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펑! 마력탄이 저주의 왕을 직격했다. 낫을 든 오른팔이 그대로 날아간다.
“오오, 마왕님이시여……!”
“아니, 저거 아직 멀쩡해.”
스르륵.
곧 오른팔이 재생했다. 기괴하게 뻗어 나온 팔이 핑그르르 공중을 도는 낫을 다시 움켜쥐었다.
【그르륵……. 네가 마왕 아스모데우스라고?】
기괴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저주의 왕이 아스를 보았다. 얼굴을 뒤덮은 붕대의 틈새로 붉은 눈이 빛났다.
“……그래.”
【그르륵…….】
“내가 심연에 있는 그분의 마력을 나누어 받은 화신체. 세계에 황혼을 불러들이는 마왕이다.”
“우와아아!”
담담한 아스의 선언에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마왕 숭배교 <황혼> 일당이 환호성을 질렀다. 교주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그럴 타이밍 아니야…….”
아스는 엷게 한숨을 쉬고 틈을 보았다.
젠장. 이 몸은 가용할 수 있는 마력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나마 권리을의 커피를 꾸준히 마신 덕분에 모은 마력이 약간 있다.
두 번, 잘하면 세 번은 공격 가능할까.
원형의 홀은 사방으로 통로가 뻗어 있다. 한 번 공격했을 때 벌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수 초.
그 틈에 저 어리석은 인간들을 통로로 밀어내고 두 번째 공격. 마지막 공격은 예비로 남기고 도망친다.
아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곧장 공격을 하기 위해 섬세하게 위치를 조절한다. 하지만.
【크흣, 크하하하! 그르륵…… 흐, 하핫!】
악의에 물든 저주의 왕이 갑자기 아스를 향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우스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 허리를 꺾으며 숨을 꺽꺽 들이마신다. 그러더니 붉은 눈을 아스에게 향하고는 빈정거렸다.
【네가 그 심연의 화신체라고?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군.】
“…….”
【너, 레플리카구나.】
【원시의 혼돈을 모방한 불완전체. 결함품. 엉망진창이야, 아주 엉망진창이야. 크하하핫!】
“누구더러 그런 말을……. 나는 유일한 심연의 화신체다.”
【그르륵……. 부정하려는 건가. 그 약해 빠진 몸으로?】
【진짜 심연의 마왕이라면 나 따위는 순식간에 해치웠을 텐데. 스스로가 가장 잘 알지 않나? 자신이 불량품에 불과하다는 걸.】
“큿…….”
부정할 수가 없었다.
부족한 마력으로 겨우 빚어낸 작고 약한 몸. 본체와 완전히 연결이 끊겨 쭉 불안정한 상태였으니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불완전체인 자신이 원망스럽다.
나름대로 권리을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은 여기까지. 약한 인간의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르르륵…….】
저주의 왕이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그리고 손에 든 낫을 크게 휘둘렀다.
쉬이익- 푸드덕푸드덕!
어디선가 거대한 나비 떼가 날아왔다. 날개가 사람 몸집만 한 황금빛 나비 떼가 아스에게 마구 달려들었다.
얼룩덜룩한 무늬가 있는 날개에서 금빛 가루가 흩뿌려졌다. 가루가 몸에 닿는 순간 얼어붙은 듯 팔다리가 뻣뻣해진다. 마비독인 것 같았다.
【안심해라, 마왕의 모조품이여. 갈 곳 잃은 몸을 금방 심연의 밑바닥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
“크, 으읏…….”
이번에야말로 끝인가.
적어도 소멸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권리을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탄식을 삼키는 아스의 앞으로 다시 마왕 숭배교 <황혼>의 일당들이 나섰다.
“안 돼! 모두 모여라! 마왕님을 지켜야 한다!”
“안심하십시오, 마왕이시여……!”
“이…… 이 멍청한 인간들아! 얼른 도망치라는 말 못 들었어?!”
나비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났다. 이제는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거대한 황금빛 나비가 아스의 앞을 막아선 인간들을 잡아 뜯으려는 순간이었다.
【크으윽?!】
움찔. 이상을 느낀 저주의 왕이 한 걸음 물러났다. 곧장 나비를 산개시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스르륵-
보일 듯 말 듯 가는 빛의 실이 허공에 나타났다. 실은 곧 거대한 그물이 되어 나비를 안에 가뒀다.
그리고 무참하게 찢어발긴다.
“키에에에엑!”
나비가 소리를 지르며 날갯짓한다. 그러나 촘촘한 빛의 그물은 더욱더 나비 떼를 옥죌 뿐이었다.
나비가 전부 먼지로 화해 사라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황한 저주의 왕이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누구냐!】
탁.
가벼운 몸짓으로 바닥에 내려선 기유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스스러운 몬스터가 하나, 봉사 활동을 즐기는 선량한 사람들이 여럿, 그들을 지키고자 하는 인외 아르바이트생이 한 명.
“……하하.”
기유현은 살짝 웃음 짓고는 말했다.
“제가 제때 나타난 것 같군요.”
한 명이 더해진 것만으로도 전황은 격변했다.
거대한 홀의 중앙.
기유현은 흔들림 없이 곧은 자세로 섰다. 검은 눈동자가 무감정하게 저주의 왕을 눈에 담았다.
여유로운 태도였다. 그 여유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가볍게 저주의 왕을 압박했다. 빛의 장막이 적의 몸을 묶고, 무자비한 공격에 거대한 낫이 날아간다.
거칠게 분류하자면 마법과 비슷한 능력이다. 그 때문에 ‘무원’의 능력을 마법이라고 아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실체는 세계의 더 깊은 부분, 인과율을 건드리는 것이다. 빛의 입자가 세계를 무너뜨리고 또 일군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힘을 써 보는 건 오랜만이네요. 본의 아니게 힘숨찐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별로 전력을 다할 일이 없어서.”
【그르륵……. 인간 주제에, 이런 힘을…….】
“미안해요. 일행을 찾으러 가던 길이라 오래 상대는 못 해 드리겠군요.”
빛의 장막이 저주의 왕을 봉쇄한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아스가 불쑥 물었다.
“나를 왜 돕는 거지?”
기유현이 살짝 눈만 움직여 아스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저 사람들을 돕는 이유와 같아.”
“그건……. 그냥 혼나기 싫어서.”
생략된 말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기유현은 ‘누구에게?’라고 묻는 대신 말했다.
“그럼 같은 이유라고 해 둘까. 너를 다치게 하면 슬퍼할 테니까.”
기유현의 손 안에서 만들어진 빛의 입자가 적의 소멸을 부른다.
당황한 저주의 왕이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자, 잠깐……! 나는, 소멸한 세계의 주인이었다. 궁금하지 않나? 어째서 세계가 소멸했는지! 곧 이 세계도 □□에 의해……!】
“적과 협상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별로, 궁금하진 않네요.”
정적인 힘이었다. 굉음도 폭발도 없다. 화려한 무기를 휘두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넓게 퍼진 백광의 입자는 분명하게 세계를 재구성한다. 저주의 왕에게 확실한 소멸을 선사하려 한다.
차분히 눈이 빛나고.
문득 아스는 위화감을 깨닫는다.
저것은 한때나마 한 세계의 주인이었던 자. 그리고 이 남자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인간. 인간이 이렇게 간단하게 저주의 왕을 해치울 수 있다고?
‘일개 인간이 인과율에 이르는 힘을 사용하다니, 그렇다면…….’
아스는 섬뜩한 깨달음을 그대로 입에 올렸다.
“당신, 그걸 계속 사용하다가는 죽을 거야.”
* * *
“으잉?”
최이찬은 깜짝 놀라 발을 멈췄다.
끼기긱-
마구 달리던 몸이 벽에 부딪히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정지했다.
이 SF 영화에 나올 듯한 외양의 던전에 홀로 떨어진 것이 수십 분 전.
당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일단 한 바퀴 달리다 보면 권리을을 찾을 수 있겠지.
장소는 던전. 함정과 몬스터가 끝없이 나타났지만…….
“으랴아!”
기민한 동작과 동물적인 감으로 해치우고 계속 달렸다.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적재적소에 참견하기도 했다.
【20m 앞에 함정. 그 다음 갈림길에서 왼쪽.】
“OK!”
【↑↓→ → + 공격】
“이야압!”
【↗ → →↓ + 회피 + ↘ ← ← + 공격 + ↑↗↓↑】
“저기,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는 못 움직이거든?”
【미안하다……. 요즘 액션 게임에 빠져 있다 보니.】
“…….”
하도 자신만만하게 길을 안내하길래 믿고 한참을 달렸는데, 막다른 길이 나왔다.
아차. 아까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야 했나? 다시 돌아갈까?
【아니, 맞게 왔다.】
“막다른 길인데? 그보다, 권리 찾아야 된다는 말 못 들었어?”
【그 전에.】
팟!
갑자기 전등이 켜졌다.
쿠쿠쿵-
벽인 줄 알았던 앞은 사실 문이었다. 쇳덩어리가 바닥을 긁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헉! 설마, 여기는……?”
최이찬은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널찍한 방의 한가운데에는 자그마한 제단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올려진 단검.
본 적이 있는 공간이다. 처음 이 목소리와 계약을 맺었을 때, 이 목소리는 미래를 알려 준답시고 여러 환상의 조각을 보여 주었다. 어떤 환상은 거대한 용이 날아다녔고, 또 어떤 환상은 해골 뼈다귀 병사들이 전쟁을 했다.
대부분은 관심 없는 내용이라 곧 잊어버렸지만…….
【기껏 보여 줬는데 너무하구나.】
단 하나, 선명하게 기억에 남은 장면이 있었다. 고요한 제단과 아름다운 단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봉인된 상태라 아무나 쉽게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었는데…….
늘 목에 걸고 다니는 검은 펜던트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래, 때가 되었다. 검을 잡아라, 용사여.】
* * *
나는 일행들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서 잠깐만 쉬었다 갈까요?”
“좋죠!”
친구를 등에 짊어지고 걷느라 지친 힝행홍이 제일 먼저 찬성했다. 마법사라 체력 스테이터스가 낮은 이유미도 쉬고 싶은 기색이었다.
“크흠! 다들 피곤하면 어쩔 수 없지!”
두 사람이 동의하자 지존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몬스터도 함정도 없는 적당히 넓은 공간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 주저앉았다.
이 던전에서 헤맨 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다.
이제껏 몇 번 몬스터와 조우했다. 다행히 처음의 거대 나비 떼만큼 위협적인 몬스터는 없어 처치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가도 가도 나오는 것은 복도뿐이라는 점.
다른 사람을 찾기 위해 계속 탐지 마법을 쓰던 이유미가 고개를 저었다.
“하아……. 없어요. 최대 범위로 탐지했는데 사람이고 게이트고 나오는 게 없네요.”
“쉬기로 했으니까 일단 휴식하죠. 가다 보면 나오겠죠.”
“그럴까요.”
내 말에 이유미가 탐지 마법을 거둬들였다.
“이 녀석 도저히 더 이상 못 들겠어요!”
철퍼덕!
과격하게 바닥에 친구를 내려놓은 힝행홍이 투덜거리며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냈다. 그리고 아직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친구의 입에 냅다 꽂아 버렸다.
꿀꺽, 꿀꺽……. 포션이 입 안으로 흘러 들어가고.
“푸으, 헉! 맛없어! 엄청 맛없어!”
얼굴을 구기며 친구가 깨어났다.