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 * *
던전식물학계 최고의 전문가, 이초록은 공허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유동인구가 많은 번화가 상가 1층, 넓고 쾌적한 매장에 세련된 인테리어. 방금 단 간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해피 그린 라이프 과일가게 2호점.
“후우…….”
뜻밖에 이초록은 과일가게 아르바이트로서 아주 유능했다.
시작은 우연히 만난 과수원 주인에게 신품종 포도 농법에 대해 가볍게 조언한 일이다.
에테르 농도가 높은 흙을 써 보라고 슬쩍 흘렸을 뿐인데, 난항을 거듭하던 신품종 재배에 성공한 데다가 포도 작황은 풍년.
과수원 주인이 감사하다며 산지직송 고품질 과일을 싼값에 줘서 엄청나게 팔았다.
덕분에 과일가게 앞에 줄 서기는 기본에, 과일이 입고되면 연락 달라며 예약을 거는 사람까지 속출했다.
이초록의 조언을 들으면 농사가 잘된다는 소문이 퍼져, 다른 과수원 주인도 그녀를 찾았다. 워낙 소량만 수확되어 백화점에서도 사기 힘들다는 희귀 과일은 산지가격으로 판매했다.
그야말로 ‘난 그냥 농법 조언만 했는데 저한테 왜 이러세요?’의 세계였다.
워낙 장사가 잘되어 2호점으로 독립했다. 이제 과일가게 아르바이트생이 아니라 과일가게 사장님이다.
던전에서 나는 에테르흙을 농업용으로 개발하기로 하면서 특허도 등록했다.
예전과 다른 호화로운 생활에 처음에는 기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깨달았다.
그러나 이 마음의 공허는 치유되지 않는다.
‘안 돼. 다시 그 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어…….’
그렇게 되뇌었지만, 이빨당근의 우는 소리가 그리웠다.
똑똑, 달칵.
“초록 씨! 오랜만이에요.”
그때, 던전 농원 시절 이초록의 마지막 손님이었던 권리을이 등장했다. 옆에는 헌터로 보이는 남자가 둘 동행했다.
“밤늦게 갑자기 미안해요.”
“어차피 여기서 청승이나 떨고 있었는걸요.”
“와, 여기가 2호점이에요? 가게가 멋지네요!”
순수한 호의가 담긴 칭찬이라는 건 알지만, 자연스레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후……. 다 허무할 뿐이에요.”
“네?”
“아니에요.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어요?”
“던전 식물 전문가인 초록 씨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건…….”
이초록은 낯빛을 흐렸다.
안 된다.
농원을 폐업하면서 다시는 던전 식물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다.
던전 식물을 키우는 농원을 운영하는 동안 이초록은 많은 일을 겪었다.
대학원까지 공부시켰는데 돈도 못 번다고 집에서는 구박받지. 장사는 안돼서 매달 적자지. 소중한 던전 식물 때문에 걸핏하면 <던전관리청>에서 과태료 날리지.
마지막은 자업자득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튼 마음의 상처가 많았다.
비정하게 귀여운 이빨당근까지 떠나보냈는데.
“죄송해요. 이제 다시는 던전 식물에…….”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라고 아세요?”
“……!”
사고보다 행동이 빨랐다. 이초록은 저도 모르게 빠르게 말을 쏟아내었다.
“물론 알죠. 어떻게 그 이름을 아세요? 문헌상으로만 남아 있을 뿐 실제로 발견된 적은 없는 아주 희귀한 나무인데요. 위험해서 쉽게 다룰 수 없어요. 하지만 약점을 알면…….”
이초록은 생각했다.
역시 과일가게보다는 던전 식물 농원이 좋다.
이번 생은 돈을 많이 벌기는 틀렸나 봐요.
* * *
왜애애앵-.
사이렌이 밤의 고요를 깨트렸다. 구급차 소리였다.
기유현이 본청과 연락해 현재 상황을 전달했다. <던전관리청>도 괴물 나뭇가지의 출현을 파악하고 있었다.
먼저 더 이상 <슈퍼 버프 커피>의 커피를 섭취하지 않도록 알리고, 999명의 피해자를 한곳으로 모은다고 했다. <성혜기업>의 잔당 체포와 전력 공백에 대비한다고도.
그리고 나는 이초록을 찾아왔다.
내 예상대로 그녀는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에 대해 잘 알았다. 공허하던 표정에 순식간에 생기가 돌더니 빠르게 설명을 쏟아 내었다.
“그 나무가 세계수인가요?”
나는 신경 쓰이던 점을 하나 물었다.
이초록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세계수냐고요? 아니요. 그건 그렇게 좋은 게 아니에요. 그냥 A급 위험 식물이에요.”
[에테르-위키에서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 항목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
이초록의 설명을 들으니 시스템 알림이 떴다.
아하. 이런 식으로 관련 정보를 얻어야 시스템이 업데이트되는 거네. 나는 곧장 새로 업데이트된 항목을 확인했다.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
종류: 식물계 몬스터>속씨식물>쌍떡잎식물
등급: A급
설명: 외우주에서 날아온 저주받은 식물. 영롱하게 반짝이는 은빛 가지가 아름답다.
주식은 인간의 영혼. 특히 황금주를 마신 인간의 영혼을 좋아한다.
천 개의 가지에 싹이 움트면 본체가 깨어나 무서운 존재를 소환한다고 한다.
영혼을 토해 내게 하지 않는 한, 아무리 베어도 죽지 않고 다시 자라난다.
질긴 생명력 때문에 이계에서는 초보자에게 추천하는 식물이다.
베란다에서도 잘 자란다.
살벌한 설명이었다. 베란다에서 저런 걸 왜 키워.
정보를 얻은 건 좋지만, 아무리 꼼꼼히 읽어도 저 괴물 나뭇가지를 어떻게 해치우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런데 설마,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가 나타난 건가요?”
“네, 맞아요. 지금 사람들이 붙잡혀서…… 해결책을 찾는 중이에요.”
“해결책이요? 그거, 만드라고라던전생강이 천적이에요.”
이초록이 아무렇지 않게 답을 알려 준 순간.
다시 띠링, 하고 알림이 울렸다.
[인과율 충족으로 시스템 정보가 업데이트됩니다.
미확인 정보가 1건 있습니다. 시스템을 확인하세요.]
[레시피: ???
재료: 만드라고라던전생강, ???
만드는 법: ???]
“만드라고라던전생강의 매운맛을 싫어하거든요. 가까이 두면 세피로트의 가지가 피해 다닌다고 해요.”
“윽, 꼭 살아있는 거 같네요.”
“식물은 원래 살아있어요…….”
그때 나와 이초록의 대화를 듣던 최이찬이 불쑥 물었다.
“그 만 어쩌고 생강은 어디서 구할 수 있죠?”
“만 어쩌고가 아니라 만드라고라……. 하아, 뭐 상관없겠죠.”
일순 반짝였던 생기가 다시 사라졌다. 과일가게가 번창해서 부유해졌다고 들었는데, 이초록은 전보다 더 기운이 없었다.
“글쎄요. 저는 이미 던전 농원을 폐업한 처지라, 구하는 곳은 잘 모르겠어요.”
“<던전관리청>에 이초록 씨한테 압수한 던전 식물이 보관되어 있을 텐데. 그쪽을 찾아볼까요.”
기유현이 의견을 냈다. 그러나 이초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압수된 아이들 중에는 없었……. 헉! 마, 맞다! 있어요! 생각났어요!”
“정말요?!”
“전에 폐업하면서, 리을 씨한테 준 그 씨앗이요! 그 씨앗이 만드라고라던전생강의 씨앗이에요!”
헉, 그 씨앗, 완전히 존재를 까먹었는데.
파랑새는 뒷마당에, 아니, 우리 가게 이공간에 있었다?!
“그거 아무리 해도 싹이 트지 않더라고요. 무슨 방법이 있나요?”
“암시장에서 구한 오래된 씨앗이라서요. 싹을 틔우게 하기 위해서는 만드라고라 전용 영양제가 필요해요.”
[에테르-위키에서 ‘만드라고라던전생강’ 항목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다시 시스템이 업데이트된다. 내용은 이초록이 알려 준 것과 거의 흡사했다.
시스템의 반응으로 보아 맞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그 영양제를 구할 수 있을까요?”
“그건…… 저한테는 없어요.”
다시 벽에 막혔다.
지금도 퀘스트 창의 남은 시간은 줄어들고 있다. 갑자기 나뭇가지에 잡아먹힌 사람들 때문에 바깥은 혼란스러울 텐데.
초조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쉽게 퀘스트를 깰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게 실은, 돈이 없을 때 영양제를 전당포에 팔았거든요.”
이초록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슬픈 과거를 토로했다.
“정말 팔고 싶지 않았어요! 언젠가 만드라고라던전생강을 키울 때를 대비해서 팔고 싶지 않았지만……. 흑, 일주일째 양배추만 씹어 먹다 보니 죽을 것 같아서 그만, 나도 모르게…….”
상당히 힘든 생활을 했구나…….
나는 문득 의문을 느꼈다.
양배추만 씹으며 이빨당근이나 플라잉 스파게티 나무를 기르던 시절과 달리 이초록은 부유해졌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과일가게 2호점만 해도 돈을 들인 티가 났다.
돈이 생겼는데도 왜 전당포에서 물건을 찾아오지 않은 거지?
내 의문에 이초록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전당포가 좀 이상하거든요.”
“네?”
“돈이라면 바로 갚겠다고 하는데도 거절했어요. 한번 맡긴 물건을 되찾기 위해서는 전당포 주인과 내기를 해야 해요.”
“…….”
“하지만 저는 아무리 해도 그 전당포 주인을 이길 수가 없었어요. 어차피 농원도 폐업했겠다 그대로 포기했었는데…….”
이초록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주소를 메모한 뒤 내게 건넸다.
“더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해요. 영양제만 있으면 만드라고라던전생강은 바로 자라요. 리을 씨라면 그 돌아버린 내기 중독자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퀘스트의 제한 시간은 이제 약 23시간 남았다.
* * *
권리을이 괴물 나뭇가지를 해치우려 고군분투하기 몇 시간 전.
최세드릭은 벽에 부딪친 상태였다.
이온의 사무실에서 찾아낸 ‘마도서’라는 키워드. 이것이 중요한 물건이라는 감이 왔다. 이 마도서를 찾아내면 그가 느끼는 위화감의 답을 구할 수 있을 테다.
그래서 생전 가 본 적 없던 도서관도 들락거리며 정보를 얻으려 했으나 성과는 제로였다. 세상에 마도서라고 칭해지는 책은 너무도 많았고, 그중 무엇이 자신에게 필요한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마도서를 판매한다는 상인도 만나 보았다.
……사기만 당했다.
그러는 동안 <씨앤엘 코퍼레이션>에서 비서 이온의 흔적은 철저하게 지워졌다. 사무실은 내장까지 전부 철거했고, 사진 한 장 남지 않았다. 이제는 그 비서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는 것 같았다.
한때는 이세인이 그렇게 비서를 의지했었는데……. 한순간에 없던 존재가 되다니 역시 이상하다.
최세드릭은 고민 끝에 정보를 얻기 위해 헌터 채널을 이용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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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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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윽…….”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에 있던 것은 그가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최세드릭은 침착하게 헌터 채널을 껐다.
이렇게 성과 없던 시간을 보내던 와중.
오늘, 이세인이 그를 길드로 호출했다.
일단 부르는 대로 길드장실을 향하기는 하지만 최세드릭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동안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에 이세인을 피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가 아는 이세인이 맞는데, 동시에 전혀 다른 사람인 느낌.
그런데 막상 이세인을 만난 순간 위화감 따위는 머릿속에서 새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왜냐하면 이세인이 한 말의 내용이…….
“로나를 치료할 방법을 찾아냈어.”
“그…… 그게 정말이에요?”
“그래.”
듣고도 믿기지 않는 내용이었다. 최세드릭은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