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배신자는 만나지 않는다고 전하라는…….”
“권지운 헌터님이 딱히 배신을 하신 건 아니잖아요? 그냥 최이찬 헌터가 그쪽을 고른 거지.”
“내 앞에서 그쪽의 편을 드는 거냐는…….
“음, 그럼, 길드장님이 꽁하셔서 거절한다고 전달할게요.”
“꽁한 거 아니라는…….”
“꽁하신 거 맞네요.”
“하아, 서럽다는. 가면 될 거 아니냐는…….
그들은 벌써 7년을 넘게 알았다. 이는 주노을이 어지간해서는 부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에휴, 내 신세야.
어차피 갈 생각이기는 했다. 주노을과 권지운 사이에 개인적인 친분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 밤에 갑자기 연락을 하다니 모르긴 몰라도 중요한 용건이겠지.
그래도 괜히 꽁한 마음에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권지운을 만나러 간 주노을은 깜짝 놀랐다.
“이게 뭐냐는…….”
“아버지 일로 수색을 하다가 이상한 점이 있어서요. 주노을 헌터는 아시는 바가 있나 해서.”
권지운이 그녀에게 태블릿PC를 닮은 기계를 건넸다.
화면 속에는 그녀가 겪은 불행의 근원이자 원수인 짭카페의 모습이 보였다. 역시 권지운도 이 짭카페를 신고할 마음을 먹었구나, 하고 동질감을 느낀 것도 잠시. 곧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특수한 카메라로 촬영된 영상이다. 화면 구석에는 실시간으로 측정된 에테르 반응 수치가 표시되었다.
“이거, 고장 난 거 아니냐는. 숫자가 이상하다는…….”
던전 안도 아닌데 에테르 반응 수치가 너무 높았다. 이 정도면 균열이 터진 직후의 수치와 비슷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숫자가 점점 더 치솟더니 에러 음이 울린다.
삐삐삐삐-
‘수치가 측정 범위를 초과했습니다. 측정기를 재교정해 주세요.’
탕!
“길드장님, 지금 밖에, 문제가……!”
문을 열고 들이닥친 헌터가 가리킨 방향을 본 주노을은 놀라 굳었다.
창 밖에서 길을 걷던 사람이 갑자기 스르륵 잠들면서 쓰러졌다.
그런데 저건…….
“나무……?”
푸른 잎과 앙상한 은빛 가지가 잠든 자의 몸에서 돋아났다.
* * *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최이찬에게 말을 걸었다.
【너,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 아니었나?】
최이찬은 심드렁한 투로 대답했다.
“아무 때나 말 걸지 말지?”
【차갑구만.】
<슈퍼 버프 커피>의 매장 옆에 딸린 창고. 마침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최이찬은 창고에 쌓인 상자의 내용물을 살피는 중이었다.
원두, 테이크아웃 컵, 티슈 등……. 상자에 든 물건에 이상한 부분은 없다.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면서 최이찬이 입을 열었다.
“다른 헌터들도 너 같은 녀석이 아무 때나 말을 걸어 대? 시끄러워 미칠 거 같은데 다들 잘도 견디는군.”
【그럴 리가.】
【나와 같은 위대한 자와 계약을 맺은 헌터는 극소수.】
“자기 입으로 위대하다고 하면 민망하지 않아?”
【…….】
할 말을 잃은 목소리가 침묵한 사이에 최이찬은 박스 더미를 옮겼다.
【보통은 인과율의 제한 때문에 계약자에게 직접 말을 걸기는 힘들다.】
【그런데 너는 규정을 벗어난 존재. 그래서 직접 말을 걸 수 있지.】
“아, 그래.”
심드렁한 대답이었다.
규정을 벗어난 존재. 그 말이 자신이 E급이었다가 S급이 되었다는 의미라고 이해한 듯했다.
노란 옷의 왕 □□□은 굳이 오해를 정정하지 않았다. 그는 떠들어 대기를 좋아하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원래 정해진 흐름대로라면 최이찬은 이미 사망했을 존재.
그러나 그는 흐름을 벗어나 살아남았고, 인과율이 느슨하게 적용된다.
그로 인해 최이찬이 그 아티펙트를 손에 넣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아직은 알 필요 없는 일이다.
아직은.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최이찬은 깔끔하게 긍정했다.
입 밖에 낸 뒤에야 확실히 알게 되는 것이 있다. 그가 느끼는 감정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그렇다. 좋아한다.
이 목소리는 오늘따라 끈질기게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왜 그 여자와 함께 가지 않았지?】
【그 남자, 기유현이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 알잖아? 그와 둘이서 가게 둔 이유가 뭐지?】
최이찬은 원래 권리을이 이 카페를 조사하는 일에 반대했다.
오서호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꺼림칙한 남자와 함께라니 반대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권리을의 표정을 보는 순간, 자신이 그녀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권리을은 대부분의 일을 무던하게 넘기는 편이었다. 온화하고 친절하면서도 매사에 깊게 파고들지 않는 성격이다.
그랬던 그녀가 또렷한 눈빛을 하고 자신을 올려다본다.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그런 말을 듣고 그녀를 막아서기란 불가능하다.
괜찮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옆에 찰싹 붙어서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게 잘 보호해야지. 여차하면 미끼가 될 각오도 했다.
그렇게 굳건한 결심을 품고 찢어진 셔츠를 걸친 채 <슈퍼 버프 커피>에 잠입했지만.
현실은 곧장 창고로 격리. 옆에 찰싹 붙어 있기는커녕 권리을의 얼굴 한 번 보기도 어려웠다.
창고 일은 어렵지 않았다.
“어이, 알바생! 그거 무거우니까 조심…….”
“네?”
“허, 허허. 그걸 한 손으로 드네. 자네 힘이 엄청난걸.”
“아! 네, 네! 무…… 무겁네요! 아이고, 무거워. 팔이 다 아프네.”
“왜 그렇게 어색하게 말하나?”
“…….”
일 자체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물건을 들 때마다 적당히 힘든 척하기가 더 어려웠다.
또 하나 문제는…….
“저기, 저 사람 좀 봐.”
“옷이, 우와, 대박.”
“근육이 무슨 저렇게……. 운동 어떻게 한 거지?”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엄청나게 부담스럽다.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왜 하필 이런 차림을 해야 하는 거지? 최이찬은 속으로 오서호의 취향에 의문을 표했다.
어쨌건 이미 하기로 한 일. 최이찬은 역할에 맞게 매일 열심히 창고 정리를 했다.
그러다 문득 의아한 점을 깨달았다.
카페의 규모에 비해 창고가 너무 크다. 아무리 대형 카페라고 해도 쇼핑몰이나 마트도 아닌데, 물류 담당자가 따로 있는 것은 이상하다.
‘흐음…….’
매일 창고로 입고되는 물건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이 창고는 무엇을 보관하는 곳일까.
의문을 느꼈지만 창고에는 최이찬 외에도 물류 담당자가 항상 있어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 닷새째인 오늘 드디어 틈이 생겼다. 물류 담당자가 그 수상한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것이다. 한 번뿐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분명 뭐가 있을 텐데…….”
최이찬은 제법 묵직한 박스를 확인했다. 파우더, 시럽, 밀가루 등. 이상한 물건은 없다.
그러다 박스를 높이 쌓아 둔 곳 안쪽에 빈 공간을 발견했다. 왜 여기를 비워 뒀지? 뭐가 있어서…….
“사람……?”
박스 너머의 모습에 숨을 삼킨 것도 잠시.
【피해라.】
머릿속으로 들린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다음 순간, 은빛 가지가 뻗어 나왔다.
* * *
불이 꺼진 복도. 저 어설픈 종교 모임에 갔거나 퇴근했기 때문인지 다른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카페를 조사하기 위해 기유현과 나란히 이동하던 중. 나는 잠시 숨을 죽이고 걷다가 불쑥 말을 걸었다.
“유현 씨,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네, 말씀하세요.”
기유현이 <슈퍼 버프 커피>의 4층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면서 대답했다.
“오서호 헌터랑은 무슨 사이예요?”
베스트 프렌드 운운하는 오서호의 말에 기유현은 거의 먹금으로 일관했다.
태도는 차가웠지만.
그런 것 치고는 오서호의 판단을 존중했다. 지금도 기유현은 오서호의 환영술대로 금발에 푸른 눈을 하고 있었다. 신뢰하지 않았다면 그러지 않았겠지.
“…….”
“…….”
침묵이 이어졌다.
“유현 씨?”
“…….”
“말하기 어려운 거면 대답 안 하셔도 되는데.”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닌데. 조금 설명하기 어려워서요.”
“……네.”
달칵, 문을 열고 주위를 확인했다. 이미 영업을 마친 뒤인 <슈퍼 버프 커피> 안은 고요해, 기유현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회귀 전. 마신의 부활을 저지하기 위해, 함께 대던전 《어비스》를 오른 헌터들이 있었습니다.”
“거기 오서호 헌터가 있었어요?”
“네, 중간까지는 함께였습니다.”
“왜 중간까지만…… 아.”
한 박자 느린 깨달음에 숨을 삼켰다.
“네, 그때 사망했습니다.”
“…….”
주위에는 짙게 어둠이 깔렸다. 기유현은 내게 등을 보이고 선 채라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나는 지금 기유현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제야 이 남자가 회귀한 순간은 나처럼 어이없는 죽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마신의 부활을 막기 위해 대던전 《어비스》를 올랐다.
이런 짧은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이 느껴졌다.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다소 떠들썩한 성격이기는 하지만요.”
기유현이 말을 이었다. 담담한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오서호 헌터는 유현 씨를 베프라고 하던데요.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라고요. 뭐라더라, 평생 친하게 지내 달라고 했다나.”
“그건…….”
흐린 기억을 더듬는 듯 그가 살짝 먼 곳을 보았다.
“기억나지 않는군요.”
“네?”
“예전부터 아는 사이이긴 할 텐데……. 그 인간이 떠들어 대는 일은 기억에 없어요.”
자신의 과거일 텐데도 그는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말했다.
“오서호 헌터도 회귀 전의 일을 기억하는 건가요?”
이미 회귀자가 둘인데 셋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지. 그러나 기유현은 단호하게 잘라 부정했다.
“그건 아닙니다. 회귀 전의 기억이 없는 그 인간이 왜 저를 그렇게까지 친근하게 여기는 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
“……여기도 사람은 없네요. 이상할 정도로 경비가 허술해요. 리을 씨, 이쪽으로.”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기유현이 말을 돌렸다. 푸르스름한 비상구 불빛이 기유현의 입가에 걸린 쓴웃음을 비추었다.
제조실의 문이 앞에 있었다. 나는 살짝 문을 밀어 보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제조실 문은 잠겨 있었다.
이거 열 수 있으려나?
“리을 씨.”
나를 물러나게 한 뒤 기유현이 문의 잠금장치를 붙잡았다. 달칵, 소리와 함께 천천히 문이 열렸다. 스킬을 사용한 것 같았다.
평범한 휴게실처럼 생긴 방. 장식장 위에 잘 보이게 황금빛 병이 놓여 있었다.
“……! 저기 있어요. 저거예요.”
띠링.
병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시스템 창이 떴다.
[아이템: 황금주(★★★☆☆)
고대의 제조법에 따라 농축 에테르로 빚은 음료.
섭취 시 다양한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 과도하게 섭취 시 이계의 나무를 불러들입니다. 부작용에 주의 바람]
이계의 나무? 어째 이름이 상당히 불길하다.
내용물을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병에 손을 뻗는 그 순간.
“읏……!”
파직!
찌르르 전기가 통하는 느낌에 놀라 손을 거뒀다. 결계 같은 것이 있어서 병을 만질 수는 없었다.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 커피 스파이 대작전’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수령해 주세요.]
[경험치: 500exp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18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레시피 ???를 획득했습니다.]
[에테르-위키에 ??? 항목이 추가되었습니다.]
주르르 뜨는 시스템 알림을 눈으로 훑었다.
“리을 씨, 저길 봐요.”
“네?”
그때 기유현이 창밖을 가리켰다.
이상하다. 이미 늦은 밤인데도 창밖에서 빛이 비쳐 들어왔다.
대체 뭐지? 나는 창문에 쳐진 블라인드를 치우고 밖을 보았다. 창고 쪽이 환하게 밝아, 처음에는 전등을 켠 줄 알았다.
아니, 아니다. 은색 나뭇가지가 무서운 기세로 뻗어 나오고 있었다.
타다닷, 탕!
“권리, 지금 밖에서……!”
“이찬아!”
뛰어서 벽을 넘은 최이찬이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2층인데, 그런 태클을 걸 여유는 없었다. 그가 한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큰일이야. 나무, 저 나무가……!”
최이찬은 자신이 창고에서 본 광경을 빠르게 설명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란 것이…….
“……나무가 사람한테서 돋아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