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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136/192)

136화

나는 그제야 마왕 숭배교 <황혼>의 이름을 어디서 들어 봤는지 떠올렸다. 예전에 아스가 제출한 아르바이트 동의서를 쓴 종교 제단이다.

그 이후에 <황혼>의 정체가 신경 쓰여서 찾아봤었다. 마왕 숭배교라는 이름부터 수상하다. 어쩌면 뒤에서 위험한 짓을 벌일지도 모르잖아.

그러나 대단히 수상한 이름과 달리 딱히 위험한 짓을 하지는 않은 데다가…… 오히려 최근에는 각종 봉사 활동에 참여한다고 했던가.

뭐야, 좋은 사람들이잖아.

<황혼>의 사람들이 급식 봉사 경력이 느껴지는 능숙한 솜씨로 척척 움직였다.

진저에일을 옮겨 담는 사람, 나뭇가지가 된 피해자를 찾는 사람, 진저에일을 스푼으로 떠서 먹이는 사람 등……. 각각 역할을 나눠 컨베이어 벨트처럼 빠르게 피해자를 치료한다. 놀라운 분업화였다.

“마왕님을 위하여!”

“위하여!”

이런 의문스러운 구호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나 혼자서는 절대 불가능한 속도였다.

아스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어때. 내가 도움이 됐지?”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를 제거했습니다.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 913/1000명]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를 제거했습니다.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 859/1000명]

…….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를 제거했습니다.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 734/1000명]

나는 빠르게 갱신되는 시스템 창을 눈으로 훑었다.

“응, 엄청나게. 엄청 도움이 많이 됐어. 아스, 네 덕분이야.”

“이런 것쯤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으니까. ……언제든지 말해.”

머쓱한 말투였지만 표정에서는 채 다 감추지 못한 뿌듯함이 비쳐 보였다. 정말 착하고 귀여운 녀석이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눈으로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괴물 나뭇가지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에 따라 이 괴물 나뭇가지는 점점 힘을 잃어 갔다.

동쪽 하늘은 이제 제법 밝았다.

곧 밖으로 나갈 수 있겠다. 퀘스트는 성공으로 끝나겠지. 모두들 얼른 일어나서 집에 가자. 집에서 밥 잘 먹고 말 안 듣는 동물들이 기다리고 있다고요.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를 제거했습니다.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 1/1000명]

이윽고 퀘스트는 단 하나의 가지만 남겨 놓고 있었다. 안심하는 그때.

쿠르릉-

땅울림이 들렸다.

“어?”

갑자기 거대한 괴물 나무줄기가 우지끈 부러졌다. 그 갈라진 틈에서 무언가가 나왔다. 붕대를 감은 인간 같기도 했고 몬스터 같기도 했다.

시야가 빠르게 다른 빛깔로 물들기 시작했다.

“물러서요!”

누군가 소리를 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코끝을 스치는 에테르가 섞인 공기의 이질적인 냄새.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안다.

……던전이다.

[Warning: 비정상적인 접근입니다.]

[System Error: Unexpected Interrupt]

[System Error: Unexpected Interrupt]

[Warning! 이변 발생!]

[‘메인 퀘스트: 황금주의 비밀을 찾아서’가 강제 종료됩니다.

변경된 퀘스트 내용을 확인하세요.]

[메인 퀘스트: 던전 탐험 신비의 세계

큰일입니다!

마왕 숭배교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를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예상 밖의 개입이 감지되었습니다.

던전화가 발생했습니다.

무사 탈출을 기원합니다.

던전 보스 악의에 물든 저주의 왕 처치하기: (미완료)

던전에서 탈출하기: (미완료)

보상: 경험치(500exp), 명성(50), 인기(100)]

…….

…….

예상 밖이라고 하면 다야?

괴물 나뭇가지를 처치하기만 하면 된다며? 딱 하나 남아 있었는데!

속으로 불평불만을 쏟아 냈지만 시스템은 더 이상 반응이 없다.

“아야야…….”

나는 여기저기가 아픈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낯선 공간.

“아스, 어디 있어?!”

대답은 없다.

그뿐만 아니라 마왕 숭배교의 사람들이며 기유현과 최이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혼자 남았다.

왈칵 두려움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이 걱정되기도 했다.

여기에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우선 다른 사람들을 찾아보자.

* * *

“칫, 이런 이야기는 없었잖아!”

도시가 혼란에 빠진 바로 그 시각.

권리을이 한참 나뭇가지로 변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무렵, 텅 빈 <슈퍼 버프 커피>의 사무실.

블라인드 틈으로 창밖을 내다본 다이아 님이 혀를 찼다.

현 <별의 지혜 교단>을 재건한 위대한 교주. 성혜의 축복을 내리며 6인의 사제를 이끄는 선지자.

프라임 익스큐티브 다이아몬드를 줄여서 통칭 다이아 님.

종교의 콘셉트가 중구난방이지만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가자. 어차피 그가 인터넷 위키와 판타지 소설 등을 참고해서 적당히 지어 낸 설정이니까.

그가 믿는 유일한 신이 있다면 돈이다.

그런 다이아 님의 정체는 전과 3범의 사기꾼이다. 푼돈이나 만지작거리는 피라미 신세를 벗어나 큰 사업을 해 보고자 서울로 진출했다.

확신도 있었다. ‘그분’이 경제적 지원은 얼마든지 해 줄 테니 마음껏 날뛰라고 했으니까.

번듯한 번화가에 카페와 회사를 차리고 어깨에 힘깨나 주고 다녔다. 멋진 시간이었지.

그러나 이 사기꾼 다이아 님은 현재 위기에 처한 상태였다.

본인 카페에서 파는 커피를 마신 사람들이 괴물 나뭇가지에 잡아먹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별의 지혜 교단> 사람들도 예외는 없었다. 간부 중에서 살아남은 것은 오직 자신뿐.

교주 행세를 하는 동안 진짜 신성력이라도 생긴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크윽, 으아악! 다이아 님……! 살려 주세요!”

그렇게 애달프게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테이블 밑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수순으로, <던전관리청>은 괴물 나뭇가지 사건의 배후로 교단을 의심했다. 화를 피한 <성혜기업> 관련자는 전부 체포되었고, 다이아 님은 긴급 수배되었다.

“칫…….”

그는 다시 창밖을 내려다보고 놀라 몸을 숙였다. 건물 입구에 <던전관리청>에서 나온 헌터가 가득했다.

‘이래서는 문으로 도망치기는 힘들겠어.’

이런 이야기는 없었다. 그냥 황금주를 이용해 버프 커피를 만들어 팔면 되는 간단한 일거리였다.

인기를 끌어서 <카페 리을>을 폐업시키라는 것이 그분의 지령. 좀처럼 폐업을 할 기미가 없어서, 조만간 역(逆) 바이럴 마케팅을 시작할 계획이었는데.

어디에도 체포당할 위험이 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임무 완료를 한 걸음 앞두고 이런 일이 생기다니.

그는 그분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저 괴물 나뭇가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붙잡혔다간 그동안 벌인 자잘한 사기까지 전부 처벌받게 될 테다.

끔찍한 교도소 생활이 머리를 스쳤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잡힐쏘냐.

다이아 님은 아직까지 몸에 걸치고 있던 우스꽝스러운 하얀 가운을 벗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리고 로커에서 체크무늬 남방과 롱 패딩을 꺼내 입었다. 거기에다 모자까지 쓰자 흔한 인상이 된다. 바로 자신을 알아보지는 못하겠지.

마지막으로 열쇠로 잠가 둔 로커를 열었다. 로커 안에는 반짝거리는 황금색 액체가 담긴 병이 있었다.

그분이 주신 ‘마도서’의 파편을 보고 만들어 낸 전설의 아이템, 황금주였다.

겉으로는 대단한 능력이 있는 체 행세하지만 실제로는 F급 각성자에 불과한 다이아 님은 원래라면 황금주를 완성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분의 도움으로 이렇게 기적을 일으켰다.

“이것만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어……!”

회사 따위는 얼마든지 다시 만들면 돼.

다이아 님은 커다란 백팩에 황금주를 담은 뒤 등에 짊어졌다. 그리고 복도를 달려 자신만 알던 비밀 통로의 문을 열었다.

오래 함께한 동료가 나뭇가지가 되었거나 말거나 중요하지 않다. 나만 살아남으면 되니까. 그런 삼류 악당다운 생각을 하며 비밀 통로를 달렸다.

“윽……?”

그런데 점차 그의 걸음이 느려졌다.

등에 짊어진 백팩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된다. 고작 유리병에 든 액체. 한 손으로도 충분히 들 무게였을 텐데.

그러나 백팩은 점점 무거워져, 비밀 통로의 중간쯤에 왔을 때는 어깨가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더는 한 걸음도 걷기 힘들 정도였다. 결국 다이아 님은 걸음을 멈추고 백팩을 내려놓았다.

이거 왜 이렇게 무겁지?

그뿐만 아니라 백팩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묘한 소리도 들렸다.

“…….”

다이아 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직접 백팩 안에 황금주 병을 넣었다. 그러니 이 안에는 분명 황금주가 들어 있을 텐데 꺼림칙한 느낌이 든다.

이 안에 아주 무서운 것이 있으리라는 예감에 몸이 떨렸다.

그러나 다이아 님은 감을 믿지 않았다. 감 따위에 휘둘리다간 사기꾼 짓은 못하지.

자신의 장사 밑천을 놓고 갈 수는 없다. 안을 확인하기 위해 백팩을 연 순간이었다.

파삭!

황금주 병이 깨졌다.

【그르륵……. 드디어 해방되었군.】

“으, 으악!”

진물이 흐르는 몸을 붕대로 감싼 기괴한 인간이 나타났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 커다란 낫을 들었다.

아니, 저것이 인간이긴 한가?

다이아 님은 문득 마도서의 파편에서 언뜻 보았던 이름을 떠올렸다.

분명, 그 이름이…….

“저주의 왕…….”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서걱.

악의에 물든 저주의 왕이 낫을 휘둘렀다. 불쾌한 소리와 함께 핏방울이 튀었다.

절명한 인간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저주의 왕이 하늘로 떠올라 그들 세계의 세계수 곁으로 갔다.

예상 밖의 방해로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는 천 개의 가지를 뻗지 못하고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대신, 스스로 부러지는 것을 대가로 사명을 완수했다.

세계수의 사명이란 단 하나. 이 땅에 이미 소멸한 그들의 세계를 불러오는 것.

굉음과 함께, 부러진 세계수의 틈새로 섬광이 쏟아졌다. 이계의 공기가 섞이면서 빠르게 풍경이 변한다.

악의에 물든 저주의 왕은 광소했다. 이 땅은 이제 새로운 그들의 세계가 될 것이다.

공간이 공간을 침식하며 던전으로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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