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이후로는 가벼운 잡담을 잠시 나누었다.
기유현은 쌍둥이가 최근 누가 더 키가 빨리 자라나 경쟁을 한다고 말했다. 매일 키를 재는데, 길드 본관 1층에 키 재기 스티커가 붙어있다나.
“아하…….”
어쩐지 요즘 아스도 매일 키를 재더라니, 쌍둥이의 영향이었나?
벽에 머리를 대어 보고 실망한 표정을 짓는 것이 최근 아스의 아침 일과였다. 내가 쳐다보면 키를 잰 게 아닌 척하지만 다 티가 났다.
아스한테도 키 재기 스티커를 사 줄까?
이렇게 말하자 뜻밖에 기유현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렇게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군요.”
“네? 왜요?”
“섬세한 나이에는 비밀로 하고 싶은 것도 있는 법입니다.”
“그런가요…….”
기유현과 사소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각하지 못했는데, 아까 <슈퍼 버프 커피>에서 본 광경 때문에 내심 놀란 상태였던 모양이다.
“기운을 차리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갑자기 잡담을 꺼낸 것도 그래서였겠지. 그의 배려가 고맙게 느껴졌다.
그와 이야기하는 건 즐거웠지만, 더 오래 있다가는 아스가 기다리겠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나는 계속 할까 말까 망설이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 <별의 지혜 교단>이라는 곳 말이에요. 그 교단이 마신을 부활시키려 한다고 했었죠.”
“네, 그렇습니다.”
“그 교단이, 유현 씨한테 무슨 나쁜…… 좋지 않은 짓을 했나요?”
“…….”
그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나는 비스듬히 바닥을 향했던 시선을 위로 들어 그를 보았다.
기유현이 나와 눈을 맞추며 살짝 미소 지었다.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지만 눈동자는 빛을 남김없이 삼킨 듯 검었다.
아.
무엇보다 분명한 답이 거기 있었다.
늘 웃음으로 겨우 가리고 있던, 이 남자의 근원 모를 어둠.
나는 어쩌면 아니라는 답을 듣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환상 속, 고통에 몸부림치던 소년의 모습을 떠올렸다.
인간의 이지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압도적인 고통이 영혼을 잡아 찢는, 불가해한 광경.
각성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흉포한 순간.
그건 거짓 과거고, 당신은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기유현은 물음에 부정하지 않고 그저 웃음으로 나를 배웅했다. 문이 천천히 닫혔다.
문이 닫히기 직전 기유현의 표정이 뇌리에 깊게 남았다.
입가의 웃음이 거품처럼 일었다 꺼져 든 뒤의 싸늘한 낯빛.
베일에 싸인 랭킹 1위 헌터 무원이자 <청라 길드>의 길드장.
나와 같은 회귀자.
친절하고 다정하지만 얼빠진 데도 있는 성격.
그리고…… 이런 말로는 채 다 메울 수 없는 공백.
나는 처음으로 이 남자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기유현이 신경 쓰이는 것과 별개로.
어쨌거나 그의 말대로 당분간 짭카페 일은 잊기로 했다.
그러나 세상사 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다음 날, 카페 문을 열자마자 손님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손님에게 인사를 하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후훗, 이 한적한 분위기. 멋진 카페군요.”
손님의 정체가 바로 오서호였기 때문이다.
랭킹 18위의 환영술사, 배우 겸 헌터, 그리고 <슈퍼 버프 커피>에서 눈이 마주친 그 남자.
……<슈퍼 버프 커피>의 홍보 모델이 여긴 무슨 일이지?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슈퍼 버프 커피>가 커피에 수상한 짓을 한다는 걸 아는 이상, 그 홍보 모델에게 좋은 감정을 품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한테는 판매 안 한다고 쫓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왜옹, 왜오옹(‘돌아온 헌터의 유혹’에 나오는 오서호가 아니냐)!”
미음이가 엄청나게 반가워했기 때문이다. 요즘 미음이가 푹 빠져 있는 드라마에서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한다고 한다.
미음이는 수줍은지 오서호에게 다가가지는 못하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고개만 삐죽 내밀었다. 그를 이대로 쫓아냈다가는 미음이의 원망이 어마어마할 것 같다.
그래, 라이벌, 아니 적의 홍보 모델이지만 까짓것 주문은 받아 주자. 오서호의 귀책은 아니니까.
“주문은 결정하셨나요?”
“음, 사장님의 추천 메뉴는 뭐죠? 그걸로 주세요.”
비스듬히 서서 카운터에 팔꿈치를 댄 오서호가 상큼한 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잘 세팅된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린다.
부담스럽다. 가장 빨리 만들 수 있는 콜드 브루 커피나 줘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때였다.
“냐아아아(사인 받고 싶다. 사인해 달라고 하거라)!”
‘미음아, 네가 직접 받아.’
“왜우웅(고양이가 말하면 놀랄 거 아니냐)…….”
아, 그건 그렇지.
하다못해 적에게 비싼 메뉴라도 팔아야겠다 싶어서 나는 아이리시 커피를 결제했다. 오서호에게 커피를 건넨 다음, 마지못해 종이와 펜을 꺼냈다.
“저……. 오서호 헌터시죠? 사인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내 팬이에요?”
“그건 아닌데……. 친구가 팬이라서, 아하하…….”
“친구분 성함이?”
“권미음이라고 하는데요. ‘미음’이요. 아, 그냥 네모 하나 그려 주세요. 네모.”
“왜옭!”
오서호가 종이에 ‘Dear. ㅁ’라고 쓰고 사인을 하자 뒤에서 미음이가 신나서 풀쩍풀쩍 뛰었다. 그러면서도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는다. 너 의외로 수줍음이 많은 고양이구나.
그리고 사인지를 돌려주면서 오서호가 한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기유현 헌터, 아는 사이죠?”
“…….”
이 사람, 기유현 정체 아는 거 같은데.
표정을 봐라. ‘나 의미심장하오.’ 하고 써 붙여 놓은 듯한 미소였다. 절대 그냥 일반 말단 헌터 1인에 대해 묻는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유현 씨, 사실 당신 정체 공공재인 거 아니에요?’
베일에 싸인 랭킹 1위가 아니라, 알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아는 거 아닐까?
정체가 비밀이라면서 그 빛의 그물 스킬을 팍팍 쓰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본인부터 감출 생각 없는 거 아닌가?
이러다가는 훗날 기유현이 정체를 밝혔을 때 아무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어, 나는 알고 있었는데!’
‘실은 나도.’
‘엥? 그거 비밀이었어?’
다들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사장님?”
툭. 오서호가 가볍게 카운터를 두드려 딴생각에 빠진 내 주의를 끌었다.
그 표정을 보자 너무나도 귀찮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모른 척하기로 결심했다.
“모르는데요.”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죠.”
“네?”
“잘 생각해 봐요. 그 사람이 내 이야기한 적 있었을 텐데.”
“하아…….”
잠시 기억을 더듬어 봤는데 그런 적은 없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오서호는 집요했다.
“친한 친구가 있다고 한 적 없었어요?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은 상대랄까, 그런 거 말이에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베스트 프렌드거든요.”
오서호는 유명인치고는 붙임성이 좋았고 행동거지가 친근했다.
그런데 좀, 뭐랄까.
그가 카운터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한쪽 눈을 윙크했다. 한때 상당한 화제가 된 탄산수 광고 포스터와 같은 포즈였다.
참고로 눈앞에서 그런 포즈를 해도 별 감흥은 없다. 기유현의 얼굴을 자주 봤더니 미남 내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베스트 프렌드. 줄여서 베, 프. 알겠어요?”
‘뭘 알아…….’
“그 친구가 어릴 때 나한테 말했거든요. 나만큼 믿을 수 있는 친구는 없다고. 이렇게 손을 꼭 잡고, 나랑 평생 친하게 지내 달라고 해서 베프의 연을 맺었죠.”
기유현이 이 남자에게 그런 말을 하는 모습이 도무지 상상되지 않았다. 나는 무심코 반박했다.
“거짓말이죠?”
“역시 아는 사이 맞네! 무슨 사이예요? 벌써 그렇고 그런 사이?”
“……그렇고 그런 사이?”
테이블에 앉아서 취미 생활 중이었던 아스가 귀를 쫑긋 세웠다. 아니, 그거 아니야. 계속 하던 일 하렴.
내가 대꾸를 하건 하지 않건 아랑곳하지 않고 오서호는 계속 떠들었다.
“하하, 사장님 눈이 높으시네. 베스트 프렌드로서 그 친구가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되어서 왔어요.”
“…….”
“돌아온 헌터의 유혹도 다음 주면 내 분량이 끝나서 시간이 났거든요. 보고 있어요? 돌아온 헌터의 유혹, 인기 많은데. 다음 주에 내 역할이 여주인공을 구하고 죽거든.”
“왜오오옭(스포일러를 하다니)?!”
“뀨우우!”
엄마, 나 이 인간 짜증나…….
그때, 카페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 들어온 손님은 힝행홍 씨였다. 오서호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좋다. 나는 오서호를 피하며 진심을 담아 반가운 마음으로 불렀다.
“어서 오세요, 힝행홍 씨!”
“……?! 으앗? 그렇게 갑자기 저의 헌터 채널 닉네임을 부르면 놀라거든요?! 사이버 개인 정보 보호해 주세요!”
이런. 매번 속으로 본명 대신 닉네임을 부르다 보니.
“아하하, 반가운 마음에 그만. 뭐로 드릴까요?”
“음……. 아메리카노랑 쿠키 세트 주세요.”
“네, 여기 메뉴 나왔습니다.”
“하아…….”
메뉴를 받아 든 힝행홍 씨가 테이블에 앉아 우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는 표정이다. 지난번과 같다. 아니, 지난번보다 더 안 좋다.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색이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으세요?”
“하하, 별일 아니에요. 괜찮아요.”
힝행홍 씨는 웃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어설픈 곡선을 그리는 데서 그쳤다. 가까이서 보니 눈 밑이 퀭하다. 전혀 괜찮지 않은 표정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친구가 잠수타고 연락이 안 된다고 했었지. 그건 어떻게 됐으려나?
“전에 친구분 일은 어떻게 됐어요? 연락은 되셨어요?”
<슈퍼 버프 커피>와 우리 카페 커피를 가지고 캐삭빵 내기를 했다니 신경 쓰였다. 배후가 찜찜한 <슈퍼 버프 커피>에 지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고.
힝행홍 씨는 한층 더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그거……. 그게 문제가 아니게 됐어요.”
“네?”
힝행홍 씨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계속 친구가 카톡과 전화에 묵묵부답인 것에 그는 화가 났다. 아무리 캐삭빵에서 질 것 같아도 연락을 끊다니! 시원하게 욕이라도 퍼부어 줄 생각으로 집으로 찾아갔다.
친구는 집에서 태연하게 잠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카톡은 무시하고 낮잠이나 자다니 기가 막혀서 당장 깨우려 했다.
그런데 아무리 깨워도 친구는 눈을 뜨지 않았다. 몸을 붙잡고 흔들어도 반응이 없었다. 가볍게 때려도 보고, 급기야 머리에 얼음물을 퍼부었는데도 코나 골았다.
역시 이상하다 싶어서 힝행홍 씨는 힐러를 불렀다. 그러나 힐러도 치료법을 모르겠다고 했다. 체내 에테르 흐름에 이상이 있는 듯하다는 말뿐.
“젠장. 친구가 병에 걸렸는데 내기나 하자고 하고, 나는 쓰레기예요…….”
“으아아, 힝행홍 씨의 탓이 아니잖아요. 기운 내세요.”
“하아…….”
힝행홍 씨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굉장히 신경 쓰이는 이야기였다.
깨지 않는 잠에 빠지는, 체내 에테르 흐름에 이상이 생기는 병이라.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최세드릭의 여동생이 걸렸다는 희귀병과 증상이 비슷하다. 참고로 그녀도 푸른 세라에노꽃 덕분에 증상은 완화되었지만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자책하는 말을 중얼거리는 힝행홍 씨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원인으로 짐작 가는 건 있으세요?”
“글쎄요. 평소에 위험한 던전에 가는 일도 잘 없어서, 뭔지는……. 아! 방에 그게 많긴 했어요.”
“그거요?”
“<슈퍼 버프 커피>의 테이크아웃 컵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