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192)

120화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아.”

음료를 받아 들고도 힝행홍 씨는 어두운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시름이 깊어 보인다.

“안색이 안 좋으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 그냥, 던전 공략 때문에 좀…….”

목이 타는지 힝행홍 씨가 손에 든 레몬에이드를 벌컥 들이켰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괜찮으시면 이야기해 보세요.”

하소연을 하면 마음이 편해질 수도 있으니까.

“으음. 아니에요. 이야기하기는 그런 일이라서요. 하아…….”

그럼 별수 없지. 억지로 캐낼 생각은 없었던 만큼 대화를 마무리하려 했다. 그때 옆에서 불쑥 기유현이 끼어들었다.

“……<슈퍼 버프 커피> 때문인가요?”

“헉?! 언제부터 여기 사람이?!”

그제야 기유현의 존재를 알아차린 힝행홍 씨가 화들짝 놀랐다. 안경의 효과는 충분히 알겠으니까, 모처럼 온 단골손님을 놀래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굉장히 소심한 성격의 손님이란 말이다.

그나저나 갑자기 <슈퍼 버프 커피> 이야기를 왜…….

“어, 어떻게 아셨어요?!”

……진짜였구나.

“사실은…….”

<슈퍼 버프 커피>에 관련된 일이라 힝행홍 씨는 나를 배려해서 말하려 하지 않은 것이었다. 괜찮다고 말하자 곧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랬다.

힝행홍 씨는 최근에 친구와 크게 싸웠다. 원인은 바로 우리 카페와 <슈퍼 버프 커피>. 그는 <카페 리을>이 원조라고 했고, 친구는 <슈퍼 버프 커피>가 더 좋다고 말했다가 갈등이 커졌다는 것이다.

친구와 싸우기까지 했다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러다 화해 겸 싸움에 결말을 지을 생각으로 친구와 내기를 하나 했다.

그는 C급 탱커, 친구는 C급 딜러.

각각 <카페 리을>과 <슈퍼 버프 커피>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한 다음, 던전에서 마시고 어느 쪽의 효과가 뛰어난지 비교하는 내기였다.

“내기에는 뭘 걸었는데요?”

“그거야 당연히, 캐삭빵이죠!”

“……네?”

“캐삭빵은 캐릭터 삭제 빵의 준말로, 지는 사람이 캐릭터를 삭제하는…….”

“아뇨, 단어 뜻은 알아요. 아는데…….”

게임에서야 캐릭터 삭제를 걸고 내기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돈과 시간과 노동이 담겼기는 하지만 삭제되는 건 어디까지나 가상의 게임 캐릭터.

하지만 헌터끼리 캐삭빵이라니, 갑자기 무서운 뜻이 되어 버린다.

“저희 카페 커피를 좋아해 주셔서 무척 감사하지만, 손님이 범죄를 저지르는 건 말리고 싶은데요.”

“버, 버, 범죄라뇨?! 무섭잖아요. 무서운 이야기 하지 마세요!”

힝행홍 씨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당연히 아니죠! 지면 헌터 채널 아이디를 탈퇴하기로 했어요.”

“아하.”

탈퇴 후에도 재가입은 가능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뿐만 아니라 기존 닉네임은 사용할 수 없다.

속으로 이름 대신 힝행홍 씨라고 부르고 있는데, 지면 힝행홍 씨가 아니게 된다.

큰일이라면 큰일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내기 약속을 한 당일인 오늘, 친구는 잠적했다. 카톡은 안읽씹, 길드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어요! 질 것 같으니까 쫄려서 튄 거지!”

힝행홍 씨가 분통을 터뜨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다른 파티를 구해서 던전에 갈 생각도 했다. 그런데 헌터 채널에 차단당한 상태라 급히 새 파티를 구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별수 없이 포기하고 음료나 마시러 온 참이라고 했다.

“그런데 요즘 이런 일이 많나 보더라고요.”

“헐, 그래요?”

“네, 던전에 가려고 파티를 짠 다음 갑자기 잠수를 탄다던데요. 그래서 파티장들이 고민이 많대요.”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핸드폰으로 헌터 채널에 접속한 다음 ‘잠수’, ‘파티’ 등의 키워드로 검색을 해 보았다.

[잡담] 오늘 공개 파티 참가하기로 한 a님 쪽지 확인 좀요 (0)

[잡담] 메인 딜러가 안온다; 이게 머선129 (5)

[잡담] 요즘 파티 펑튀 너무 많지 아늠? (13)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간간히 파티원과 연락이 안 된다며 성토하는 글이 있었다.

무슨 일이지?

“어쨌건 나는 <카페 리을> 편이니까 힘내세요!”

한차례 하소연을 한 덕분인지 개운해진 낯빛으로, 힝행홍 씨는 이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 * *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확실히 밝히자면, 그 <슈퍼 버프 커피>에 딱히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 건 아니다.

진짜, 절대, 정말로 아니다.

그 카페는 그 카페대로, 우리 카페는 우리 카페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영업을 하면 되는 거지. 세상에 버프 커피를 파는 카페가 꼭 하나만 있어야 한다는 법도 없으니까.

“그렇게 열심히 말하니까 오히려 믿음이 안 가는구나, 왜옹!”

“뀨우우!”

“……조용히 해.”

나는 옆에서 태클을 거는 동물들을 노려봐 주었다.

정말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아닌데, 아닌 거 맞는데!

한편으로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대체 ‘내 손 안의 카페’와 같은 스킬이 아니라면 어떻게 버프 커피를 만드는 걸까? 나는 하루 종일 만들 수 있는 커피 수에 한계가 있는데, 그 카페는 어떻게 여러 지점을 동시에 운영할 수 있는 거지?

단골이 다녀간 다음 날. 고민 끝에 나는 그 카페를 직접 가 보기로 했다.

‘어차피 손님도 거의 안 오고…….’

잠깐 다녀오면 되겠지. 염탐이 아니라 평범한 손님으로서 가는 거다, 암.

그동안 나름 얼굴이 알려진 만큼, 만약에 대비해서 아스는 두고 혼자 다녀 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1층으로 내려가자 아스는 이미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다음이었다.

꼼꼼히 단추를 채워 입은 겨울 코트가 무척 귀엽다. 누가 봐도 같이 가고 싶어 하는 모습이다.

“아스?”

“……아무것도 아니야.”

말과 행동이 다르다. 같이 가고 싶은 거면 그렇게 말하면 될 텐데……. 아스의 열렬한 시선을 끝까지 모른 체할 수 없었던 나는 결국 물었다.

“아스, 너도 같이 갈래?”

“……좋아.”

뭐, 그냥 카페에 가는 것뿐이니까 함께 가도 문제는 없겠지.

그렇게 나는 아스와 함께 가게를 나섰다.

붙임성 없고 귀여운 녀석 같으니.

* * *

여러 헌터 길드의 본사가 있어 번쩍번쩍한 길드중앙동. 최근 비싸고 세련된 맛집이 여럿 생기면서 길리단길이라고도 불리는 그곳에 <슈퍼 버프 커피>가 있었다.

지하철역을 나와 조금 걷자 넓은 주차장과 루프 탑까지 갖춘 커다란 건물이 우리를 맞이했다. 겉에서 얼핏 보기에도 영업은 성황이다.

“좋아. 가자, 아스.”

“후훗……. 심연이 느껴지는군.”

마음을 다잡고 아스와 함께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놀랐다.

인테리어는 세련되었고, 널찍한 내부는 쾌적했다. 손님은 많았지만 직원이 많고 처리 속도가 빨라, 오래 기다리지 않고 우리 차례가 왔다.

“어서 오세요. 헌터님께 다양한 버프를 드리는 <슈퍼 버프 커피>입니다.”

나는 메뉴판을 눈으로 살폈다. 커피부터 차, 주스 등 메뉴 구성이 다양했고, 쇼케이스 안에는 먹음직스러운 디저트가 가득했다.

가장 싼 아메리카노가 10루비로, 가격은 우리 가게보다 전반적으로 비싸다.

제일 핵심인 버프 효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가게보다 살짝 더 좋았다. 예를 들어, 내가 만드는 카페라테(4성)은 ‘기력 50% 회복’ 효과인데, 이 카페는 ‘기력 55% 회복’인 식이었다.

“고객님, 주문은 결정하셨나요? 고민이 되신다면, 오늘의 추천 메뉴 버터크림라테는 어떠세요? 오픈 기념으로 마카롱을 함께 드립니다.”

“네? 아, 그럼 그걸로…….”

직원은 몇 가지 메뉴를 더 추천했다. 상냥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정신을 차리니, 이미 버터크림라테와 크림모카, 디저트 세트를 주문한 다음이었다.

철저하다.

비싸지만 그만큼 쾌적한 서비스, 물샐 틈 없는 접객까지.

‘으음…….’

나 혼자서 운영하는 <카페 리을>이 이런 카페와 경쟁하는 게 가능할까? 시스템의 도움을 고려해도 솔직히 상대가 안 되는 것 같…….

헉, 하마터면 패배 의식에 젖을 뻔했다. 오늘은 이곳 버프 커피가 궁금해서 온 거니까 얼른 커피나 마시고 가자.

진동 벨을 받아 들고 아스와 함께 자리를 잡으려는 그때, 뒤쪽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잔뜩 몰려서 걸음을 옮기기 힘들 정도였다.

무슨 일이지?

눈부신 조명이 주위를 밝혔고 카메라 셔터 소리가 났다. 무슨 촬영을 하는 것 같았다. 슬쩍 고개를 기웃거리자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저희 카페 광고 협의차 오서호 헌터님께서 방문해 주셨답니다. 카페 블로그에 방문기를 업데이트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아하. 헌터 랭킹 18위(최이찬의 등장으로 한 단계 내려갔다)의 헌터 겸 배우 오서호인가. 홍보의 스케일이 엄청나네.

인파의 틈새로 훤칠한 오서호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유명인이지만 관심은 없었다.

“아스, 저쪽에 자리 있다. 저기로 가자.”

“응.”

그렇게 사람들을 피해 이동하려는 찰나였다.

“……?”

방금 오서호하고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에이, 기분 탓이겠지.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눈이 마주칠 리가 있나. 워낙 유명인이라 착각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오서호 쪽을 보는데, 이번에는 그가 똑바로 나를 쳐다보며 보란 듯이 싱긋 웃는다.

왜 저러지?

짐작 가는 점은 없었다. 일대일로 직접 만나 적도 없는 사람이다.

어쨌거나 찜찜한 일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때마침 진동 벨이 울렸다. 나는 메뉴를 받아 들고 이번에야말로 인파가 덜한 구석 자리에 앉았다.

제법 먹음직스러운 비주얼의 커피와 디저트가 앞에 놓였다.

[버터크림라테 / 일시적으로 최대 기력 100% 증가]

커피 잔을 손에 들자 상태 창이 떴다. 내가 만드는 커피에 비해 단순했지만 효과는 확실히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 커피 어떻게 만든 거지?

실은 아까 주문한 메뉴를 받아 오면서 주방 쪽을 살폈다. 그런데 칸막이 탓에 제조 과정 전부를 볼 수는 없는 구조였다. 보이는 부분에 한해서라면 평범한 커피 제조 과정이었다. 스킬을 쓰거나 특별한 행동을 하는 기색은 없었다.

스킬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 커피에 버프 효과를 부여한 걸까.

“으음…….”

나는 눈앞의 버터크림라테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저 노려보기만 한다고 제조 과정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일단 한번 마셔 볼까. 최대 기력 100% 증가라니, 나처럼 F급 물 몸에게는 꽤 도움 되는 효과지만 어쩐지 내키지 않는다.

“으으음…….”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거야?”

망설이는 내가 갑갑했는지 휙, 아스가 내 손에서 잔을 뺏어갔다.

“어, 아스!”

아스는 주저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주르륵.

그대로 뱉어 냈다.

입에 넣은 걸 그대로 잔에 뱉으면 어떡하냐는 잔소리를 할 틈은 없었다. 아스가 불쾌한 듯 얼굴을 와락 구겼기 때문이다. 이 소년이 이렇게까지 험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다.

“왜 그래? 입에 안 맞아?”

티슈로 입에 남은 커피까지 전부 닦아 낸 뒤, 아스가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이거…… 마시지 않는 게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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