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 * *
“아스, 나 갔다 올게.”
“…….”
아스는 떠나는 권리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고, 그녀의 모습은 금방 보이지 않게 되었다.
“상심한 표정이구나, 화신체여.”
“뀨우우…….”
동물들이 그의 발치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런 거 아니야.”
대답과 달리 표정은 여전히 우울한 기색이 감돌았다.
권리을. 저 얼빠진 인간을 보호하고, 곁에 머물기 위해 아스는 그간 많은 노력을 했다.
구체적으로는 잘 먹고 잘 자고 적당하게 운동하기, 어른스러운 취미 어필하기 등등.
분명 쌍둥이가 시금치를 많이 먹으면 키가 큰다고 했는데.
‘그 녀석들, 거짓말을 한 건 아니겠지?!’
남기지 않고 시금치를 다 먹었는데 조금도 자라지 않았다. 매일 아침 벽에 새기는 키 표시는 며칠째 제자리걸음이었다.
꾸준히 권리을의 커피를 마시면서 아스의 몸에도 상당한 마력이 축적되었다.
그러나 그는 본체와 연결이 끊긴 ‘독립된 개체’.
스스로 소멸하지 않는 한, 이 불완전체가 아닌 원래의 멋진 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래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저 얼빠진 인간은 자신을 어린아이로만 생각할 것이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카페에서 일한 경험이 있고, 적의 본거지에 잠입이 가능한 사람. 자신이 바로 옆에 있지 않은가.
그러나 권리을은 아스를 잠입에 데려갈 상대로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자신은 어디까지나 보호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아스는 지난번 용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스, 괜찮아. 괜찮으니까……. 금방 올게.”
이마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 흙먼지로 엉망진창이었지만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 짓는 얼굴. 굳건한 눈빛.
그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속 어딘가가 찌르르 아팠다. 다시는 그런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분하다.
아스도 그녀를 돕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
문득 아스는 어떤 것을 떠올렸다.
지금의 자신이라도 동원할 수 있는 인간들이 있었다. 그들이라면 만약의 상황이 왔을 때 도움이 될 것이다.
덜컹.
아스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어딜 가느냐! 왜옹!”
“뀨우, 뀨우!”
동물들의 부름에도 멈추지 않고 소년이 확신에 찬 걸음걸이로 가게를 나선다.
서울시 중구 명동.
마왕 숭배교 <황혼>의 본거지가 그곳에 있었다.
마왕 아스모데우스의 실존을 확인한 뒤 <황혼>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더 이상 ‘마왕 진짜 계심’, ‘곧 마왕 부활 예정’ 따위의 불법 홍보물을 뿌릴 필요는 없었다. 주1회 역 앞 포교 활동도 그만두었다.
왜냐면 진리는 한낱 어리석은 인간의 믿음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소리쳐 떠들지 않아도 마왕 아스모데우스는 계신다.
이 세상에 마왕이 있다는 걸 안 이상 마왕 숭배교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였다.
세상은 마왕의 이름 아래 평등하다. 그러니 마왕의 것인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는 일이었다.
무료 급식 봉사, 교육 봉사, 보육원 봉사 등……. 마왕 숭배교 <황혼>의 신도들은 여러 봉사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자 했다.
“네? 마왕 숭배교? 거기가 어디죠?”
“관내 포교 활동 금지합니다. 봉사 활동? 그걸 믿으라는 건가요? 나가세요.”
“사이비 안 사요.”
그러나 선입견 때문에 그들을 받아 주는 곳은 없었다.
오늘도 근처 보육원 봉사 활동을 하려 했지만 아이들이 피하기만 해서 그냥 돌아온 <황혼>의 교주는 한숨을 쉬었다.
본거지의 마당을 어린이 놀이터로 개방했지만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 적막뿐이었다. 텅 빈 그네가 바람에 흔들리며 삐걱거렸다.
자신은 잘못된 길을 택한 걸까?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었던 것뿐인데…….
시무룩하게 숙인 노인의 고개에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헉! 아, 아스모데우스 님이 아니십니까!”
단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그 모습을 잊을 리가 없다.
냉소와 허무에 물든 창백한 낯빛……. 창백……?
그 사이에 식사를 잘하셨는지 안색이 좋아졌다. 살이 오른 말랑말랑한 뺨이 동그란 곡선을 그렸다. 더군다나 털실 베레모와 코트를 걸친 차림은 귀엽기까지 했다.
마왕답지는 않지만…….
밥은 중요하다. 어쨌건 건강해지셔서 보기 좋군.
살이 올라 말랑말랑한 뺨을 한 아스가 근엄하게 선언했다.
“여기 있었군. 내 너희에게 분부할 일이 있다.”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분부하소서, 아스모데우스 님!”
교주를 필두로 본거지에 있던 신도들이 모여 아스의 앞에 부복했다.
마왕의 명령은 무엇일까. 드디어 혼탁한 세계를 정화하려는 건가? 전설 속 금지된 비술의 실행? 혹은…….
고요 속, 모두의 시선이 아스를 향했다.
“우선 이걸 받아라.”
아스는 가방에서 몬스터 모양 미니어처를 여러 개 꺼냈다.
재미있어서 너무 많이 만들었더니 더 이상 자신의 방에는 둘 데가 없었다. 그렇다고 기껏 만든 것을 버리기는 아깝다.
진짜 목적을 언급하기에 앞서 이 인간들에게 미니어처를 처리해 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바로 그때.
마왕 숭배교 <황혼>을 피하기만 했던 근처 보육원 아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지나치게 실감나게 생긴 몬스터 미니어처를 가리키며 물었다.
“와! 장난감이다! 이거 갖고 놀아도 돼요?”
“흐, 흠. 좋을 대로 하거라.”
아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는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친구를 향해 크게 손짓했다.
“야! 너희 빨리 와. 여기 장난감 있어!”
“와아아!”
“이거 진짜 진짜같이 생겼어요!”
“진짜 맞아. 마력을 담아서…… 이렇게, 움직일 수도 있어.”
“우와아! 이 중에 뭐가 제일 세요?”
“난 드래곤 할 거야!”
곧 마왕 숭배교 <황혼>의 마당은 활기찬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마당을 놀이터로 만들면서 교주가 꿈꿨던 바로 그 풍경이었다.
‘크흑……. 이 노인네의 바람을 이뤄 주시다니, 역시 아스모데우스 님…….’
아이들로 북적거리는 놀이터를 보면서 교주는 생각했다.
평생 이분을 따르겠다고.
* * *
아르바이트 면접은 순식간에 끝났다.
그다지 카페 일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스타일의 사람 셋이다. 하지만 카페 매니저는 팔다리 멀쩡한지만 확인하고 바로 채용 결정을 내렸다.
좋아. 이제 셋이서 <슈퍼 버프 커피>의 내부를 샅샅이 조사해야지.
“잠깐.”
주먹을 불끈 쥐는 그때, 매니저가 우리를 멈춰 세웠다.
“거기, 음, 최이참 씨?”
“……네?”
최이찬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마 의심을 산 걸까?
“최이참 씨는 창고 정리를 해 주세요. 잘됐네요. 마침 힘 쓸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네, 알겠습니다.”
역시 전 격투기 선수 콘셉트는 무리였나.
최이찬이 창고로 배치되면서 파티에서 이탈했다. 나는 다 뜯어진 셔츠를 입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음은 기유헌 씨?”
매니저의 가차 없는 인사 배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유헌 씨는 이제부터 미스터 글로리입니다.”
“네? 그 후진 이름은 뭡니까.”
금발에 푸른 눈을 한 기유현이 눈가를 찌푸렸다.
“미스터 글로리는 외국에서 저희 카페의 커피가 마음에 들어 유학 왔다는 설정입니다.”
“네?”
“장내 정리와 손님들 안내를 맡아 주세요. 안내 시 적절하게 영어를 섞어 쓰도록 해 주시고요.”
요즘 세상에 그런 사대주의적인 콘셉트를?!
“뭐라고요? 파든?”
“그래요. 잘하네요.”
그렇게 미스터 글로리 a.k.a. 기유헌이 홀로 끌려가면서 파티를 이탈. 나만 혼자 남았다.
“마지막은…… 권니은 씨.”
“네, 네넵, 네!”
매니저의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향했다. 이상한 데로만 배치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커피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음료 제조 현장에 접근해야 한다. 두 S급이 각각 다른 데로 가 버린 이상, 나라도 음료 제조를 맡아야 할 텐데.
‘그 때문에 이력서에 카페 경력도 적었는데…….’
카페 (알바) 경력이 아니라 카페 (사장) 경력이지만 사소한 건 넘어가자.
“…….”
“…….”
침묵이 길어질수록 나는 불안해졌다. 정체를 들킨 걸까?
불안이 극대화된 그때, 한참 예리한 눈빛으로 나를 보던 매니저가 불쑥 말을 걸었다.
“새니티 핀치 좋아해요?”
“네?”
어렴풋이 들어 본 적 있는 밴드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 티셔츠, 새니티 핀치의 첫 월드투어 티셔츠죠?”
그랬나? 하지만 잘 모른다고 하면 의심을 사겠지?
“아, 네, 네! 사파이어 소드라는 노래를 제일 좋아해요.”
전에 하던 게임 오프닝으로 쓰여서 유일하게 아는 노래 제목을 댔다. 그런데 아무래도 잘못된 답을 고른 모양이다.
“호오, 그 마니악한 노래를 고르다니. 안목이 뛰어나군요.”
“네?”
앞머리 한 올 남기지 않고 빗어 넘긴 헤어스타일, 각이 잡힌 셔츠와 바지.
그런데 잘 보니 매니저는 재킷에 ‘새니티 핀치’의 배지를 달고 있었다. 팬이었구나.
“따라오세요, 권니은 씨. 당신은 우리 크루에 들어올 자격이 있어요.”
“……네?”
“나만 믿고 따라와요. 내가 당신을 크게 키워 주겠어요.”
너무나도 믿음직한 상사의 모습으로, 매니저가 눈을 찡긋했다.
* * *
끼이익, 탕.
깊은 밤, 나는 <카페 리을>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자동으로 환영술이 풀리면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뀨우우…….”
“왜옭, 이게 무슨 냄새냐!”
내 몸에서 풀풀 나는 술 냄새에 동물들이 불평을 쏟았다.
“이제 온 거야?”
시간이 늦었는데도 아스가 자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맙기도 하지.
무거운 몸을 겨우 이끌어 의자에 걸터앉았다. 테이블 위에 이마를 대고 엎드린 채 흐느꼈다.
“흑, 흐윽, 흑…….”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스……. 나, 나 있잖아.”
나는 아스의 팔을 끌어안고 고개를 기댔다. 아스는 내게서 나는 술 냄새에 얼굴을 찌푸렸지만 나를 뿌리치지는 않았다. 참고로 나는 한 방울도 안 마셨다.
“무슨 일인지 말해. 그 자식들……!”
지친 고개를 늘어뜨리며 100%의 진심으로 읊조렸다.
“아스, 나…… 출근하기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