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원래 그곳 커피를 자주 마시긴 했는데. 저하고 내기에서 이기려고 한 번에 많이 마신 것 같더라고요.”
“…….”
“설마 카페인 쇼크? 카페인 중독인 걸까요?!”
“그, 카페인 중독은 아닐 거예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힘들긴 하지만, 카페인 중독 상태 이상에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증상은 없다.
“그럴까요…….”
착잡한 표정으로 잔에 남은 커피를 전부 비운 다음, 힝행홍 씨가 몸을 일으켰다.
“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이야기하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어요. 이럴 게 아니라, 병문안이라도 가야겠어요.”
꾸벅.
인사를 한 힝행홍 씨가 힘없는 걸음걸이로 문을 향했다. 나는 그를 배웅해 주었다.
“신경 쓰이는 이야기군요.”
“으악, 어느새 뒤에?!”
오서호가 바로 뒤에서 말을 걸었다. 진짜 놀랐다.
조금 떨어져서 이야기하라고 하려던 찰나였다.
퍽! 뭔가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오서호의 손에 들린 펜이었다.
방금 이 남자가 한 발짝 옆으로 물러서지 않았다면 폭발한 건 펜이 아니라 그였을지도 모른다.
난데없는 폭발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오서호가 입구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헬로, 마이 베스트 프렌드!”
“리을 씨 괴롭히지 말고 꺼져.”
기유현이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유현 씨, 어서 오세요.”
나는 아까 오서호가 등장하자마자 기유현에게 카톡을 보냈다. 시간으로 보아, 기유현은 카톡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온 것 같다.
“나의 베프여! 오랜만인데 여전히 과격하구나.”
여전히? 방금 폭발음이 났는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단 이야기인가. 그걸 친구라고 할 수 있나?
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오서호를 보았다. 오서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롭게 웃었다.
“이 형님에 대한 반가움을 솔직하게 표현하기 부끄러워하는 걸 안단다. 핫핫핫!”
“……미안합니다, 리을 씨.”
“사과를 받아들일게요.”
“그보다 방금, 전에 그 손님이 어두운 표정으로 나가던데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기유현이 오서호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말했다. 완벽한 차단 능력이었다.
“아, 그거 말인데요.”
“……여러분, 혹시 제 모습이 안 보이시나요? 이상한데. 이렇게 잘생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는데?”
“소음이 심해 이야기를 나누기 불편하군요. 자리를 옮길까요?”
“베프여, 스톱!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을 테니 제발! 흡!”
“아하하…….”
약간 소요가 있었지만, 나는 조금 전 힝행홍 씨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유현에게 전했다.
“가장 의심스러운 건 <슈퍼 버프 커피>로군요.”
짧은 이야기의 끝, 기유현이 내린 결론이었다. 나 역시 그 결론에 동의한다.
“커피를 마시고 깨어나지 않는 잠에 빠졌다라…….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조사를 해 봐야겠지요.”
“그렇군요…….”
“다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네?”
한국 헌터계는 상위 랭커들에게 책임만큼 많은 권한을 준다.
그런 만큼 ‘무원’의 이름으로 막무가내로 카페를 닫고 조사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슈퍼 버프 커피>의 배후에 있는 <성혜 기업>이 얼마만한 규모인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자칫하다가는 잔챙이만 붙잡고 진짜 실세에게는 도망칠 틈만 줄 수도 있었다.
확실히 그렇다.
잔챙이를 처리해 봐야 <교단>의 전체가 뿌리 뽑히지는 않겠지. 다음번에는 다른 회사를 세워 비슷한 일을 벌일 수도 있다.
진짜 배후를 처리하지 않으면 원점으로 돌아갈 뿐이다. 한 번에 증거를 모아서 뿌리까지 파헤쳐야 한다.
그러니 의심받지 않고 접근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 기유현이 설명했다.
……어쩔 수 없나.
의문은 한 가지 더 남아 있었다.
힝행홍 씨의 친구가 그곳의 커피를 마시고 잠이 든 게 사실이라면…….
“목적이 뭘까요?”
“네?”
“이런 짓을 하는 목적 말이에요. 커피를 팔아서 돈을 벌기 위해서일까요?”
“그럴 가능성은 낮습니다. 카페 사업에 들어간 투자금이 상당해요. 아무리 비싼 값에 커피를 판다고 해도 투자금을 회수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돈이 아니라면, 그 커피를 팔아서 얻는 이득이 뭘까요? 부작용이 발견되면 늦든 빠르든 판매가 중단될 텐데요.”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카페 리을>을 망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거나.”
“에이, 설마요. 이런 외진 곳에 있는 우리 카페에 무슨 원한이 있어서요.”
그건 아니다.
그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기유현이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다. 확신은 없는 목소리였다.
“커피를 마시게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일까요.”
“으음…….”
나와 기유현은 머리를 맞대고 생각에 골몰했다.
정보가 너무 없다. 이래서는 어떤 답을 내든 막연한 추측에 불과했다.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지? 잠입하면 되잖아?”
불쑥 오서호가 끼어들었다.
“적과 의논할 생각은 없어요. ……어라?”
오서호는 <슈퍼 버프 커피>의 홍보 모델이다. 적의 관계자. 좀 더 이분법적으로 말하자면 적의 편.
그런데 기유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오서호의 앞에서 판매 금지 절차에 대해 이야기했다. 진짜 적의 편이라면 말을 아꼈을 텐데.
“설마…….”
“후후후, 어디까지나 홍보 모델 협의 중인 상태입니다. 곧 계약은 불발될 테고요. 그런 정체도 모를 것을 내 이름을 달고 홍보할 생각은 없어요.”
“왜오옹, 왜옹(역시! 나는 믿고 있었다)!”
무자비한 스포일러로 녹다운되었다가, 방금 입덕과 탈덕의 회전문을 한 바퀴 돈 미음이가 환호했다.
오서호 씨, 나중에 우리 집 고양이랑 악수 한번 해 주고 가시길.
“그곳의 정보를 얻기 위해 이 한 몸 발 벗고 나섰습니다, 하핫!”
“결과는?”
기유현이 오서호 쪽을 보지도 않고 짧게 물었다.
“일반 직원들은 그냥 월급쟁이야.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내부는 보안이 철저해서 접근할 수 없었어.”
“……실패했단 이야기군.”
싸늘한 시선에 굴하지 않고 오서호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그러니까. 외부에서 조사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여기서 고민할 게 아니라, 내부에 잠입해서 증거든 목적이든 밝혀내는 게 빠르지 않나?”
“조용히 해 주십시오, 오서호 헌터.”
“크흑! 베스트 프렌드, 왜 그렇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로 나를 부르는 거지?”
“……하아.”
오. 기유현이 남한테 진심으로 짜증난다는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런데 가만. 이거 괜찮은 생각인데?
오서호의 말이 맞다. 외부에서 조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기유현이 그 카페를 조사한다고 했으니, 언젠가는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만 시간이 걸릴 테다.
그러느니 차라리…….
“좋아요, 잠입하죠!”
내 급발진에 기유현이 놀란 눈을 했다.
내가 제안한 것은 위장 취업이다.
<슈퍼 버프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이 되면 내부가 어떤 분위기인지 살피기 용이하니까.
“아르바이트라면 제가 소개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일할 사람을 찾고 있더라고요.”
오서호가 선뜻 협조를 약속했다. 좋아, 순조롭게 숨어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기유현은 내 제안에 난색을 표했다.
“말씀하시는 바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들 뒤에는 교단이 있어요.”
“…….”
오서호는 아무 말 없이 살짝 눈만 좁혔다. 그도 교단과 관계가 있나? 예사로 듣는 반응은 아니었다.
기유현이 다시 말했다.
“위험하니 제가 가겠습니다.”
“그건 곤란해요. 여기서 저 말고 카페 일 해 보신 분?”
“…….”
“…….”
잠깐의 침묵 뒤, 기유현이 반박했다.
“리을 씨는 <카페 리을>의 주인으로 얼굴이 알려져 있죠. 손님으로 방문하는 정도면 몰라도 직원이 되면 100% 들킬 겁니다.”
“…….”
아차. 그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이대로 손 놓고 있기에는 그곳이 너무 신경 쓰인다.
깊은 잠에 빠진 힝행홍 씨의 친구, 수상한 황금색 병, 비밀 문에 새겨진 마크…….
무엇보다, 내가 애정을 담아 만드는 버프 커피의 의미를 변질시키다니!
원조 버프 커피 카페 주인으로 용납할 수 없다. 어떻게든 나도 진상 조사에 참여하고 싶다.
의외로 답을 내준 건 오서호였다.
“그런 걱정은 필요 없다, 베스트 프렌드여. 나 환영술사 오서호의 힘이 있으면 만사형통!”
하하하, 오서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 * *
“그래도 이런 건 좀 그렇지 않아요?”
“아니요. 이 정도는 전혀! 문제없습니다.”
오서호가 내게 거울을 보여 주었다.
핑크색 곱슬머리에 초록색 눈동자, 길게 뻗은 속눈썹, 눈 밑의 점, 당장 메탈 밴드를 해도 될 듯한 화려한 옷차림…….
거울 속에는 낯선 내 모습이 있었다.
내 옆에 있는 기유현도 사정은 비슷했다.
반짝이는 금발에 푸른 눈, 피어싱, 패션잡지에서 그대로 잘라 온 듯한 화려한 옷차림.
잘 빚어진 아름다운 얼굴은 그대로지만 같은 사람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화려한 모습이었다.
오서호의 환영술이었다.
새로 연 지점이 많아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인지, 오서호의 소개만으로 그대로 <슈퍼 버프 커피>에 아르바이트 취직이 결정되었다.
당분간 <카페 리을>을 이른 오후에 닫고, 저녁에 네 시간씩 일하기로 했다.
회귀한 뒤로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설마 투잡까지 뛰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것도 멀쩡한 내 가게를 닫고 남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인생은 정말로 예측불허구나.
그렇게 다가온 아르바이트 출근, 아니, 잠입 첫날.
평소보다 이르게 카페 문을 닫은 다음, 기유현과 오서호가 왔다. 정체를 들키지 않도록 오서호가 환영술로 모습을 바꿔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기유현도 세트로 바꿨다.
자신만만한 오서호를 믿고 맡겼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금발의 기유현과 핑크색 머리칼의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