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 * *
나는 눈앞에서 깜빡이는 시스템 창을 보았다.
기나긴 에러 메시지와 함께 퀘스트 창의 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무사 탈출을 기원합니다.]
그렇게 말만 하면 다인가?
아스와 마왕 숭배교 <황혼> 사람들의 도움으로 대부분의 괴물 나뭇가지를 처치했다. 남은 나뭇가지는 분명 단 하나. 그런데도 이변이니 예상 밖의 개입이니 어쩌니 하며 던전이 발생했다.
이렇게 억울한 일이 있을 수가.
시스템과 사용자 사이의 신뢰. 뭐 그런 걸 소중하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속으로 마구 투덜거렸지만 시스템은 답이 없다.
“…….”
“하아…….”
무시한다 이거지.
시스템을 위한 소비자 보호원이 있다면 신고하고 싶다.
나는 속으로 시스템에 불평하기를 그만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던전화라고 했지.
균열과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균열이 던전이라는 이공간으로 사람을 빨아들인다면, 던전화는 현실 세계를 던전으로 만든다고 한다.
제때 던전을 클리어하지 않으면 던전화는 점점 더 진행된다. 더 많은 공간이 던전에 잡아먹히는 것이다. (by 에테르-위키)
즉, 지금 서울 거리에 떡하니 던전이 생겨난 상황이라 이거지.
그 때문인지 나는 사방이 막힌 낯선 건물 안에 있었다. 탁 트인 튜토리얼 던전과도, 바다가 보이던 크투가의 던전과도 다르다.
창문이 없는 복도가 구불구불 이어졌다. 칠이 벗겨진 철판과 파이프, 벽에 나타난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 등, 전체적으로 SF 영화에 나올 듯한 분위기였다.
‘나는 게임도 판타지풍 배경만 하는데 SF풍이라니.’
“…….”
옆에서 태클을 걸어 줄 사람이 없으니 이런 생각을 해도 허무할 뿐이다.
인기척은 없다. 다들 뿔뿔이 흩어진 걸까.
[현재 던전화 발생 중입니다.
던전: 거짓된 세계의 신전
보스: 악의에 물든 저주의 왕]
정보라곤 이것뿐. 그밖에는 시스템에 지도 한 장 뜨지 않았다.
으음, 이대로 가만있어도 어쩔 수 없다. 일단 다른 사람을 찾아서 움직여 볼까.
그렇게 복잡하게 얽힌 복도를 따라 얼마간 걷는데, 앞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는 못한다니까요!”
어, 이 목소리는……?
“그러면 나는 놓고 가세요!”
“혼자 남으면 위험하다니까. 같이 가요.”
“친구를 두고 가라니,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아, 거, 그러다 죽든가 말든가 맘대로 하쇼!”
세 명의 헌터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가만 들어 보니, 여기 남겠다는 한 명을 나머지 두 명이 설득하는 것 같았다.
바스락.
나는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면서 가까이 다가갔다. 놀래키지 않고 다가가 말을 걸 요량이었다.
그런데…….
“으아아악? 모, 몬스터인가?!”
퍽 간이 작은 성격인지 헌터가 껑충 뛰어올랐다. 그러다가 내 얼굴을 보고 가볍게 놀란다.
“어, 사장님……?”
“아하하, 안녕하세요. 이런 데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정말 몰랐다.
그는 힝행홍 씨였다.
힝행홍을 포함한 헌터 세 명은 나와 마찬가지로 괴물 나뭇가지 인근에 있다가 던전화에 휘말렸다고 한다. 이곳을 헤매던 중 서로를 발견했고, 다 같이 파티를 짜서 이동하려던 참이었단다.
“그런데 아까 싸우는 소리가 들리던데요.”
“싸운 건 아니고요! 이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잖아요!”
억울한 표정으로 힝행홍이 이어 말했다.
“내 친구를 놓고 가라잖아요!”
“그치만 여기 계속 머무를 수는 없어요.”
“친구요? 친구분이 어디에 있는데요? ……아.”
힝행홍의 뒤에 은빛 나뭇가지에 뒤덮인 채 의식을 잃은 사람이 있었다. 나뭇가지가 이미 뿌리를 내려 그를 데리고 이동하기가 곤란한 상황이었다.
아직 처치하지 못한 괴물 나뭇가지의 수는 하나. 그게 마침 힝행홍의 친구였나 보다.
다행이다. 그런 일이라면 내가 해결할 수 있으니까.
“잠깐만요. 이거랑 음, 이거…….”
진저에일이 담긴 통은 던전에 들어오면서 잃어버리고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인벤토리에 따로 담아 둔 만드라고라던전생강 토막이 있었다.
음, 편리한 나머지 뭐든 인벤토리에 넣고 보는 버릇이 도움이 될 때가 있구나.
인벤토리를 제때제때 정리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머지 재료는 터무니없이 비쌌지만 차원의 상점에서 살 수 있고……. 음, 이거면 됐다.
‘던전 탐험도 커피 한잔 후.’
[던전 탐험도 커피 한잔 후(B)
상세: (Lv.1) 던전에서 음료 제조 시 완성도가 높아진다.]
다시는 이 스킬을 쓰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곧 스킬로 진저에일 한 잔을 만들 수 있었다.
“이게 도움이 될 거예요.”
나는 막 만든 진저에일을 떠서 힝행홍의 친구에게 먹였다. 잠시 뒤 그가 황금빛 액체를 토해 냈고, 괴물 나뭇가지가 힘을 잃고 사라졌다.
“크흑……! 사장님, 감사합니다! 평생 단골 할게요!”
그것 참 감사한 말이지만…… 우선은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겠다.
“그럼 일단 통성명이라도 할까요. 전 권리을이에요.”
아직 완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한 힝행홍의 친구를 제외하면 인원은 이랬다.
“김형홍입니다. C급 탱커고요, 그냥 힝행홍이라고 불러 주십쇼!”
“이유미예요. E급 마법사……. 혹시 꼭 닉네임으로 말해야 하는 건가요?”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크, 크흠.”
내 시선을 느낀 그가 황급히 모자를 눌러 썼다.
누가 봐도 얼굴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수상하다.
하지만 이곳은 좁은 통로. 피할 곳은 없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한 걸음 다가서려던 찰나였다.
“모, 몬스터예요!”
“……!”
푸드덕푸드덕, 거친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통로의 반대쪽에서 거대한 곤충 떼가 나타났다.
[오염된 황금 나비(C)가 나타났습니다.]
[오염된 황금 나비(C)가 나타났습니다.]
[오염된 황금 나비(C)가 나타났습니다.]
윽…….
얼룩덜룩한 무늬가 있는 황금빛 날개가 거의 사람 몸집만 했다.
저렇게 징그럽게 생긴 것을 나비라고 퉁쳐서 불러도 되나? 세상의 다른 나비들에게 너무한 것 아닐까?
“크읏! 이리 모이세요!”
힝행홍이 방패를 들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의 뒤로 몸을 피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나비 떼가 달려들었다.
나비 주제에 힘이 엄청나게 세서 몸이 뒤로 밀린다. 거기다 날개에서 나오는 금빛 가루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쿨럭, 쿨럭!”
“마시면 안 돼요! 마비 효과가 있는 가루예요!”
마법사인 이유미가 옆에서 소리쳤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약간 가루를 마신 다음이었다. 발끝이 저릿해지며 감각이 둔해졌다.
윽, 이대로라면 제대로 공격 한번 하지 못하고 마비에 걸리게 생겼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때 문득, 손가락에 낀 붉은 돌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거라면……!
“쿨럭, 다들 피해요……!”
나는 일행이 뒤로 물러난 틈을 보아 크투가의 반지를 사용했다.
화르르-
강렬한 불꽃이 전방의 나비 떼를 사정없이 공격했다. 체력이 깎인 나비가 비실비실 쓰러진다.
살았다. 다시 한번 크투가의 반지를 써서 끝을 내려는 찰나였다.
“어, 잠깐만, 당신 뭘 하려고……!”
아까 얼굴을 감추려 하던 헌터가 갑자기 방패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내가 거의 다 해치운 나비 떼를 향해 크게 검을 휘두르면서 이렇게 외쳤다.
“이야아압! 지존검법!”
“…….”
“지존의 아이언 팡!”
나비 떼가 완전히 재가 되어 스르륵 사라졌다.
[몬스터: 오염된 황금 나비(C)를 처치했습니다.]
“으하핫! 괴물 나비 떼 따윈 이 지존의 스킬을 버티지 못하는군!”
허리에 손을 얹고 호쾌하게 소리를 치는 헌터.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김지나의 오빠이자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 헌터, 지존이었다.
그것 참 뭐랄까…… 세상 한번 좁다.
* * *
“크으, 읏…….”
아스는 정신을 차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제 손이 허전한 것을 보고 아스는 낙담했다.
현실이 허물어지고 이질적인 공간이 생성되는 순간, 아스는 곧장 권리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손은 닿지 않았고, 눈앞에서 그녀를 놓쳤다.
그 바람에 그녀와 떨어진 채 던전에 들어온 것 같다.
주위는 거대한 원형의 홀. 녹슨 철제 기둥에는 낯선 문자가 새겨졌다.
코끝에 불쾌한 냄새가 스친다. 기분 나쁜 장소였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장소를 억지로 소환한 듯 거슬리는 이질감이었다.
제법 많은 사람이 휘말렸을 테지만 그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 던전 어딘가에 있을 권리을만 찾아서 나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아스가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소리가 들렸다.
【그르륵…….】
날카로운 못으로 철판을 긁는 듯한 불쾌한 소리, 절로 얼굴이 찌푸려지는 매캐한 악취.
짓물러 흘러내리는 피부 위에 붕대를 칭칭 감고, 커다란 낫을 들고 주변을 배회하는 자였다.
이 던전의 주인인가.
[마력 절약 모드를 사용 중입니다.]
[대상의 섬멸이 어렵습니다. 회피를 추천합니다.]
…….
그렇게 일일이 알림을 띄우지 않아도 알고 있다.
호승심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 목적은 어디까지나 권리을을 찾아서 이곳을 탈출하는 것.
굳이 저것과 싸울 필요는 없다. 아스는 그대로 기척을 죽이고 홀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르륵……. 누구냐.】
그때, 던전의 보스, 저주의 왕이 아스를 발견했다.
“칫……!”
들켰나.
저주의 왕이 낫을 치켜든다. 아스가 황급히 바닥을 박차고 저주의 왕을 피하려는 찰나였다.
“마왕님!”
“마왕님을 지켜라!”
어디선가 나타난 마왕 숭배교 <황혼>의 일원들이 아스의 앞을 막아섰다.
“너희! 미쳤어?”
“걱정 마세요, 아스모데우스 님!”
“저희 <황혼>이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런 종잇장 같은 몸으로 지키긴 뭘 지켜!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얼른 도망쳐!”
그러나 마왕 숭배교 <황혼>은 막무가내였다. 거대한 낫이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젠장. 다른 인간 따위 알 바 아니다. 스스로 죽고 싶어서 낫 앞에 몸을 던진다는데 눈 하나 깜짝할쏘냐.
그러나 저들의 맨 앞은 교주. 수염이 성성한 할아버지다.
한때 권리을이 말했다. 노인은 공경하라고 말이다.
딱히 이 인간들을 신경 쓰는 건 아니지만, 진짜 아니지만…….
내버려 두었다간 그녀에게 노인을 공경하지 않았다고 혼이 날 테다. 그건 싫다. 그것뿐이다.
[대상의 섬멸이 어렵습니다. 회피를 추천합니다.]
“나도, 안다고……!”
아스는 눈앞에서 깜빡거리는 알림 창을 무시하고 손에서 마력을 폭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