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이변이 발생한 직후, 원래 <던전관리청>과 헌터들은 나뭇가지로 변한 피해자들을 찾아 안전한 실내로 옮기려 했다.
그런데 그때, 창고에서 거대한 나무줄기가 자라나더니, 피해자들을 붙잡아 끌어당겼다고 했다.
힘으로 막으려 했지만 속수무책. 결국 999개의 나뭇가지가 나무줄기의 주변에서 군집을 이뤘다.
그렇게 이뤄진 대치 상태. 나뭇가지에 감싸인 창고는 마치 은빛 숲처럼 보였다.
“가지를 제거할 수는 없습니까?”
“시도는 해 봤지만…… 어렵습니다.”
기유현의 물음에 권지운이 고개를 저었다.
헌터들이 창고 안으로 들어가 나뭇가지를 잘라 보았지만, 잘라도 잘라도 금방 다시 자랐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나뭇가지를 자르면 자기 몸이 다친 것처럼 아파하는 피해자도 있었다. 나뭇가지와 동화가 이뤄져 감각을 공유하는 것이다.
무력으로 나뭇가지를 없애면 피해자도 죽는다. 힐링 및 그 밖의 스킬도 무효. 피해자 중 상당수가 헌터인 탓에 전력의 절대수도 부족했다.
그 때문에 현장은 교착 상태였다.
시간이 지나 다시 나뭇가지가 <슈퍼 버프 커피>의 커피를 마신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집어삼키면 끝인 상황.
나는 긴장으로 떨리는 숨을 삼키고 말했다.
“오빠, 나한테 저 사람들을 살릴 방법이 있어.”
“……! 그게 무슨 방법이지?”
그런데 이 혼잡한 현장에서 내 얼굴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나 보다. 주위에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카페 리을> 주인이 왔어!”
“진짜 버프 커피를 만드는 헌터야!”
“우와아아!”
웅성거림은 점점 커지더니 곧 환호성으로 변했다. 어찌나 소리가 큰지 귀가 아플 정도였다.
사람들이 내 앞에서 비켰다. 현장을 이끌던 강현우 헌터가 출입금지 테이프를 당겨 길을 열어 주었다. 내가 하려는 일을 얼마든지 하라는 듯이.
으, 응? 아직 무슨 방법을 쓸지 한마디도 설명하지 않았는데?
이 환호는 뭐지. <카페 리을>의 주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렇게 신뢰받는 건가?
열렬한 분위기에 당황한 나는 권지운을 돌아보았다. ‘역시 내 동생, 믿고 있었다구!’ 하는 표정으로 찡긋 윙크를 한다.
아니, 인간아, 그거 말고…….
“아하하…….”
나는 깨닫는다.
신뢰받는다는 것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다. 그러나 결코 불쾌하거나 거북한 느낌은 아니었다.
창고 안에 생겨난 은빛 숲. 나는 괴물 나뭇가지가 돋아난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얼른 잠에서 깨어나 집에 갑시다.
* * *
피부가 딱딱한 은빛의 수피로 변한 사람이 잠에 빠져 있었다.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고통은 없어 보이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완전히 나뭇가지로 변할 것 같았다.
나는 당장 인벤토리에서 대용량 진저에일이 든 통을 꺼냈다. 생강의 알싸한 냄새가 확 퍼졌다.
먼저 국자로 진저에일을 떠서 컵에 담았다. 그리고 스푼으로 진저에일을 잠든 사람의 입에 조심조심 흘려 넣었다.
몇 번인가 반복해서 진저에일을 마시게 했을 때였다.
잠든 사람이 거센 기침을 터뜨렸다.
“쿨럭, 쿨럭!”
“괜찮으세요?!”
“큭, 쿨럭!”
기침과 함께 입에서 황금빛 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액체는 턱을 타고 바닥으로 주르르 떨어지더니 곧 기화되어 사라졌다.
단단한 수피가 부드러운 사람의 피부로 변했다. 팔랑팔랑 나뭇잎이 떨어져 내린다. 마지막으로 나뭇가지가 사라지면서 시스템 알림이 떴다.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를 제거했습니다.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 998/1000명]
“윽…….”
피해자는 기력이 쇠했는지 바로 의식을 차리지는 못했지만 완전한 사람의 모습이다. 이제 바깥의 힐러들에게 인계하면 되겠다.
“……!”
바로 그때. 은빛 군집의 중심, 중앙의 나무줄기가 높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저게 본체인가?
굵고 커진 줄기는 마구 뻗어나가더니 둥글고 거대한 고치처럼 변했다. 그 바람에 입구는 봉쇄되었고, 나무로 변한 사람들이 고치에 얼기설기 얽혔다.
동시에 가늘고 긴 나뭇가지가 빠르게 나를 향해 날아왔다.
“으앗!”
매서운 움직임이었다. 고통을 느끼는 건지 가지는 마치 채찍처럼 마구 날뛰며 창고 안의 박스 더미를 무너뜨렸다.
24시간은 안 움직인다며? 원망을 쏟아 냈지만 들어 줄 사람은 없었다.
‘설마 이거 때문인가?’
나는 진저에일이 가득 든 통을 보았다. 강렬한 생강 냄새가 풍겼다. 만드라고라던전생강이 저 괴물 나뭇가지의 천적이라고 했지. 그래서 이 냄새에 반응하는 걸까?
생각을 거두고 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으아악! 이쪽으로 오지 마!”
미쳐 날뛰던 나뭇가지가 나를 공격하려 했기 때문이다. 진저에일이 든 통이 쏟아지기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다. 나는 몸으로 통을 감쌌다.
“……리을 씨!”
그 순간, 눈앞에 빛의 그물이 흩뿌려졌다.
기유현이었다. 촘촘한 빛의 입자가 괴물 나뭇가지를 붙잡고 가차 없이 잘라 냈다.
“키기기기기긱!”
귀가 아플 정도의 고음이었다.
……무슨 나뭇가지가 저런 소리를 내? 저거 사실 나무 아닌 거 아냐?
기괴한 비명을 질러 대던 나무줄기는 창고 바로 옆, <슈퍼 버프 커피>의 건물에 몸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쾅, 쾅, 쾅!
한 번 부딪치자 벽에 금이 갔고, 두 번 부딪치자 쩌억 금이 벌어졌으며, 세 번 부딪치자…….
무슨 나무가 돌을 저렇게 웨하스 부수듯이 부숴? 원래 돌이 나무보다 단단한 거 아냐?
그런 태클을 걸 틈조차 없었다. 와르르 벽이 무너져 내렸다.
…….
…….
“아야야…….”
나는 허리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거하게 넘어지기는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콘크리트 덩어리에 깔리는 일은 면했다.
다행히 뚜껑을 닫아 두어서 진저에일은 무사했다.
문제는 이 괴물 나뭇가지가 건물을 무너뜨리면서 바깥과 차단되었다는 것이다.
줄기에서 뻗어 나온 뿌리가 콘크리트 덩어리에 깊게 얽혔다. 주위는 콘크리트와 나무로 된 둥근 고치 상태였다.
함부로 나무를 잘라 냈다간 건물이 주저앉아 사람이 다칠 위험이 있었다. 그 바람에 내 뒤를 따라 진입하려던 바깥쪽 사람들의 발이 묶였다.
기유현이랑 최이찬은 어디 있는 거지?
“캘록, 캘록!”
흙먼지가 자욱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손부채로 먼지를 날리며 주위를 살펴보려고 애썼다.
그때, 이번에는 반대쪽에서 공격이 날아왔다.
“리을아, 조심해!”
마침 가까이 있던 최이찬이 검을 꺼내 크게 휘둘렀다.
샤샤샥! 검날이 나뭇가지를 베어 낸다. 펄떡펄떡 날뛰던 나뭇가지가 곧 힘을 잃었다.
“……칫, 뒤쪽!”
이번에는 기유현의 외침. 최이찬이 크게 턴을 하며 가로로 벤다. 비딱하게 서서 기유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쪽이야말로 똑바로 막지?”
“하하, 누가 할 소릴 하시는지.”
빛의 입자가 괴물 나뭇가지를 제거한다.
그러나 이 나뭇가지는 끝없이 사방을 에워쌌다.
“안 되겠군요. 리을 씨, 엄호하겠습니다.”
“안심해. 절대 다가오지 못하게 할 테니까.”
풀쩍! 최이찬이 창고의 박스를 밟고 뛰어올랐다. 기유현은 최이찬의 뒤를 공격하는 가지를 막으면서 안전을 확보해 나갔다.
어, 둘이 죽이 잘 맞네…….
기본이 힘숨찐 상태인 기유현과, 잠적 상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최이찬. 한 번도 같이 전투를 해 본 적이 없을 텐데도 호흡이 척척이었다.
사이가 좋아져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나.
“하하, 하…….”
괴물 나뭇가지가 여전히 주변을 감쌌지만 두 사람 덕분에 위험은 피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을 하자.
하지만…….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를 제거했습니다.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 997/1000명]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를 제거했습니다.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 996/1000명]
…….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를 제거했습니다.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 989/1000명]
곧 나는 한계를 느꼈다.
이 혼란한 틈에서 나뭇가지와 융합된 채 잠든 사람을 찾는다. 나를 공격하려는 나뭇가지에게 신경을 곤두세운 상태로 스푼으로 진저에일을 떠서 먹인다. 잠시 뒤, 피해자가 기침과 함께 황금주를 토해 낸다.
이 일련의 과정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남은 인원은 900명이 넘는다. 퀘스트 제한시간 동안 이 많은 피해자를 다 회복시키는 게 가능할까?
나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건물 잔해와 나뭇가지 때문에 도무지 외부에서 진입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
기유현과 최이찬은 끝없이 뻗어오는 나뭇가지를 처치하느라 손을 떼기는 힘들다. 다른 사람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다.
안 돼, 절망하지 말자.
사람을 치료하면 나뭇가지의 수가 줄어든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진저에일을 마시게 해서 깨우는 거야. 그렇게 나뭇가지의 수를 줄여 나가다 보면, 상황은 바뀔 거다. 분명…… 상황을 바꿀 수 있을 거다.
그렇게 긴장으로 굳은 몸을 움직이던 바로 그때였다.
“이쪽입니다!”
은빛 나뭇가지의 군집 반대쪽에서 여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모두 같은 디자인의 조끼를 걸치고 있었는데, 가슴 부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마왕 숭배교 <황혼>.
그리고 앞에서 그들을 이끄는 사람은 작은 키의 소년.
“응……?”
“도와주러 왔어, 누나.”
허리에 착 손을 올리고 의기양양하게 선언하는 소년의 모습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 집 아르바이트생 아스였다.
“아스!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야? 저 괴물 나뭇가지 때문에 입구가 막혔는데!”
“이리로 올 줄 알고 미리 와 있었지.”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
아스는 내 호들갑이 무색할 정도로 태연했다. 조금 뿌듯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그래도…….”
“크흠, 이럴 때가 아닙니다, 사장님.”
그때, 조끼를 걸친 노인이 부드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왕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현세에 현현한 마왕님의 주인님이시라지요.”
“네? 아뇨, 저기 호칭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마왕 숭배교 <황혼>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장님의 일을 돕겠습니다. 이것이 마왕님의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방법이니까요.”
“……네?”
“자, 하나씩 맡게!”
노인의 지시에 따라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진저에일을 옮겨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