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아스는 자고 있어?’
“왜옭(없다).”
‘뭐?’
시계는 벌써 자정을 넘겼다. 늦은 시각인 데다, 괴물 나뭇가지 때문에 시내는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이럴 때 어딜 간 거지?
“냐아아아(아까 뉴스를 보더니 뛰쳐나갔다.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다고 걱정이 안 될 리가 없다. 곧장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다.
요 며칠 어딜 다니는 것 같았는데, 거길 간 걸까? 안전한 곳에 있다면 다행인데……. 나는 자꾸만 꼬리를 무는 걱정을 접어 넣었다. 신경은 쓰이지만 이유가 있겠지.
어쨌건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공간은 나의 출입만 허용하는 상태였다. 나는 두 사람에게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이공간을 향했다.
뜻밖에 미음이와 라임이도 두 사람에게 놀아 달라고 하는 대신 나를 따라왔다.
“왜오옭(분위기가 부담스럽다)!”
“뀨우! 뀨우!”
옆에서 라임이가 열렬하게 미음이의 말에 동의했다.
으음……. 기유현과 최이찬 사이에 있고 싶지 않았나 보다.
위험한 괴물 나뭇가지가 아니라 진짜 세계수 위그드라실이 가지를 드리운 이공간 안.
나는 이초록에게 받은 씨앗을 심은 곳으로 향했다. 던전 사탕수수를 심은 밭 근처, 씨앗은 여전히 싹을 틔우지 않은 상태였다.
‘슈슉. 슉. 슈슉. 슉.’
옆에서 이빨당근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이빨을 빛낸다. 으윽, 상당히 기괴한 광경이었다. 그냥 심어 두기만 했을 뿐인데 참 생명력이 질긴 당근이다.
어쩌면 이 이빨당근이 생강 씨앗에 갈 영양분까지 전부 빨아먹어서 싹이 트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근거는 없지만, 저 싱싱한 당근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만드라고라던전생강용 영양제를 꺼냈다.
‘제발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영양제는 점성이 있는 초록빛 액체였다. 이것을 숟가락으로 살살 떠서 밭에 뿌리자 금방 반응이 왔다.
“……! 이것 봐, 싹이 났어!”
초록색 잎이 올라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동안 보이지 않던 상태 창이 떴다.
[아이템: 만드라고라던전생강(★★☆☆☆)
종류: 식물
눈이 번쩍 뜨이는 알싸한 맛입니다.
상태: 자라는 중
성장까지 남은 시간: 00:10:00]
됐다. 정확히 생강이라고 이름이 떴다.
생강이 전부 다 자라기까지는 10분이 걸렸다. 나는 생강의 줄기가 위로 쑥쑥 자라는 것을 지켜보면서 미음이에게 말을 걸었다.
“미음아, 혹시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에 대해 아는 거 있어?”
“안다, 왜옼!”
“……어, 진짜?”
기대 없이 물었는데 의외로 안다는 답이 돌아왔다. 매번 뭘 물어봐도 모른다고만 하길래 이번에도 모를 줄 알았는데.
“캬갸갸옥! 나를 어떻게 보는 거냐!”
꼬리를 펑 터뜨리며 앞발을 날린 미음이가 설명했다.
“그건, 말 그대로 거짓된 세계에서 온 세피로트 나무의 가지다.”
“……거짓된 세계?”
“지금은 이미 사라진 세계를 말한다. 세피로트 나무는 그 세계를 지탱하던 세계수.”
세계수이긴 한데, 이 세계가 아닌 사라진 세계의 나무라는 걸까. 그렇다면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도 있단 뜻인가? 그야 판타지 소설 같은 데서 그런 설정 많이 봤지만…… 딱 와 닿지는 않는다.
으음…….
거듭 말하지만 나는 세계관 설명이 길면 헷갈려 하는 사람이니까, 새로운 개념은 한 번에 하나씩만 나오면 좋겠다.
“인간,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왜옹.”
미음이는 꺼림칙한 기색으로 말을 맺었다. 어째 수상하지만 더 말해 주지 않을 것 같다.
말해 주기 싫으면 됐다. 이제 곧 생강을 들고 그 괴물 나뭇가지를 처치하러 갈 테니 직접 알아낼 수 있겠지.
다만…….
“이 생강이 진짜 효과가 있을까?”
불안감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괴물 나뭇가지의 어마어마한 이름에 비해서 이 생강은 너무도 그냥 생강처럼 생겼으니까.
“왜오옹……. 불안해하지 말거라. 세피로트 가지는 꿈을 꾸는 영혼을 먹이로 삼는다. 반대로 만드라고라던전생강은 어떤 꿈이든 깨우지. 효과는 있다.”
“정말?”
“너는 유일하게 버프 커피를 만들 수 있는 각성자다. 네 힘이라면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 거다, 왜옹!”
“뀨우! 뀨우!”
미음이가 진지한 투로 나를 응원했고, 옆에서 라임이가 동조했다. 어쩐지 그 모습을 보니 불안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응.”
하하, 이 동물들에게 위로를 받는 일도 다 있네.
[아이템: 만드라고라던전생강(★★☆☆☆)
종류: 식물
눈이 번쩍 뜨이는 알싸한 맛입니다.
상태: 잘 자람]
마침 그때, 생강이 전부 다 자랐다. 나는 줄기를 붙잡고 그대로 생강을 뽑았다.
“이거, 정말 평범한 생강처럼 생겼는데…… 윽.”
나는 막 뽑아 낸 생강 줄기를 움켜쥐고 숨을 삼켰다.
뿌리 부분이 사람을 닮은 형상이었다. 움푹 패인 부분이 눈, 코, 입을 연상시켰다.
즉, 상당히 기분 나쁘게 생겼다. 그나마 비명을 지르거나 움직이지는 않아서 다행인가.
문제는 자라난 생강이 두 그루밖에 없다는 것이다. 999명을 구해야 하는데, 두 그루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어떡한다. 이초록에게 받은 씨앗은 예전에 전부 심었다. 이 두 그루로 양을 늘릴 수 있을까?
“뀨우! 뀨우웃! 뀨!”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라임이가 거세게 울었다. 나는 슬라임어 번역기를 꺼내 라임이의 말을 해석해 보았다.
‘1+1=3’
응?
“뀨! 뀨우우!”
‘1+1=3!’
……응?
라임이가 갑갑한 듯 몸을 튕겼지만, 도무지 뜻을 짐작할 수 없었다.
옆에서 미음이가 한숨을 쉬더니 라임이의 말을 풀어 설명했다.
“두 그루에서 각각 뿌리를 조금 잘라서 함께 심어 보아라, 왜옹.”
“그런데 왜 생강을 두 조각 넣어야 해?”
원래 종자는 하나만 심어도 되는 거 아닌가?
“자손을 혼자서 남길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왜옹!”
“엑…….”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다.
“……이렇게?”
미음이의 말대로 사람 형상을 한 생강의 끝을 잘랐다. 두 조각을 한데 심은 뒤 영양제를 넉넉하게 뿌려 주자 곧 반응이 왔다.
“됐다……!”
새로운 만드라고라던전생강이 자라났다.
이후는 같은 과정의 반복이었다. 생강 두 조각을 심고 또 심으니 오래 지나지 않아 생강이 밭을 가득 채웠다. 이 정도면 충분히 천 명에게 먹일 양이 될 것이다.
[인과율 충족으로 시스템 정보가 업데이트됩니다.]
[새로운 레시피 ‘진저에일’을 획득했습니다.]
충분히 생강이 자라고 나자 시스템이 업데이트되었다.
좋아. 이제 레시피를 만들기만 하면 된다.
바구니에 한가득 생강을 담아서 가게로 돌아가자 기유현과 최이찬이 나를 맞이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수확한 생강을 우르르 쏟아 냈다. 산더미 같은 양이다.
“돕겠습니다.”
“어, 나도! 내가 할게!”
두 사람이 돕겠다며 칼로 생강의 껍질을 벗기려 했지만 제지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으니까.
진저에일은 생강을 넣은 탄산음료다. 생강을 저민 다음 설탕과 함께 끓여 시럽을 만들면 향이 좋겠지만……. 지금은 긴급한 퀘스트를 해결하는 도중. 그렇게 느긋하게 만들 시간은 없었다.
다행히 이럴 때 쓸 수 있는 스킬이 있지. 쓰라고 있는 스킬은 써야 하는 법.
‘바리스타의 추출.’
[바리스타의 추출(D)
상세: (Lv.2) 혼합된 물질에서 원하는 물질만 추출한다.]
나는 이 스킬을 써서 생강즙을 추출했다.
주르르. 진한 생강즙이 추출됨과 동시에 가게 안에 알싸한 냄새가 확 퍼졌다.
“캬갸갸옭!”
“뀨우!”
강한 냄새를 싫어하는 동물들이 울음소리를 내면서 테이블에서 달아났다.
확실히 이거 냄새가 엄청나게 강하다. 음료에 조금만 넣어도 생강 냄새가 날 것 같았다.
무사히 생강즙까지 만들었으니 남은 과정은 간단했다. 나는 컵에 생강즙과 설탕시럽을 넣고, 얼음과 탄산수를 부어 잘 섞었다. 음료를 완성하는 순간 곧장 상태 창이 떴다.
[아이템: 진저에일(★★★★☆)
상태: 좋음 (남은 시간 : 01:00:00)
효과: 눈이 번쩍 뜨입니다.]
보글보글 탄산이 올라오는 황금빛 음료였다.
제대로 효과가 있나 확인하기 위해 살짝만 맛을 보았다.
“……읍, 쿨럭, 쿨럭!”
“리을 씨, 괜찮으세요?”
“괜찮아? 설마 저 생강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기침을 하는 나를 보고 두 사람이 후다닥 다가왔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은 뒤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입 안이 얼얼했다.
진저에일의 효과는 상태 창의 내용 그대로였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강렬한 맛이었다. 이미 밤보다 새벽에 가까운 시각, 긴장과 피로로 멍해진 머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이런 맛이라면 확실히 어떤 잠도 전부 깨울 것 같다.
“됐어요. 이 음료가 있으면 되겠어요!”
남은 과정은 이 진저에일을 대량 생산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음료를 한 잔씩 만들 시간은 없다.
나는 수확한 생강 대부분에서 즙을 추출해서 커다란 통에 담았다. 그리고 생강즙의 양에 맞추어 설탕시럽과 탄산수, 얼음을 붓고 국자로 휘휘 저었다.
상당히 대강대강인 방식이지만 괜찮다.
[아이템: 진저에일 대용량(★★★★☆)
상태: 좋음 (남은 시간 : 01:00:00)
효과: 눈이 번쩍 뜨입니다.
비고: 대용량입니다. 많은 사람이 마실 수 있습니다.]
제대로 상태 창은 떴으니까.
만드라고라던전생강을 기르고 진저에일을 만드는 동안 제법 시간이 흘렀다. 낮이 짧은 겨울. 아직은 캄캄하지만 곧 동쪽 하늘이 밝아오겠지.
나는 진저에일이 든 통을 인벤토리에 넣은 뒤 몸을 일으켰다.
“가요. 이제 나무가 된 사람들을 깨울 차례예요.”
우리는 곧장 이동 스크롤을 써서 괴물 나뭇가지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스크롤을 찢기 직전, 나는 우리 집 동물들에게 말했다.
“금방 올 테니까, 가게 잘 지키고 있어.”
“뀨우우!”
라임이는 금방 대답했지만 미음이는 말없이 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미음아?”
‘악의에 물든 저주의 왕을 조심하거라. 그자는…… 위험하다.’
미음이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동 스크롤이 발동되었고 시야가 멀어졌다.
* * *
“어, 리을 씨! 리을 씨가 왔다는…….”
거대한 은빛 나무가 밤하늘에 요사스러운 빛을 뿜어 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처음 괴물 나뭇가지를 발견했던 <슈퍼 버프 커피> 길드중앙동점의 창고 앞이었다. 현장에 있던 권지운과 주노을이 우리를 보고 알은체를 했다.
“물러나세요! 안전선 안으로 넘어오지 마세요!”
“드론 촬영 안 됩니다. 야! 거기, 드론 날리지 말라니까! 잡아!”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헌터TV의 최세라 기자입니다. 지금…….”
새벽이었지만 현장은 소란스러웠다. 헌터들, 공무원, 매스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거대한 은빛 나뭇가지 주변에 몰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