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192)

137화

* * *

“현장 상황은 어떻죠?”

한 여성이 상황실로 들어왔다. 헌터는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고 몸을 일으켰다.

“김지나 요원님!”

“여전한가 보군요.”

김지나는 눈앞의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화면에 빽빽이 자란 은빛 나뭇가지의 군집이 비친다. 한 박자 늦게, 헌터가 설명을 덧붙였다.

“아, 네, 넵! 그렇습니다. 현장 A팀이 계속 진입 시도 중입니다. 하지만 저 나무가 아주 단단하게 얽혀서 진입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제거는 어려운가요?”

“네. 시도는 계속 하는데…… 제거해도 바로 재생됩니다. 자칫하다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칠 위험이 있어서 중지했습니다.”

“그래요.”

모니터에 뜨는 데이터를 빠르게 훑어 내리는 눈에 긴장이 서렸다.

한편 심각한 현 분위기에는 부적절할지도 모르겠지만, 처음 현장에 온 이 신입 헌터는 ‘그’ 김지나가 자신의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에 떨림을 느꼈다.

<던전관리청> 소속 공무원들의 살아 있는 전설, 바로 그 김지나가 아닌가.

비각성자도 시험만 합격하면 <던전관리청>에 임용될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것뿐, 실제로는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비각성자 전형 시험 자체도 어렵거니와, 시험을 합격하더라도 주위는 전부 각성자다. 텃세도 심한 데다가 시스템 창을 읽는 것조차 불가능하니 정보의 접근성에서 밀린다. 기껏 시험에 합격했는데도 3개월 안에 그만두는 사람이 대다수.

김지나는 그 바늘구멍을 뚫고 살아남은 사람이다.

처음에 그녀가 긴급 던전 대책 팀의 요원이 되었을 때는 편파적 인사라는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곧 모두 알게 되었다. 이런 인재를 헌터의 어시스턴트 따위로 소모하는 쪽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그녀는 역대 시험 응시자 중 유일무이한 만점자다. 그뿐만 아니라 시스템 창을 볼 수 없는 대신 모든 던전과 아이템, 몬스터 등의 정보를 그대로 머리에 집어넣은 괴물이다.

이번 사건만 해도 그렇다. 겉으로 이변이 드러나기 전, 저곳 <슈퍼 버프 커피>가 이상하다는 그녀의 말이 없었다면 이렇게 기민하게 대응할 수 없었을 테니까.

빠르게 <청라 길드>의 협조를 얻어 피해자를 확인한 것도 그녀가…….

“현재 안에 들어간 사람은 누가 있죠?

김지나의 물음이 상념을 일깨웠다. 헌터는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네, 넵! 그게, <백은 길드>의 최이찬 헌터, 신상 파악은 안 됐지만 <청라 길드>의 헌터 한 명, 그리고 <카페 리을>의 사장입니다.”

“안쪽이랑 연락은 가능해요?”

“계속 시도 중입니다! 하지만 통신 연결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리을 씨…….’

김지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제발 괜찮아야 할 텐데.’

그런데 얼마쯤 시간이 흐르고, 점점 빽빽하던 나뭇가지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안팎을 완전히 차단하던 나무의 고치가 힘을 잃는 것이 육안으로도 분명히 보였다.

“……! 대상, 힘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A팀 진입 준비하겠습니다.

“5분 뒤에 진입합니다. 힐러 대기 중입니다.”

나뭇가지가 힘을 잃으면서 현장에는 안도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때, 계속 모니터를 주시하던 김지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잠깐! 잠깐만요! 이거, 그럴 리가…….”

세피로트 가지는 힘을 잃어 가고 있는데, 모니터상의 에테르 수치는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설마……!’

“당장 대피해야 해요. 현장에 일반인들 대피시키고 진입 중지를……. 으앗!”

쿠르릉- 굉음과 함께 바닥이 크게 흔들렸다.

우당탕! 장비들이 쏟아지면서 상황실 안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흔들림이 멎고, 책상 아래로 피했던 김지나는 몸을 일으켜 창밖을 보고 놀랐다.

은빛 나무도, 최근 인기였던 카페도 온데간데없다. 아니, 그녀에게 익숙한 이 거리 자체가 변화했다.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강렬한 에테르가 건물들을 집어삼키더니 하나의 거대한 던전으로 변화했다. 던전 주위는 마치 두 개의 공간을 이어 붙인 듯 빛이 너울거렸다.

* * *

최세드릭은 방금 들은 말에 귀를 의심했다.

“아저씨가 우리 로나를 살릴 수 있다고요?”

그런 말을 하는 사기꾼은 이제껏 많이 만나 보았다. 그때마다 기대하고 실망하기를 반복했지. 최세드릭의 반응에 담긴 의심을 읽어 낸 권석민이 픽 웃었다.

“쯧, 쯧, 쯧. 무슨 젊은 애가 그렇게 의심이 많아서야. 이 아저씨가 하는 걸 잘 보고 있거라.”

권석민은 옷깃 속으로 손을 넣었다. 한참 뒤적뒤적하다가 끈을 매달아 둔 작은 병을 꺼냈다.

“에휴, 인벤토리를 못 쓰는 건 불편하다니까. 인벤토리 아껴 써. 제때제때 정리도 하고.”

뜬금없는 잔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최세드릭의 시선이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작은 병에 꽂혔다.

“그건 뭐죠?”

“티코운 영약이다. 체내 에테르 흐름을 바르게 하는 귀한 약이지.”

권석민은 곧장 티코운 영약을 잠든 최로나에게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다시 최세드릭이 권석민을 막았다.

“잠깐. 잠깐만요, 아저씨.”

“떼잉, 또 왜 그러느냐. 아, 세뱃돈 대신 주는 거니까 약값은 신경 안 써도 된다. 아저씨가 그 정도 능력은 되는 사람이다.”

“그게 아니라! 아저씨가 어떻게 로나를 알죠? 로나를 왜…… 낫게 해 주려는 거고요?”

“쯔쯔쯔, 애가 건전한 애착 형성을 못해서 마음이 많이 위축됐구만.”

“네?”

웃음기가 걷힌 표정으로 권석민이 최세드릭을 보았다.

“이유가 알고 싶은가? 네가 모르는 걸 알려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어쩌면 모르는 쪽이 마음 편할지도 모르지.”

“……!”

최세드릭은 생각했다.

로나가 잠들고, 자신이 S급이 되고, 길드가 커지고, 이온이 사라지고…….

이 일련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다른 무엇도 아닌 로나에 대한 이야기다. 그게 무엇이든 자신이 알아야 했다.

“알고 싶어요. 말해 주세요.”

“그래, 그래. 이 아저씨의 옛날이야기를 들어 준다니. 그럼 어디 한번 이야기해 볼까.”

“…….”

“6년 전, 이 아저씨는 이온에게 쫓기고 있었단다.”

“이온? 그 비서가 왜…….”

“떼잉, 성질도 급하기는. 계속 들어 보거라.”

권석민은 우연히 ‘마도서’라고 불리는 책을 손에 넣었다. 10년 전 자취를 감춘 <별의 지혜 교단>의 숨겨진 아지트에서였다. 그 책은 겹겹이 봉인된 채 깊이 감춰져 있었다.

이온은 권석민에게 마도서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거절하자 당장 그를 죽이려 들었다.

운이 좋아 한 번은 도망쳤다. 그러나 현역 헌터라고 하나 인간의 몸으로 미친 혼돈의 화신과 싸워 이길 자신은 없었다.

꼼짝없이 이대로 마도서를 빼앗기고 죽나 싶은 그때, 우연히 최로나를 만났다.

비 오는 날이었다. 마치 권석민이 나타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여분의 우산까지 들고 서 있었다.

“아저씨, 책을 숨길 곳을 찾고 있죠? 그 책, 내가 맡아 줄게요.”

첫눈에 최로나가 범상치 않은 힘을 지닌 소녀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원래라면 아무리 긴박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아직 어린 소녀에게 그토록 위험한 물건을 맡길 리 없었다. 그런데도 최로나에게 마도서를 맡긴 이유는…… 소녀가 권석민이 아는 사람을 닮았기 때문이다.

그 눈. 인과를 읽어 내는 특별한 눈. 어머니와 같은 힘. 그런 힘을 지닌 소녀라면 마도서의 힘을 억누를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마도서는 숨겼지만, 이온은 자신의 정체를 입막음하기 위해 권석민을 미로 던전에 가뒀다.

최로나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3년 뒤, 그녀를 경계한 이온이 손을 쓰리라는 것을.

그런 운명을 알면서도 받아들인 이유는…….

“잠깐만요. 그건 이상해요.”

“거 자꾸 끼어들 거냐, 떼잉.”

“우리 로나는 비각성자예요. 그리고 이온은 지난번에 사건을 일으키고 증발했고요.”

“…….”

“아저씨를 미로 던전에 집어넣고, 로나를 잠들게 하고……. 이온이 그만큼 강한 힘을 가졌다면, 왜 그렇게 쉽게 떠난 거죠?”

권석민은 잠시 가만히 최세드릭을 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세드릭이라고 했나? 세드릭, 너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

최세드릭은 받아들일 수 없는 답을 떠올리고 만다.

……지금의 이세인은, 진짜 이세인이 아니라고.

사실 이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그도 그럴 것이, 로나가 잠든 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세인마저 잃으면 그에게 가족은 아무도 남지 않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진실은 튀어나온 못처럼 존재를 드러낸다.

“…….”

위로를 건네는 대신, 권석민은 최로나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영약을 최로나의 입술에 흘려 넣으려는 찰나였다.

달칵. 병실의 문이 열렸다. 최로나를 전담하는 힐러였다. 침대맡의 권석민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힐러가 뒷걸음질을 쳤다.

“헉, 치, 침입자……! 최세드릭 헌터, 이게 무슨……!”

힐러가 손을 뻗어 비상벨을 누르려 했다.

엄밀히 말하면 힐러를 고용한 건 이세인이다. 힐러는 최세드릭의 말을 따를 이유가 없었으며, 이 병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이세인에게 바로 연락할 테다.

그것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세드릭이 힐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어지는 폭력을 예상하고 힐러가 몸을 뒤로 물렸다. 손가락은 비상벨을 누르기 직전이었다.

“……?”

그러나 최세드릭은 검을 꺼내는 대신 힐러의 손목을 세지 않은 힘으로 붙잡았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어째서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다.

큰 소음을 내지 않으려는 계산이었을 수도 있다. 단지 긴박함에 잘못된 선택을 한 건지도 모른다.

그냥, 이제까지처럼 힘을 쓰고 싶지 않아서.

“제발, 그러지 마. 부탁이야.”

힐러는 결단코 최세드릭에게 긍정적인 감정이 없었다.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기건 고용주에게 보고하고 보수를 받으면 상관없는 몸이었다.

그런데도 어떤 종류의 진심은 한순간 사람의 시선을 붙잡는다.

힐러는 비상벨을 누르려던 손을 거뒀다.

“……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 주세요.”

그 한순간이면 충분했다.

권석민은 최로나에게 영약을 먹였다.

잠시 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소녀가 눈을 떴다. 눈꺼풀이 열리는 그 모든 순간이 최세드릭에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로나야……!”

그러나.

“흑, 으, 윽…….”

가쁜 숨을 뱉어 내며 최로나가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괴로워 보인다. 작은 몸이 덜덜 떨렸고, 마치 기이한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머리카락 끝부터 은빛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권석민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설마, 그 미친 혼돈, 처음부터 이중으로 트랩을……!”

“오빠, 위험해. 도, 망쳐…….”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최로나가 의식을 잃었다.

바로 그 순간.

쿠르릉-

땅울림과 함께 바닥이 흔들렸다.

* * *

아무도 없는 방. 쪼르르 이세인이 컵에 따뜻한 차를 따랐다.

“그렇게 쉽게 깨어나게 둘 리가 없잖니, 세드릭.”

진한 향이 퍼진다. 이세인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생긋 웃었다.

“나는 이번 삶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예정이란다.”

희뿌연 새벽녘의 빛을 받으며, 그녀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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