은 항목을 열었다.

《암흑의 옥좌》

종류: 장소>건축

설명: 원시의 혼돈이 기거하는 궁전.

사진: [더 보기]

…….

에테르-위키에 첨부된 사진과 아스가 만든 미니어처를 번갈아 보았다.

완벽하게 똑같다. 어떻게 저렇게 똑같은 거지. 이 아이의 재능이 두려웠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