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동생, 최로나가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진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최세드릭은 그날 급한 지원 요청을 받고 던전에 가게 되었다. 혼자 있을 로나가 걱정되어 머뭇거리자 로나는 등을 찰싹 때리며 웃었다.
“괜찮으니까 얼른 가기나 해. 누가 오빠 없다고 징징 짤 줄 알고.”
“올 때 붕어빵 사 올게.”
“……그럼 슈크림으로 사 와.”
그것이 최세드릭이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돌아오자 최로나는 이미 깊은 잠에 빠진 다음이었다.
원인도 치료법도 불명. 온갖 방법을 써 봤지만 차도는 없었다.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발작은 로나의 편안한 꿈조차 앗아갔다. 고통에 신음하는 로나를 볼 때마다 최세드릭은 쓸모없는 자신을 견디기 힘들었다.
푸른 세라에노꽃을 살린 뒤로는 그나마 발작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크리스마스는 병실에서 로나와 둘이서 보냈다. 포장이 뜯기지 않은 채인 선물을 머리맡에 놓고, 편안하게 잠든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른 일어나. 얼른 일어나야지.
차마 그런 말은 입 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굳게 닫힌 눈꺼풀이 다시는 열리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게 될까 봐 두려워서.
그런데 로나를 치료할 방법이 있다고?
이제껏 애써 꾹 눌러 삼켰던 희망이 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살짝 맛본 희망은 이토록 달콤하다.
“어떻게요? 어떻게 하면 돼요?”
“한 가지 문제가, 로나를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해.”
“……네?”
최세드릭은 저도 모르게 경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안심시키려는 듯 이세인이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세한 설명은 다시 하겠지만. 새로운 치료법이 발견됐어. 외국에서 새 치료법을 쓰는 힐러를 초청하려고 해.”
“그러면 로나를 다른 데로 보낼 필요는 없잖아요?”
“의료 설비가 필요해서 그래. 안심하렴. 먼 곳으로 가는 게 아니라, 설비가 있는 병원에 입원하는 거야. 얼마간은 만나지 못하겠지만, 집중 치료 기간만 지나면 면회도 가능해.”
“…….”
“세드릭, 너만 괜찮으면 바로 진행할까 하는데, 어떠니?”
받아들여야 한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랫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로나를 치료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든 써야 했으니까.
그런데 계속 그를 괴롭히던 위화감이 혀를 무겁게 했다.
“……세드릭?”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이세인이 그의 표정을 살폈다.
이세인이 저렇게 웃었던가?
모르겠다. 어째서 이렇게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걸까.
망설임 끝에 최세드릭은 보류하는 답을 내놓는 것이 고작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생각해 보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그래, 고민되겠지. 천천히 생각해 봐. 로나를 치료하기에 정말 좋은 기회니까.”
“……네.”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최세드릭이 몸을 돌렸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기 전, 가까이 다가온 이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세드릭.”
“네?”
마치 지나가는 말인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투였지만 눈은 똑바로 최세드릭을 향했다. 최세드릭은 그 눈에서 모조 보석을 닮은 빛을 봤다.
“도서관엘 갔다 왔던데. 찾는 책은 손에 넣었니?”
“…….”
그가 대답하지 않자 이세인은 그대로 문을 닫았다.
달칵.
길드장실을 나온 최세드릭은 최로나가 있는 병실을 향했다. 동생의 얼굴을 보면 소란한 마음이 진정될 것도 같았다.
인기척 없는 복도를 지나 짙은 어둠이 깔린 병실.
전등 스위치를 누르기 위해 손을 뻗는데, 안쪽의 어둠이 움찔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침입자다.
“거기 누구지?”
날카롭게 물었지만 인영은 답이 없었다. 팟. 병실 안에 불이 들어왔다.
“으아악! 아이고, 눈아.”
침입자가 신음을 흘리며 손으로 눈을 감쌌다. 최세드릭은 곧장 그를 붙잡아 제압하려 했다.
“어, 당신은……?”
그런데 환한 불빛 아래 드러난 얼굴을 보고 동작을 멈췄다.
지난번 캠핑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권리을의 가족이라고 했었지.
“헉, 괜찮으세요?”
무심코 손을 뻗어 권석민을 일으키려 하다가 멈칫했다.
이 병실은 이중 잠금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자신, 이세인, 전담 힐러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지?”
최세드릭은 경계 섞인 표정으로 권석민을 살폈다.
가만 보니 옷차림도 이상했다.
며칠 동안 면도를 못 했는지 수염은 비죽 자라났고, 옷은 엉망진창이다. 어째서인지 왼쪽 발목에는 줄이 끊긴 족쇄도 차고 있었다.
“착한 아이에게 세뱃돈을 주러 왔지.”
권석민이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씩 웃었다.
* * *
이초록이 알려 준 그 전당포는 종로5가의 골목 깊은 곳에 있었다.
“어! 저기인가 봐요.”
나는 눈앞의 간판을 가리켰다.
주변의 식당은 이미 문을 닫아 컴컴한 골목 안. 눈이 아플 정도로 번쩍거리는 간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친절로 모시겠습니다.
안전한 전당포 24시간 영업
<진달래 전당포>
자기 입으로 안전하다고 적어 놓은 시점에서 하나도 안전해 보이지 않는다.
“와. 나 이런 거 느와르 영화에서 많이 봤어!”
“이찬아, 그런 말 하지 마.”
“왜?”
“그런 영화에서는 꼭 사람이 죽거나 뭐가 터지잖아.”
하지만 전당포는 정말 느와르 영화에 나올 것처럼 생기긴 했다.
그런 대화를 하다가 문득 전당포 옆에 붙어 있는 푯말에 시선이 갔다.
<영화 ‘비열한 헌터’ 촬영지>
‘진짜 찍었구나…….’
“들어갈까요.”
기유현이 먼저 문을 열었고, 최이찬과 내가 뒤따랐다. 딸랑. 유리문에 달린 종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정면의 유리 진열장에는 비싸 보이는 물건이 즐비했다. 하지만 카운터에는 사람이 없다. 나는 안쪽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안 계세요?”
잠시 뒤, 안쪽에서 커튼을 열고 전당포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암……. 이 밤에 손님이라니. 무슨 일로 오셨나요?”
보란 듯이 하품을 하지만 목소리는 조금의 잠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당포 주인은 붉은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자였다. 오른쪽 눈을 검은색 안대로 가려, 그야말로 느와르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카운터에 놓인 명함에 적힌 이름은 상호와 같은 진달래.
“물건을 찾으러 왔는데요.”
“손님 같은 분은 처음 뵙는데……. 무슨 물건을 찾으러 오셨을까.”
나는 진달래에게 이초록에게 받은 물품보관증을 건넸다. 그녀의 왼쪽 눈이 심드렁하게 내용을 훑었다.
“아. 그 영양제 말이군요.”
그러나 진달래는 물건을 돌려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최이찬의 말에 그녀가 물품보관증의 뒷면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 끝을 따라 최이찬이 자그마한 글씨를 더듬더듬 읽었다.
“물건을 찾기 위해서는…… 전당포 주인과 내기를 해서 승리해야 한다……?”
그리고 선명하게 적힌 이초록의 사인.
‘제대로 안 읽고 사인했구나…….’
뭐, 일주일째 양배추만 씹어 먹었다니까 저런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도 이해한다.
문제는 당장 저 만 어쩌고 생강용 영양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한 시간: 22:15:16]
나는 퀘스트 창의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이초록은 영양제를 새로 만들 수는 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말했다. 그러니 이 전당포에 있는 영양제를 돌려받아야만 한다.
“저는 꼭 그 영양제가 필요해요. 돌려받고 싶은데요.”
“계약 사항을 이행하면 됩니다. 나와 내기를 해서 이기면 물건을 돌려드리죠.”
“내기라면 대체 무슨 내기를 말하는 거죠?”
그때 듣고만 있던 기유현이 앞으로 나섰다.
“그럴 필요 없어요, 리을 씨. 긴급한 상황입니다. 미안하지만 강제로라도 받아 가겠습니다.”
“어머, 무서워라. 그렇게 차갑게 구는 남자는 인기 없어요.”
농담 섞인 말투로 감추었지만 진달래의 왼쪽 눈동자가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헌터님께서 그리하신다면 제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저는 내기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기유현이 고개를 까딱였다.
“이건 어떨까요. 이런 일을 하다 보니 듣는 이야기가 많아서요. 제게 이기시면 궁금해하실 정보를 하나 알려드리죠.”
“허튼 소리를 하는군요.”
“예를 들어, <성혜기업>이 만들어 낸 황금주란 무엇일까.”
“……!”
어떻게 그런 정보를 알고 있냐고 물었지만 진달래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내기에서 승리해야만 답하겠다는 태도였다.
어쩔 수 없나.
“저는 관대하답니다. 당신들 중 누구 한 명이라도 절 이긴다면 승리하신 걸로 쳐 드리죠.”
무언의 수긍을 읽어 낸 진달래가 카운터의 서랍에서 트럼프 카드 한 세트를 꺼냈다. 그것을 빠르게 섞어 테이블 위에 펼쳤다.
이 사람, 카드 섞는 게 프로의 손짓인데……? 떨떠름한 표정으로 트럼프 카드를 보자 진달래가 생긋 웃었다.
“그렇게 걱정하지 말아요. 운을 시험하는 간단한 게임이니까.”
게임은 흔히 하는 카드 짝 맞히기와 비슷했다.
뒤집어 늘어놓은 카드를 한 번에 두 장씩 뒤집는다. 짝이 맞으면 회수하고 틀리면 다시 내려놓는다.
카드를 전부 회수했을 때 게임이 끝나며, 더 많은 카드를 가진 사람이 이긴다.
특정 카드를 뽑았을 시 전체 카드를 다시 섞는다는 추가 룰이 있었지만.
운과 기억력으로 하는 간단한 게임이다.
“그럼 어느 쪽부터?”
“내가 먼저 하죠.”
최이찬이 자신 있게 손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음, 이거, 랑 이거…… 맞았다!”
자신만만한 태도가 거짓은 아니었는지, 최이찬은 이 게임을 꽤 잘했다.
문제는 진달래가 너무 잘한다는 데 있었다. 밥 먹고 카드 짝 맞히기만 했나?
결과는 최이찬의 패배. 최이찬이 유리할 때마다 귀신 같이 카드를 새로 섞었고, 그녀는 100% 맞는 카드만 골랐다.
잠깐, 100%?
운이 작용하는 게임에서 카드 뒷면이 보이는 게 아니라면 100% 정답을 맞히기가 가능한가?
“카드에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죠?”
내 의심에 진달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게 의심하는 손님들이 많으셔서, 카드는 매번 새 걸 사용한답니다. 에테르 반사 재질이라 스킬이나 다른 능력으로 뒷면을 읽는 것도 불가능해요.”
그래도 의심스럽다면 확인해 보라며 진달래가 카드를 내민다. 그녀의 말대로 아무런 장치 없는 보통 트럼프 카드가 맞았다.
두 번째는 기유현이었다.
기유현 역시 이 게임을 꽤 잘해서 박빙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의 마지막, 다시 진달래가 100%의 확률로 카드를 뒤집으면서 패배했다.
진달래가 마지막 카드를 뒤집기 직전, 무언가를 깨달은 듯 기유현이 입을 열었다.
“……당신.”
“진달래라고 불러 주세요.”
“각성자인 건 알았지만…… 예언가 클래스로군.”
문득 진달래의 짙은 그림자가 흔들린 것 같았다.
“제게 그렇게 대단한 능력은 없답니다. 모처럼 저를 즐겁게 해 주시는 손님들이 오셨으니 정식으로 소개를 드릴까요.”
“…….”
“한때는 불패의 겜블러 진달래라고 불렸었답니다.”
띠링. 그녀의 말이 끝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시스템 알림이 떴다.
[인물 정보를 획득했습니다.]
[이름: 진달래
등급: C
클래스: 한 치 앞의 예언가
스킬:
한 치 앞의 예언가(C) - 10초 뒤의 미래를 읽어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다.
???의 겜블러(B) - ???
비고: 불패의 겜블러 진달래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10초 뒤의 미래를 읽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